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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여자친구가 한 달만 기다려달라고 했어요

지독하다, 처음 본 남자에게 정말 지독한 오지랖이다

by 시루

느리지만 시간은 성실하게 흐른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벌써 3번째의 달이 되었고, 나는 두 번째로 얼굴을 내비쳤다. 매번 참석하는 멤버가 겹치지 않다 보니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숙성시켜야 이곳의 모든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쌓을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이 모임을 거의 10년 넘게 해왔다고 한다. 그 친구와 나도 10년이 넘어간다.



위스키보다는 와인을 좋아하지만, “올빈(old-vintage, 보통 10년 이상 숙성된 와인)의 맛은 아직 잘 모르겠다. 반면에 위스키는 오래될수록 입과 코, 식도에 닿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나에게 사람 간의 관계는 와인보다는 위스키 같기를 바란다. 숙성될수록 깊고 풍부하며 쉽게 구할 수 없는 가치를 선사해 주기를.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원액이 좋으면 좋은 술도 나쁜 술도 될 수 있지만, 나쁜 원액은 절대 좋은 술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여자친구가 한 달만 기다려달라고 했어요.”



3시간 동안 책에 대한 고찰을 겨우 끝낸 우리는 굶주린 배를 붙잡고 삼겹살 앞에 둘러모였고, 초록색 병이 하나 두 개씩 늘어날 즈음 한 남자가 말을 꺼냈다. 모종의 이유로 둘 사이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남자는 관계의 불안을 시스템으로 극복하려는 듯 결혼을 하고 싶어 했으며, 여자는 한 달 뒤에 관계를 결정하자고 말한 상황이었다. 남자를 오랫동안 봐온 주변 친구들은 전부 그 관계를 뜯어말리기 시작했지만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기다릴 거야. 나는 우리 관계가 좋아질 거라 믿어.”



“마음대로 하세요. 저도 해봐서 아는데 끝까지 가봐야 스스로가 납득하더라고요. 그런데요 오늘 그쪽이 들고 온 책, 에리히프롬의 ‘사랑의 기술’ 아니었어요? 능동적 사랑을 주장하면서, 너무 수동적인 태도로 기다리는 거 아니에요? 왜 관계의 선택권을 상대방에게 전부 줘버리나요.”



지독하다. 처음 본 남자에게 정말 지독한 오지랖이다-라고 다음날 술이 깬 후 혼자 반성했다면 오지랖에 대한 변명이 될까?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서 내 과거의 후회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냥 넘어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내가 너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줘버렸는데‘라는 매몰비용의 오류와,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우리를 비련의 주인공으로 만들 테니까.



하지만 해피엔딩은 주인공이 모든 것을 버리고 불확실성에 과감히 몸을 던졌을 때만 펼쳐졌으며, 상대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한 달이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은 보통 여자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나름의 해피엔딩을 찾기를 바라며. 인생은 길고, 나쁜 술은 숙취가 심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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