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사이 쌍코피
2025-09-05
여전히 날이 쾌청하다.
안개가 살짝 드리워지는 것이 날을 무척 잘 만났구나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어제 무인산장 하산길에 만난 외국인들은 등반 중 날씨가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오늘은 3시간여를 걸어 무사히 하산하면 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간단하게 수프를 끓여 아침으로 먹는데 희성이가 쌍코피가 터졌다.
답답해서 코를 풀었을 텐데 한쪽도 아니고 양쪽 코 모두 코피가 나 휴지를 틀어막는 모습을 보고는
너나 할 것 없이 웃는다.
본인도 저렇게 해맑게 웃었다.
다들 한바탕 웃고는 희성이에게 '악사이 쌍코피'라는 별명을 지어 줬다.
얼마나 웃기던지 원정 중 많이 웃었던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희성아.
너의 아픔은 뒷전이라 미안하다만 덕분에 제대로 웃었다.
'악사이 쌍코피'
그 별명 오래 기억하거라.
중량을 줄이기 위해 남은 식량과 약품 등을 라첵 산장, 바크트에게 나눠주고는 라첵산장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이런 곳에 머물렀지.
하나씩 눈에 담아두고는 하산을 시작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천천히 무사함을 기도하며 자주 뒤를 돌아봤다.
다음에는 청맥인 모두 빙하길을 걸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산을 시작한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많은 탐방객들이 올라온다.
이번 주말에는 수십 명이 모여 리첵산장에서 등산학교(?) 강습을 한다더니 그 사람들인가 보다.
운 좋게 우리는 라첵산장을 거의 우리 것 인양 누렸으니 정말이지 때를 잘 만난 원정임이 틀림없다.
큰 사고 없이 하산할 수 있어 그저 고마움의 기도를 드릴 뿐이다.
멀리 하산도 폭풍 속도로 내려가는 형님들, 영길, 희성.
천천히 사진 찍으면서 내려가는 태옥 씨.
덕분에 올라오면서 눈길을 제대로 주지 못했던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며 하산한다.
흙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나타나는 알라아르차 국립공원 입구에서 드디어 전 대원이 함께 모였다.
이게 뭐라고 괜히 반갑다.
그 부근 호텔에서 머물렀던 우치텔봉 대원들과 치료차 홀로 하산했던 진희까지...
진희의 안색이 많이 나아져 있어서 퍽 다행이다.
차를 갈아타고 다 같이 모여 점심 식사를 하러 출발.
여행사에서 미리 예약해 둔 식당에서 샤슬릭(양꼬치)을 먹는다.
모시고 온 모든 여행객들이 다 만족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만한 맛이었다.
그동안 건대 양꼬치 골목에서 먹었던 양고기는 순식간에 모두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 만한 맛이었다.
샤슬릭, 샤슬릭 하더니 고기인데도 너무 맛나네.
몇 개만 집어 먹어도 금세 배가 차는 느낌이다.
이걸 먹으러 다시 키르기스스탄을 갈 수 있을 정도로 맛났다.
무조건 강추!
배를 채우고 비슈케크 호텔에 짐을 풀고는 기념품 가게에서 휘 물건을 산다.
산을 무사히 내려온 기념 저녁 잔치는 한식당으로!
안전한(?) 곳에서 음식을 기다리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간다.
'잘 챙길걸'
'별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짜증이 났을까?'
못나게도 생각나는 대부분 것들이 온통 후회스러운 일들만 떠오른다.
쓰지 않은 여러 묵은 감정들은 이 기록을 통해 날려 보낸다.
다음에는... 다음이 온다면... 좀 더 나아지길 바라며.
이상한 맛에 막걸리 한 모금과 그럴싸하게 흉내 낸(?)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을 비우며 악사이 산군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 짓는다.
숙소에 남아 한참 동안 짐을 싸고는 자정을 훌쩍 넘겨 잠에 든다.
이렇게 무사했으면 된 거다.
그저 무탈한 모든 것에 고마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