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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맹 Apr 13. 2021

탄자니아에서 내가 살던 집 #1

하늘도 가까웠고 별들도 가까웠다.

파리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아프리카의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탄자니아로 20대의 마지막을 봉사활동을 하며 보내겠다는 결심이었다. 꼬박 하루가 걸려 도착한 탄자니아의 다레살람(Dar es salaam). 내가 속한 NGO 단체의 학교로 들어가는 길은 시내에서 꽤나 걸렸다. 중간에 페리를 한 번 타기도 했다. 그 후 드문 드문 보이던 작은 가게들도 사라지고 비포장 도로가 시작되었다. 하늘과 점점 더 가까워졌고, 간간히 그 휑한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우당탕 거리며 비포장 도로를 달렸을까. 순간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부지에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을 듯 세워져 있는 농업대학. 내가 1년을 보낼 곳.

학교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하늘이 땅으로 더 가까이 내려앉은 이 곳에서 맞이하는 첫 노을이었다. 어둠은 순식간에 이 곳에 자리 잡았다. 어둠이 내려오는 속도를 늦출 것이 많지 않은 곳이기에 나는 쉽게 어둠에 안겼다. 한국의 집을 떠나온 지 30시간쯤 되었을까? 옷을 갈아입는 것도, 세수하는 것도, 짐을 푸는 것도 잊은 채 맥주를 들이켰다.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가까웠고 별은 멀었다. 느슨하게 하늘에 매달려있는 별을 세며 맥주를 계속해서 마셨다. 어떤 음악도, 어떤 계획도, 어떤 표정도 필요 없었다. 




내가 지내던 곳은 학교의 선생님들이 지내는 관사. 정사각형 구조의 집 앞문을 열고 들어가면 집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거실 겸 주방이 있었다. 주방에는 앞문과 마주 보는 위치에 바로 뒷문 있었는데, 유독 그 문 틈 밑으로 바퀴벌레나 전갈 같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와 날 놀라게 하곤 했다. 거실은 밖에서도 훤히 안이 들여다 보이는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거실에 오랜 시간 머물지는 않았다. 집의 나머지 3분의 1은 화장실과 작은 방 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인 없는 매트리스가 몇 개 쌓여있는 방은 사용하지 않고, 침대 프레임과 책상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방을 사용했다. 두 방 사이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화장실을 포함한 방들의 문이 굉장히 무거웠다. 왠지 모르게 방 문이 닫혀있는 게 싫어서 늘 무거운 의자로 문이 닫히지 않게 막아두었다.


탄자니아에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물과 전기가 아닐까 싶다. 원한다면 언제든 쓸 수 있는 물이 아니고, 스위치를 켜면 바로 들어오는 전기가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커다란 물탱크를 사용하여, 단수가 되었을 때를 대비하곤 했다. 하지만 전기가 나가면 물탱크가 채워지지 않아 물과 전기는 바늘과 실처럼 한 세트로 생각해야 했다. 

어느 날에는 11시간 동안 전기가 없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축구를 했다. 축구를 하지 않으면 응원을 했다. 온 동네에 전기가 나갔는지, 동네 주민들도 하나둘씩 모여드는 축구경기를 나도 함께 구경했다. 스멀스멀 어둠이 내려앉자, 달려드는 모기 때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밤이 아닌 낮부터 시작된 전기 없는 11시간은 길었다. 정말이지 그런 날은 잠도 오지 않았다. 삑 소리와 함께 11시간 만에 들어온 반가운 전기에 재빨리 잠들어버린 노트북과 핸드폰을 충전했다. 녹아내린 냉장고의 음식들은 다시 찬 기운을 되찾고 있었다. 이제 불 켜고 씻어볼까 하니 어느덧 물이 끊긴 후였다. 


나의 냉장고에는 식재료가 3할 맥주가 7할이었다. 원래도 요리를 즐겨하거나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식사는 거의 서바이벌 급으로 먹었다. 냉동 소시지, 참치 캔, 양파, 마늘 그리고 참 많이도 먹은 감자를 가지고 세네 가지의 음식을 번갈아가며 해 먹었다. 가끔가다 고기를 구워 먹을 땐 질이 좋지 않은 고기였을지언정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내에서 장을 봐올 때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사 오면 들어오는 길에 다 녹아버렸다. 45km의 거리를 3개의 이동수단을 이용해서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틀간 다시 꽁꽁 얼려야 아이스크림 맛이 났다. 그래서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사는 대신, 학교에서 2km의 거리에 있는 동네 시장에서 상태가 좋지 않은 바나나 다발을 사다가 얼려 놓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후식으로 얼린 바나나를 먹으며 미드를 보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탄자니아에 살기 시작한 후 정확히 한 달 만에 응급실에 가게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가본 응급실이었다. 무엇을 잘못 먹은 건지 밤새 복통에 시달렸다. 서러웠던 건지, 무서워서였는지,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같이 일하는 현지 동료인 엘리자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 인도 의사는 박테리아 감염이 원인이라 했고, 그날 난 생전 처음으로 링거를 맞았다. 신기하게도 그때 이후로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다치거나 아팠다. 흉터가 남을 정도로 깊은 상처가 생기거나, 배탈이 심하게 나거나, 피부가 붉게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정말 한 달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찾아온 아픔이었다. 


하지만 그런 물리적 아픔보다 심각했던 것은 마음의 외로움이었다. 혼자 해내야 하는 것들이 주는 무게의 외로움과, 탈 것 없이 내 두 다리만을 이용해서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 답답함, 마음을 활짝 열어도 좁혀질 수 없는 문화적 차이. 주말마다 최대한 여행을 다니려 노력했지만 그것으로도 쉽게 해소가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답답함을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표출하였다. 

탄자니아에서 지낸 지 다섯 달 째, 당시 내 머리는 잔지바(Zanzibar)에서 하고 온 레게머리를 3개월째 방치해놓은 상태였다. 머리카락이 새로 자라면서도 서로 엉킬 수밖에 없어서 굉장히 상태가 안 좋았다. 굵은 레게머리를 한 가닥씩 잡고 문구용 가위로 다 잘라냈다. 당연히 망치겠지 생각하고 벼룩시장에서 비니 3종류를 사 왔었는데, 숏커트가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그 더운 날 비니를 쓰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그 후에 며칠간은 괜찮은가 싶었지만, 근무 시간에 눈물이 불쑥 나올 정도로 심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었다. 응급실로 가는 차에서 날 안고 달래주던 엘리자가 날 학교 울타리 밖으로 이끌었다. 2km 거리의 시장을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만 가봤지 걸어서 간 적은 처음이었다. 엘리자와 언어적으로 의사소통을 나누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끈끈하게 나누었다. 

엘리자가 나를 데려간 곳은 시장 안 쪽에 위치한 동네 펍이었다. 본인은 술을 마시지도 않으면서, 내 방 앞에 차곡차곡 모아둔 빈 맥주병을 보고 나를 펍으로 데려간 것이다. 불은 들어오지 않아도 음악은 빵빵하게 틀어주는 시골 동네 펍, 그곳에서 모기 잔뜩 물려가며 마시는 천 원짜리 맥주. 혼자 먹는 술에 익숙해져 있다가 마음을 써주는 누군가의 옆에서 마시는 술은 다른 주류였다. 우리는 서로 원하는 말을 각자의 언어로 최대한 표현했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두운 가게 속에서 충분히 빛나던 서로의 눈빛이면 충분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오토바이 택시를 하나씩 잡아탔다. 밤하늘은 여전히 까맣고 가까웠다. 그리고 그 밤, 오토바이에 매달려 쳐다본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수많은 별. 하늘도 가까웠고 별들도 가까웠다.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위로도, 의지할 수 있는 문장들도,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며 마시던 맥주도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덜컹거리는 오토바이는 까만 길을 달렸고, 우리의 웃음소리는 별들의 사이를 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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