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렇다고...
새벽의 골목은 아직 잠든 채였다. 전날 내린 비가 벽돌 틈에 남긴 어둑한 냉기가 공기 속을 천천히 흘렀다. 가로등 아래 투명하게 굳은 물웅덩이는 조용한 거울처럼 건물의 창틀과 전선의 그림자를 비추고, 그 위로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초콜릿 껍질 하나가 바람에 밀려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시의 폐 속에서 아직 토해지지 않은 숨들이 웅크리고 있을 때, 세계는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지나간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니 사실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난 것처럼. 그냥 그렇다고, 그 모든 조용한 무게는 스스로를 증명한다.
지하철역으로 향해가는 발걸음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미끄러졌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문지르고, 누군가 눈을 감은 채 빈 공간을 응시한다. 아침 냄새가 있는가 생각하면, 그건 빵집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반죽 냄새와 철제 손잡이에 남아 있는 손기름, 누군가 조금 늦은 출근길에 급히 마시고 온 캔커피의 미세한 단내가 뒤섞인 것. 서로가 누구인지 모르는 얼굴들이 서로의 체온에 스치며, 아무 감정도 남기지 않고 나아간다. 누군가의 하루가 시작되고, 누군가의 포기 또한 같은 시각에 조용히 결심된다. 하지만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다. 왜냐고? 그냥 그렇다고, 세계는 이유보다 관성으로 굴러가는 순간이 더 많다.
카페 유리창 너머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가 비늘처럼 미세하게 흩어졌다. 바리스타의 손목에서 한 번씩 빛나는 작은 문신은 마치 기억의 조각 같다. 사람들은 커피 한 잔 위에 서로 다른 이유를 얹는다. 어떤 이는 잠을 쫓기 위해, 어떤 이는 잠시 멈추기 위해, 그리고 어떤 이는 외로움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위해. 종이컵에 뜨거운 라떼가 채워지며 생기는 가벼운 진동, 그리고 뚜껑을 닫을 때 나는 둔탁한 소리. 이 모든 디테일이 하루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중요하지 않은 행동들이 반복되며 기어이 의미가 된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냥 그렇다고, 의미란 그런 방식으로 자란다.
오래된 책장에는 누군가 손가락으로 넘긴 페이지의 끝자락이 약간 눌려 있었다. 종이 냄새에는 먼지와 햇살이 섞여 있었다. 책 속 문장들은 때로 현실보다 더 느리게 움직인다.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상실, 누군가의 깨달음, 그리고 누군가의 무너짐이 종이 속에서 천천히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책을 덮는 순간, 모든 감정은 다시 여기에 남는다. 현실은 속도가 빠르고, 감정은 어쩌면 그 속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때때로 멈춰야만 했다.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그렇다고, 멈춤도 삶의 한 문장이다.
오후의 햇빛이 건물 벽에 기울어지며 노란 결을 남겼다. 골목 끝에서 개 한 마리가 하품을 했고, 지나가던 트럭의 배기음이 잠시 공기를 흔들었다. 잊혀진 포스터가 벽에서 반쯤 떨어져 나간 채 흔들리고, 화분 속 흙은 약간 말라 있었다. 누군가는 작은 창문을 열어놓고 오래된 라디오 드라마를 들었다. 아무도 특별하지 않은 하루가 그렇게 축적되고 있었다. 삶은 대체로 작은 반복들의 집합이고, 그 반복 속에서 극적인 순간은 희귀한 광물처럼 아주 조금씩만 나타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날은 그런 광물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지나간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냥 그렇다고, 평범함은 결핍이 아니라 한 종류의 여백이다.
해가 지고, 거리의 불빛이 켜지면, 도시의 심장은 다시 다른 박동을 얻는다. 술집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웃음과 음악, 공중에 부유하는 담배 냄새, 자리를 잃은 장바구니 속 대파가 고요하게 얼굴을 내밀고, 전기자전거의 브레이크 소리가 밤을 조금씩 긁는다. 누군가 울고, 누군가 웃는다. 감정은 서로 닿지 않은 채 존재하면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허공을 공유한다. 모든 감정이 이해될 필요는 없고, 모든 외침이 들려야만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고, 감정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날씨 같은 것이다.
밤이 깊어지면 가로등 아래의 그림자마저 조금씩 길을 잃는다. 도시가 조용히 뒤척이는 동안, 이름 없는 불빛들이 천천히 저물고 다시 살아난다. 모든 순간은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고, 누군가에게는 결정적인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구분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세계는 묵묵히 말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흘러간다고. 애써 붙잡지 않아도, 애써 잊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된다.
그저 흘러가고, 남고, 사라지고, 다시 온다.
그냥 그렇다고.
그것이 세계의 방식이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