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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만 피어있는 9월의 시간

쓰레기 더미에서 꽃이 피긴 했는데

by 악어엄마

몇 주간이나 집을 비웠다가 7월에 돌아와 보니 음식물 쓰레기로 만든 지렁이 분변토 더미에 작은 싹이 돋아나 있었다. 토마토 손질하다가 나온 씨앗들이 퇴비 안에서 자랐었나 보다.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녀석들을 1유로 샵에서 산 안 쓰는 화분에 옮겨 심고 물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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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1주일을 또 집을 비웠다. 갑자기 날씨가 더워졌었는데, 집에 돌아오니 토마토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럭무럭 자랐다. 잎사귀가 풍성했졌고, 작은 열매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도 잘 자라서 덩치 큰 우리 집 아저씨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본의 아니게 토마토 줄기들을 툭툭 건드렸다.


지지대 돈주고 사긴 싫어서 밖에서 긴 나뭇가지를 주워다 꼽아놓고 노끈으로 칭칭 감았는데 줄기들이 도저히 자기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뚝뚝 부러지기 시작했다. 그냥 반 장난으로 키우던 녀석들이 이렇게 자라니 대견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쓰레기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힘차게 자라다니. 어딘가에서 잘 안 풀리던 삶도, 사실은 이렇게 누군가 햇빛 있는 곳에 던져 놔주기만 하면 잘 되는 것인데.


그런데 9월, 가을의 초입에 들어섰는데도 이 토마토 화분에는 빨간색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 열매가 달려 있긴 하는데 그냥 자라다 만 것처럼 보인다. 그냥 노란 꽃만 지천으로 피어 있을 뿐이다. 처음엔 신기했던 이 풍경이, 이제는 왠지 모르게 초조하다.


9월인데. 40대 중반인데. 왜 꽃만 생기고 열매를 맺지 못했나. 아랫잎을 따주어야 하는데 안 해서? 그냥 풍성한 화분이 좋아 보여서, 그대로 놓아 두어서? 아무 노력을 안 했는데도 잘 자라니 더 노력을 하지 않아서? 아마추어가 만든 퇴비에서 정작 필요한 영양소는 빠져있어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뭐 하자고, 나는 굳이 빨간 열매를 보려고 하는 걸까. 널리고 널린 게 슈퍼마켓 토마토인데. 방울토마토 집에 있어도 먹지도 않는데, 괜히 방울토마토 화분에 자아 의탁하고 있는 나는, 열매가 진짜 필요하긴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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