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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Sep 10. 2021

재난지원금의 쓸모

생산성 대신 시간, 그리고 행복-

엄마도 회사에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 와!


  아이를 어린이집 등원 셔틀버스에 태워 보내고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출근하던 시절, 아이가 나에게 하던 인사이다. "오늘도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 와!"라는 내 인사를 나에게 똑같이 해준 것이다.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아이의 인사를 곱씹어본다. '회사', '친구', '재미' 이 세 단어가 한 문장에 있는 게 다소 부자연스럽다. 오류가 있는 문장은 아니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문장이랄까. 어른이 된 우리 아이들이 이 문장을 들으면 나처럼 피씩 웃게 되겠지. '일의 기쁨과 슬픔'은 어느 직업에나 존재하겠지만 우리 아이들은 나처럼 회사원 말고 자영업이나 창작하는 직업을 가지고 살면 좋겠다. 그것이야말로 내 마음대로 되진 않겠지만.


  밥벌이로서의 직업이 다 그렇듯 매달 받는 월급을 위하여 내가 견뎌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알맹이 없이 늘어지는 회의에서 팀 간의 이기심만 목격하며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일, 무능한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 외의 다른 소용 없을 문서를 만드느라 여러 단어를 고민하는 일, 내가 하는 일의 실제 가치가 퇴색되고 전시 행정으로만 끝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 등등. (회사생활에 대한 글을 쓰면 어김없이 염세주의자의 모습이 나온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월급에는 조직의 발전을 위해 내 시간을 들이는 대가가 들어있다. 내 시간과 맞바꾼 대가이다.


  둘째 아이 출산 후 육아휴직 중인 현재의 나는 시간의 대부분을 '나'와 내 가족을 돌보는 일에 쓰고 있다. 이 중, 특히 스스로 만족스러울 만큼 '나를 돌보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남편이 일을 하지 않아야 가능한 것이었다. (응? 이상한 전개일 수 있지만) 현재 우리 부부는 둘 다 일을 하고 있지 않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남편이 먼저 퇴사를 했고, 나도 뒤이어 휴직을 한 상태이다. 통장의 잔고가 뻔한 상황이지만 남편의 퇴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남편이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슨 심정인지 너무 잘 알겠으니까. 이렇게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남편과의 공동육아 틀 안에서 우리 네 식구의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다. 하루종일 수시로 생각한다. '아,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육아 활동과 집안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하루를 채우고 있다. 물론, 이 두 가지가 나의 가장 큰 일과이지만 그 외의 시간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내게 되니 소진된 에너지가 어느새 충전되어 다른 식구들을 돌보는 일에도 힘이 난다. 육아휴직이 두 번째인 나는 일과 중의 에너지 충전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그래서 산후 보약이나 몸조리 호캉스 대신 매일 혼자만의 시간을 요구했고, 남편은 흔쾌히 기꺼이 그 시간을 확보해주고 있다. 그렇게 밖에서 혼자 마시는 커피가 나에게는 숨을 채워주는 산후 보약이다. 예전부터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던 인물화 드로잉 수업시간은 피로를 비우는 명상 시간이다. 배우고 싶던 것을 시작할 수 있게 되고, 좋아하는 카페를 이렇게나 자주 다니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시간이 생기다니, 아무래도 둘째 딸이 내 인생의 큰 복덩이인가 보다.


  '100억이 있다면 이 일을 계속할 것인가'
  '100억이 있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이 두 질문을 수시로 꺼내 생각해본다. 우리들의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밥벌이는 해야 할 테지만 저 질문의 답에 비추어봤을 때 어느 정도는 비슷한 삶을 꾸려나가고 싶다. 내 시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쓰는 것이 이렇게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이번에 배웠기 때문이다.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너무나 당연한 욕구에 용기를 낼 것이다.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의 나를 빚지지 말고 그냥 오늘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재난지원금을 가지고 아껴뒀던 책들을 구입할 생각에 조금 들뜨는 밤이다.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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