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든 말에 주석을 달고 싶다 본문보다 주석이 긴 책을 쓰고 싶다 단 한 문장을 쓰고 주석을 달고, 주석에도 주석을 달고, 그런 방식으로 영원히 이어지는 책
그러나 그것이 세계라서 나는 굳이 책을 쓸 필요가 없었고 다만 살면서 너의 책을 읽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렇지만 나는 너에 대해서 라면 쓰고 싶지
초록이라고 말하면
나는 풀을 먼저 떠올리고
너는 비상구를 먼저 떠올린다
너는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를 싫어하지만 대부분의 시를 사랑시로 분류한다
소설과 에세이를 평등하게 대하며
에세이를 써달라고 하면 소설을 쓰고 소설을 써달라고 하면 에세이를 쓴다
토마토를 좋아한다
너는 너의 소중한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동시에 너의 소중한 것을 누군가 훔쳐 가길 바라지
내가 훔쳐 가고 싶다
사람이 북적한 대형 마트에 가면 뭔갈 홈쳐 가도 모를 것 같다 예컨대
토마토를 주머니에 슬쩍 넣고 나가면 어떨까
매대에는 내가 모르는 토마토들이 종류별로 분류되어 있고 나는 너에게 줄 것도 아닌데 너를 생각하며 토마토를 샀다
토마토의 초록 꼭지를 떼며 풀이 아니라 비상구를 떠올렸다
[출처] 미래의 손 봄날의 책 2024.05.31.
시식평>
2023년 첫 시집 발간을 앞두고 사망. 사인은 비공개되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누구나 그럴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누군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녀의 시집을 읽다가 끼니를 거를 수 없어 거리를 걷는다. 마치 메뉴판의 음식을 고르듯이 길가의 간판들을 들여다본다. 음식들은 모두 입관해 있는 상태여서 모양을 볼 수 없었다. 고작 꼬마 김밥 하나를 사 가지고 왔다. 단무지와 시금치 밥알이 서로를 밀어내며 김 안에 휩싸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제 유고 시집은 너무 낯익은 것이어서 살아서 써냈을 참기름처럼 윤기 나는 행간을 맛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했다
이런 속 재료로 이런 맛을 낼 수 있는 건 가능한 일이었을까.
단출한 속재료로 위안을 받고 나면 한동안 다른 것은 좀처럼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