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싣고 온 발걸음
피로에 쩌든 고개를 드니, 햇살이 감고 있는 눈꺼풀을 뚫고 눈동자 안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아침의 햇살이 이렇게나 따가우리라고는. 아니, 그 전에 지금이 아침은 맞는 걸까?
분명 몇 초 전에 떠올렸던 것 같다. 지금 눈을 감아 버리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지만 그 우려가 스쳐 가는 찰나, 쉰 것 같지도 않게 태양은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에 방금 전까지 떠올렸던 계획, 어제의 모든 기억들은 망각이란 서랍 속에 들어가 버렸다. 졸음과 피로는 내 몸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실팍하게 뜬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내가 모르는 방 어딘가였다. 시끄럽게 울리는 6시에 맞춘 알람만이, 현실을 주지시켜 주는 열쇠였다.
그래, 이 곳은 강릉이었지. 봉천동이 아니라.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다시 꺼내어 본다. 울릉도로 가기 위해서 이 곳에 왔고, 세 시간도 채 눈붙이지 못한 채 지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또 다시 여섯시간도 넘게 배를 타러 가기 위해서. 배를 타러 간다고 생각하니, 그나마 더위를 예고하는 저 햇살이 고맙게 느껴졌다. 최소한 풍랑으로 배가 뜨지 못할 확률은 없어졌다고 생각했기에.
택시를 달려 도착한 강릉항은 맑았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하늘과 바다 모두 너무나도 맑았다. 바람 한 점 없는 항만 안에는 파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쪽 산맥을 향해서 뻗은 구름들은 바다 위에서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이 곳이 여행의 목적지여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완벽한 날씨였다. 울릉도로 가는 배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멀미로 고생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런 바다라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배가 출발하고, 뱃머리는 어느 샌가 높게 솟아 있는 태양을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보니, 그 전까지 쌓였던 피로가 사악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육지가 아예 배의 뒷쪽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무렵, 다시 죽은 듯이 잠에 들었다. 아무래도 기대감만으로 망망대해의 단조로움을 이겨내기는 좀 힘들었던 듯 하다. 두 시간 가량을 정신없이 잔 다음, 아침에 일어났을 때처럼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잠시 잃어버린 채로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차이점이 있다면, 배 전체에 붙어 있는 차양필터 덕분에 햇빛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는 점. 그리고 자리가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다는 점.
앉은 자리로 접힌 몸을 다시 한 번 기지개로 다림질하고서는, 무엇이라도 눈에 담기 위해서 이물로 나가보려 했다. 하지만 울릉도로 가는 씨스타 5호는 운행중 승객들이 갑판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어디도 문이 열린 곳은 없었고, 차양필터가 덮여 있는 유리창 건너의 바다는 회색으로 보였다. 분명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망망대해의 바닷바람을 느낄 수 없다 생각하니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아쉬운 대로, 배 안이라도 둘러보기로 하였다.
배는 우등석과 일반석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사실 그렇게 뭐가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우등석이 2층에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좌석 자체의 질이 그렇게 극명하게 차이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더 안 좋다고 볼수도 있었다. 1층의 일반석에만 매점이 열려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보아도 무언가 더 낫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배 안에서는 별달리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도가 일지 않아 일직선으로만 보이던 염수의 평원 위에 조그마한 변화가 일어났다. 마치 놀이터 모래밭에서 한 줌씩 모래를 떨어트리면 시나브로 쌓이는 둔덕처럼, 울릉도는 그 모습을 아주 천천히 드러냈다. 너무나도 천천히 변화하는 울릉도의 모습 때문에, 이 배가 꽤나 느리게 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섬 꼭대기를 보기 위해 내려갔던 나의 고개는 점점 치켜 올라갔고, 섬을 한 눈에 담지 못하게 될 정도로 가까이 왔을 무렵에는 아까 보았던 꼭대기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구별이 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울릉도는…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관광지에서 보이는 천편일률적인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관광지를 말하기에 앞서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자연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대부분 기승전결이 있다. 도시의 빌딩숲을 지나 잠깐의 평지를 지나면, 조금씩 높아져 가는 지대 위로 고산준령이 그제서야 눈 앞을 가린다. 하지만 울릉도는 달랐다. 물론 바다 위를 몇 시간이나 달려야 올 수 있는 곳이기에 주변에 시작점이라던가 그런 부분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반칙이다. 해안가에서부터, 아니, 해안가도 없다. 그냥 바다 옆으로 불쑥 산이 솟아나와 있다. 그것도 사람의 손길이 닿아서 민둥산이 된 것이 아닌, 원래부터 그랬던 듯한 나무 하나 없는 바위산까지 포함한 채로.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에 들어오는 사람을 막는 것처럼, 울릉도는 그렇게 돋아 있었다. 산 아래 나무 옆으로 간간이 움직이는 점들이, 저 곳에 도로가 있고 사람이 다닌다는 사실을 간신히 보여주고 있었다.
관광지. 그래. 관광지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도 울릉도는 너무나도 소박했다. 방금 느꼈던 울릉도의 첫인상에서 장님 코끼리 만지듯 넘겨 짚었던 것이 있다. 아마도 이런 경치를 갖고 있는 곳은 그대로 두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항구나 교통이 좋은 곳에서 그런 접객단지가 지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관성에 입각한 예상을. 하지만 우리나라의 관광지라면 으레 보이는 모텔의 방벽은 이 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산과 바다. 그 뿐이었다.
배는 울릉도의 북쪽 해안을 돌아 저동항으로 들어갔다. 저동항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항구들 중 가장 작았다. 포구 안에 들어서자,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마을 전체가 보일 정도로. 극심한 고저차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높은 층수로 건물을 올린 듯 하였지만, 사실은 계단식으로 올리다 보니 그런 모양새가 된 듯했다. 파도를 막기 위한 방파제는 그 어떤 항구보다도 두터웠지만, 2층이 넘는 건물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은, 그런 곳이었다. 관광객을 받는 항구 치고는 너무나도 소박해 보였다.
이번 여행은 그냥 휴식을 하고 싶었다. 독도라는 곳을, 울릉도라는 곳을 늘어진 기분으로 보고 싶었다. 아무 생각없이. 어차피 모두 같은 곳이라 생각했기에, 똑 같은 풍경을 보는 것보다는 낚시를 하거나 등산을 하는 어떤 행위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국내 여행지는 모두 같을 거라는 착각에서 나오는 오만함이었다. 하지만 울릉도의 모습을 채 십분의 일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오만함은 곧 경외감으로 바뀌어 탐욕적으로 주변의 경치를 눈으로 주워섬기기 시작하였다.
배에서 내려 저동항에, 이 곳 울릉도에 발을 딛었다. 우리나라의 전혀 새로운 면을 보게 된 충격으로 새로운 눈을 뜨게 된, 지금부터가 울릉도 여행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