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장 부드러운 중심.

정확히 닿을 수 없어 회귀하는 욕망.

by 적적




실크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고 있었다. 풀리며 드러내는 살갗이 느리게 갈라지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비밀문서를 풀어내고 있었다 모든 단추가 사라지고 나서야 남자는 물끄러미 여자를 바라보았다.


드러난 젖무덤이 느린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등 쪽으로 손을 천천히 뻗은 남자의 손이 자연스럽게 브라를 풀어내자 여자의 가슴이 흐린 어둠 속에 드러났다. 푸른 실핏줄이 드러날 만큼 희고 새벽녘의 풍경 같은 유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입안 가득 머금은 유방은 미세하게 부풀어 오르며 느리게 단단해져 가는 유두가.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중심을 향해 자라지만, 중심은 언제나 가장 바깥에 있다. 몸의 중심이라 불러야 할 곳은 해부학적 중점이 아니라, 감각이 모이는 곳이다. 유선의 끝, 유륜이 맺은 유두는 그 감각의 응결점이다. 거기서 생은 시작되고, 관계는 이어진다. 누군가의 입술이 닿고, 또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시작된다. 그곳은 생의 문이면서 동시에 생의 흔적이다.



유두는 태생적으로 분리의 상처를 기억한다. 태아가 자궁을 떠난 뒤 처음으로 마주하는 타인의 살결, 그것이 바로 유두다. 그 부드럽고 단단한 돌출은 생의 최초의 연결선이며, 동시에 독립의 신호다. 인간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타인의 온도를 배운다. 어머니의 체온은 그곳을 통해 피처럼 흘러들어 가고, 아기의 입술은 그 체온을 기억한다. 언어가 생기기 전의 언어, 생각 이전의 생각이 그곳을 통과한다.



그 이후의 시간들은 모두 그 최초의 감각을 되찾기 위한 여정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음악 속에서, 누군가는 타인의 어깨에서, 또 누군가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 속에서 그 최초의 감각을 모방한다. 하지만 아무리 비슷해 보여도 그것은 언제나 복제에 불과하다. 진짜 유두의 감각은 단 한 번만 허락된다. 그 이후의 모든 감각은 기억의 잔향처럼, 희미하게 번져나갈 뿐이다.



유두는 단순한 생리적 기관이 아니다. 그것은 몸이 타인의 몸을 상상하는 지점이자,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장소다. 그곳은 닫혀 있지만, 동시에 열려 있다. 피가 돌고, 신경이 모이며, 감정이 스며든다. 유륜은 그 경계를 보호하기 위해 그려진 원형의 그림자다. 인간의 몸은 이상할 만큼 원형을 그린다. 동공, 입술, 배꼽, 그리고 유륜. 원은 언제나 닫히지 않은 완성이다. 거기에는 중심을 향한 회귀와 동시에 바깥으로의 확장이 공존한다.



어쩌면 인간의 욕망이란 이 원형의 질서를 반복하려는 시도일지 모른다. 완벽히 닫힌 관계, 서로의 온도가 완벽히 맞닿은 상태, 생의 외로움이 잠시 멈추는 순간. 그러나 그 원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 있다. 유륜의 색이 사람마다 다르듯, 감각의 중심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한 사람의 손길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완벽히 대체할 수 없듯, 모든 관계는 서로 다른 온도의 차이로 구성된다.



유선은 몸속 깊이 퍼져나가며 생의 길을 그린다. 그 길은 단지 젖을 생산하기 위한 도관이 아니라, 감정이 피처럼 순환하는 통로처럼 보인다. 기쁨이거나 슬픔이거나, 사랑이거나 그리움이거나, 모든 감정은 결국 몸의 어느 한 지점에서 시작된다. 감정은 추상적인 단어처럼 들리지만, 실은 극도로 물리적인 현상이다. 심장이 빨라지고, 숨이 막히고, 피부가 열을 띤다. 감정은 살 속에서 피어나는 생리학이다. 유선의 끝이 떨릴 때, 그것은 감정의 가장 오래된 언어가 된다.



사랑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종종 입술을 떠올리지만, 사실 사랑의 기억은 더 깊은 곳에 있다. 유두는 입술보다 먼저 기억된 감각이다. 생의 초입에서 그것은 굶주림과 안도를 동시에 배운다. 입술은 그 기억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입맞춤은 단순한 욕망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더듬는 일이다. 타인의 피부에 닿는 순간, 그 오래된 유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 감각의 중심은 언제나 외롭다. 너무 많은 기억이 거기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면 유두는 기능을 잃는다. 젖이 말라가고, 신경의 흐름은 줄어든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남는 것은 공허가 아니라 형상이다. 마치 오래된 호수의 수면 아래 고요히 가라앉은 돌처럼, 한때의 흔적이 침묵 속에 남는다.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묵음의 형태로 변한다.



유두의 외로움은 존재의 외로움과 닮았다. 그것은 주기적으로 맥박 치지만, 결코 자신을 외부로 던질 수 없다. 몸속 깊이 뿌리내린 유선들이 세계와의 연결을 시도하지만, 끝내 몸의 표면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끝이 바로 유두다. 모든 연결의 종점, 모든 감각의 문턱. 거기서 세계는 닫히고, 자신은 완성된다.



유륜의 원은 어쩌면 상처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살갗은 늘 상처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색을 남긴다. 유륜의 색은 혈류와 온도의 기록이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회상의 색이다. 존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겨둔 경계선. 그 경계 안쪽에서만 감각은 안전하게 작동한다.



인간의 몸은 유두를 중심으로 수많은 은유를 만들어왔다. 젖은 어머니의 상징이었고, 어머니는 생의 대리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생명 공급의 기관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그리 정직하지 않다. 유두는 존재가 타인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는 단지 생존을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원형, ‘너와 나’의 최초의 형태를 경험하는 일이다. 이후의 모든 관계는 이 첫 관계의 변주다. 누군가를 갈망하고, 손끝으로 닿고, 다시 떨어지는 모든 감정의 패턴은 거기서 비롯된다.



이 원형적 관계는 결코 대칭적이지 않다. 주는 자와 받는 자, 품는 자와 의지하는 자 사이의 균형은 깨져 있다. 그러나 그 비대칭이 바로 사랑의 구조다. 유선은 일방적으로 흘러가지만, 감각은 쌍방으로 순환한다. 생명은 그렇게 불균형 속에서 유지된다. 완벽한 평형은 죽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유두는 생과 욕망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이다. 그것은 결코 노골적인 기관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최초의 시(詩)다. 촉각과 감정이 한 점으로 압축된 언어, 말로 옮길 수 없는 감각의 형태. 인간은 그것을 평생 잊지 못한다. 잊었다고 믿는 순간에도, 어떤 손끝의 떨림 속에서 그것은 부활한다.



밤의 정적 속에서, 피부에 닿은 공기조차 미묘하게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생이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는 증거다. 유두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더 이상 젖을 생산하지 않아도, 그것은 여전히 감각의 문으로 기능한다. 그것을 통해 인간은 세계를 느끼고, 세계로부터 상처받는다.



이 작은 돌출은 인간의 진화를 비웃듯 단단히 제자리에 남아 있다. 문명은 그것을 은폐하고 장식하며, 때로는 부끄러움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유두는 그런 의미를 모른다. 그것은 단지 몸의 진실한 형태로 존재한다. 생명은 언제나 부끄러움과 함께 시작된다.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감각의 기원이며, 사랑의 흔적이다.



어쩌면 유두는 기억의 마지막 잔재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체온, 첫 숨의 떨림, 타인의 피부가 주는 낯선 안도. 그 모든 것이 그 작은 원의 중심에 농축되어 있다. 인간은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쓴다. 옷으로 가리고, 단어로 숨기고, 예술로 치환한다. 그러나 결국 돌아가는 곳은 하나다. 유선의 끝, 유륜이 맺은 그 작은 점. 거기서 생은 다시 시작되고, 감각은 다시 열린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결국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퇴행이 아니라 회귀다. 처음으로 타인의 온도를 배운 곳, 세상의 냄새를 맡은 곳, 생이 자신을 깨달은 곳. 유두는 그것을 잊지 않는다. 몸은 언어보다 오래된 기억을 간직한 도서관이다. 그 기억의 표지에 새겨진 원형의 문양, 그것이 유륜이다. 그리고 그 중심.



유선은 생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조용한 증거다.


사진 출처> pinterest

keyword
이전 06화서리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