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싣고 온 발걸음
눈을 뜨니, 태양은 이미 성인봉자락 등성이를 오르고 있었다. 8시인데도. 그나마 빠르게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한낮같이 내리쬐는 햇살에 내가 늦었나 하는 착각이 든다. 이 곳의 태양은 아무래도 그 활동이 좀 빠릿빠릿한 듯 하다. 수평선에서 시작하여 수평선으로 끝나는, 줄일 수 없는 긴 여정에 괜히 그 발을 서두르는 것일지도.
오늘의 일정은 이러했다. 울릉도를 한 바퀴 돈다. 이것은 첫 번째 목표가 길의 마지막에 위치해 있는 관음도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리고 관음도를 보고 나서 들렀던 곳 중 좋았던 해변가를 골라, 그 곳에서 물놀이를 즐기고서는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것까지.
울릉도를 한 바퀴 도는 것은 약 50km 정도라고 하였다. 하루를 꼬박 쓰기에는 그렇게 긴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엔가 멈춰서 구경을 하다 보면 시간을 좀 많이 잡아먹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버스로 다닐 계획을 포기하고 렌트카를 선택했다. 초행길이고, 어제 보았던 것처럼 길도 많이 험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었다. 같은 루트로 시간에 맞춰 다니는 버스로는 울릉도의 모습을 모두 담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눈 앞에 나타난 해안도로의 모습은,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울릉도는 바다에서 그대로 산이 솟아 나온듯한 지형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전한 곳에 도로를 깔아둘 수 없었다. 그래서 도저히 도로를 만들 수 없는 곳에, 시멘트로 토대를 굳혀 간신히 차들이 다닐 길을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뚝 떨어지는 절벽 아래로 간신히 차 한 두대 지나갈 정도의 조막만한 길이 나 있고, 그 옆으로 별다른 전조 없이 바로 바다가 시작된다.
한 쪽에는 바다, 한 쪽에는 산이 눈에 들어왔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수직으로 뻗은 웅장한 산자락 아래 바로 수평선이 떨어져 있었다. 동해나 남해에도 비슷한 지형을 가진 포인트는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울릉도에서는 이런 광경이 죽 이어지는 것이다. 길의 끝까지.
무엇보다 바다의 모습을 볼 때 끝없이 경탄이 새어 나왔다. 암초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과하지 않게 섬 주위를 장식하고 있었고, TV 여행 프로그램에서나 보던 바닥이 보일 정도로 깨끗한 바닷물이 그 옆을 수놓고 있었다. 파도 하나 없는 날씨였기에, 포말에 가린 것 없이 바다는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 보였다. 오래된 소설 제목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푸르른 길의 끝에는 관음도가 있었다.
관음도는 울릉도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울릉도 길의 반대편 끝에 위치해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안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콘크리트 건물이 있다. 입장료를 내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관음도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 단순한 7층 높이의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건물처럼 설치해 둔 것이다. 너무 진입로가 가파르고 높아서, 일반적인 등산로식 계단으로는 만들기가 힘들었을 것 같기는 해 보였다.
섬에 들어가는 길은 현수교로 이어져 있었다. 멀리서 볼때는 흔들다리같았는데, 막상 올라와 보니 꽤나 튼튼한 모양새였다. 그래도 울릉도가 풍랑이 잦다던데 이 정도면 버틸만 한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왜 멀리서 보았을 때 이 큰 다리가 그렇게 조그맣게 보였는지, 다리를 건너 관음도에 발을 디디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현수교는 ‘섬의 크기에 비해서’ 작았던 것이다. 교각이 설치된 위치 자체도 꽤나 높았는데, 건너고 나서 한참은 더 계단을 타야 했다.
관음도는 바깥과 안쪽의 모습이 상이한 섬이다. 밖에서 볼때는 단순히 높다란 바위 위에 나무만이 빼곡히 자라 있는 듯한 모양새이지만, 정작 올라 보면 평야가 있다. 물론 고저차는 좀 있지만, 그 위에는 흙이 있고 풀밭이 존재했다. 그리고, 평화로웠다. 콘크리트가 무성한 여타 관광지와는 달랐다. 위험한 곳만 나무로 방책을 세워 두었고, 인공적인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섬을 한 바퀴 둘러보는 산책로를 온전히 즐길 수 있게 해 둔 노력이 보였다. 동백나무가 무성했고,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식생들이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어제 내수전에서 보았던 풍경과는 정 반대여서 좋았다. 어제는 울릉도 안에서 바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면, 이 곳에서는 울릉도의 북쪽 얼굴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 곳에서 섬바디라는 꽃을 보았다. 울릉도에서만 나는 희귀종 식물인데, 한 가지가지마다 민들레 홀씨마냥 무리지은, 양산 모양의 꽃무리를 틔우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색깔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다. 질박하지만,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 이 꽃 하나에 울릉도의 모습이 담겨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