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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울고 말았다.

10일간의 행복했던 꿈



11시간, 우리가 만나기 위해 꼭 지나야 하는 비행시간.



시부모님을 모시러 공항으로 가는 길. 발걸음은 가벼웠고, 햇살은 따뜻했다. 입국장 앞에서 따뜻했던 커피가 식어갈 시간이 지나도 괜찮았다. 그렇게 웃으며 기다렸고, 웃으며 만났다.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동안 쌓여있던 서로의 일상을 나누느라 바빴다. 훅 커져버린 아이들의 키를 이야기하고, 나의 책 발간을 이야기하고, 남편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함께 먹고 싶었던 음식도 만들어 먹었다. 근교로 여행을 떠났고, 양이며 소의 모습에서도 웃음이 퍼졌다.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만 나누던 그곳을 찾아가 눈에 담고, 마음에 담았다.




"집에 김치는 있니?"


해외에 살면 한국 고춧가루, 배추, 무 등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김장을 해도 한국 본연의 맛이 나지 않아 보통은 한국에서 바다 건너온 김치를 사 먹는다. 한국 마트에서 미리 사둔 5kg 김치를 자신 있게 꺼내며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우연찮게도 이번 김치는 달랐다. 봉투를 열자 이미 익을 대로 익은 신 향이 올라오고, 배추가 흐물거렸다. 그 사실을 모르고 사버린 맛없는 김치를 한국에서 오신 부모님이 드셨다.


"볶아서 먹을까요....?"

당황한 내가 제일 먼저 꺼낸 말이었다. 부모님은 괜찮다고 하셨고, 며칠 뒤 최대한의 재료를 구해 우리가 먹을 사랑을 조금 만들어주고 가셨다.




"아버님! 생신 축하드려요!"


13년 전, 결혼식을 올리고 처음으로 맞이한 아버님 생신.

핸드폰에 적힌 요리법을 보고 한 시간 넘게 부엌에 서서 첫 미역국을 끓였다. 깊은 맛은 찾아볼 수 없이 밍밍했고, 참기름이 둥둥 떠있던 그 국을 완성이라며 들고 가 해맑게 전해드렸다. '맛없는 미역국을 받으시고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그 사실을 모르던 그때의 나는 1-2년 정도 더 생신 미역국을 끓여 들고 갔다.

뉴질랜드로 오면서부터는 생신 미역국을 끓여드리지 못했다. 좋아하셨을지 아쉬워하셨을지 궁금하지만 굳이 여쭤보지는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 날 저녁, 부모님께 그동안 못 챙겨드렸던 생신 미역국을 끓여드렸다. 아버님은 웃으시며 첫 미역국보다 맛있다고 하셨다. 해외에 살면서 배운 것은 코인육수를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의 ‘고맙다. 사랑한다.’는 다른 식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식입장에서만 알고, 부모님 마음은 몰랐다. 투덜거리시는 말, 직접 움직이시는 행동이 '고맙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사랑한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몰랐다. 부모가 되고 함께한 이번 만남에서는 부모님 말을 제대로 번역해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더 많은 사랑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나서였을까.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의 얼굴에서, 자세에서, 목소리에서, 표정에서, 소리 없이 흘러가버린 그 모든 시간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파할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지금의 행복에 집중해야 했다. 10일이라는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짧아서 시간의 양보다 밀도를 높여야만 했다.




10일 후 다시 찾은 공항 출국장 앞.


부모님은 "고맙고, 즐거웠다."라며 웃으셨고, 나는 늘 그렇듯 아쉽다는, 보고 싶을 거라는 마음이 담긴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네가 여전히 외롭다는 거야."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외롭다, 힘들다는 말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는데, 언제나 마음을 읽고 말씀하신다.


헤어질 때마다 마음이 흐른다. 아이들을 챙기지 못하고 그렇다고 부모님 뒷모습도 바라보지 못하고, 그렇게 울다가 겨우 발길을 돌린다.


햇살에 눈이 부신 걸까, 눈물을 참으려니 따가운 것일까.

선글라스로 부풀어 오른 눈을 가리고 돌아오는 길. 바다에 비치는 햇살은 우리가 함께한 그날처럼 여전히 예뻤다. 그렇게 한국의 '한 겨울의 꿈', 뉴질랜드의 '한 여름의 꿈'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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