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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오 Apr 29. 2023

오늘, 게이로 살아간다는 것

시작하는 이야기

'동성연애자'나 '호모'보다 '성소수자'라는 말을 더 자주 듣는 세상이 됐다. 동성연애자에서 '연'자가 빠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젊은 세대에겐 직간접적으로 아는 성소수자 한 사람쯤은 있을 만큼 비약적인 변화도 있었다. 성소수자의 총량이 증가했다기 보단, 스스로의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수용하고 발현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변화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그 단초는 수십 년 동안 차가운 시선, 손가락질, 때로는 폭력에 굴하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었다. 


그중 한 사람은 홍석천 씨다. 지난 2000년 대한민국의 공인으로선 처음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냈다. 인기 공중파 시트콤에서 독특한 캐릭터로 주가를 올리던 그의 커밍아웃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준비되지 못한 사회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그는 오랫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 후 20년이 넘게 흘렀다. 석천이 형의 유배 생활도 끝났다. 드라마와 영화엔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한다. 소셜미디어에선 많은 성소수자들이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인기를 모은다. 과연 세상은 얼마나 바뀐 걸까?






대한민국의 국내총생산은 이제 세계 10위권 초반을 다툰다. 경제지표가 모든 것을 투영하지 않지만, 더 이상 가난한 개발도상국이 아님은 확실하다. 국제적 입지도 격상되었다. 시민 의식의 고양도 눈부시다. 오랜 시간 '정서'라는 미명 하에 용인되던 부조리들이 하나둘 퇴출되고 있다. 하지만 성소수자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국가가 주도하는 폭력이나 사형 선고가 없는 것만도 감지덕지 아니냐,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동의할 수 없다. 민주 사회에서 '다름'에 대한 인식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자세는 선진국의 새로운 지표다. 2023년 2월 목록에 합류한 국가 안도라를 포함, 이 글을 쓰는 현재 세계 34개국에서 같은 성별 사이의 결혼이 합법이다. 이 숫자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에선 아직 요원한 이야기로 들린다.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조차 비관적이다. 50년은 걸릴 거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치부하는 사람들도 많다. 매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되는 퀴어문화축제 인근의 풍경을 접한 이들이라면 수긍이 갈 거다. 


  




어렸을 땐 사람들이 왜 게이를 싫어할까 궁금했다. 내 성적 지향을 밝히면 거의 모든 경우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나는 게이야. 웃었다. 그럴 리 만무하므로. 살면서 수많은 게이들을 스쳤을 것이다. 그저 그들이 말을 안 했을 뿐이다. 영국에 와서야 '최초의 게이' 왕관을 벗었다. 궁금증의 답도 풀렸다. '성소수자는 나와 가까운 누구일 수도 있다'는 명제가 안착된 사회에선 다른 개념이 작동한다. 게이인 것이 일말의 허물도,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영국도 예전엔 달랐다. 컴퓨터의 기반을 닦은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Alan Turing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고 쓸쓸히 죽어갔다. 튜링의 자살 후 반세기가 지난 2009년 영국의 고든 브라운 Gordon Brown 총리가 법에 의해 끔찍한 취급을 받은 동성애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 원동력은 거스를 수 없는 의식의 전환이었다. 


대한민국의 게이 커뮤니티가 목소리를 내는 데 미온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단순한 의지박약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라 생각한다. 모두가 인권운동가나 활동가일 수 없다. 시도해도 변하는 건 없다는 무력감, 사회적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은 사회가 만든 것이다. 최근 서울에 몇 달간 머무르며 느꼈다. 분명 예전보다 숨통이 트였는데, 여전히 성소수자들은 남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서울이든 런던이든 먹고, 마시고, 학교에 가고, 출근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연애하고, 아프면 병원에 가고, 불타는 금요일을 즐기는 건 똑같다. 그런데 게이로 살아가는 방식엔 차이가 많다. 


오늘을 사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 남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합법적인 가정을 이루고 그에 합당한 권리를 행사하며 살아간다. 현대 민주 국가에서 이상할 것이 없는 설정이다. 그 '한 사람'을 '한 게이'로 치환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게이라는 사실이 특별할 것도, 불리할 것도 없는 삶은 동화나 픽션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할 수 있는 이야기다. 



(메인 이미지 크레디트: Wikimedia Commons의 Pixoos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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