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홀에서의 첫 숙소는(0.5박 제외) 노스젠 빌라였다. 여행기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굳이 숙소에 대한 부분을 따로 빼내어 쓸 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싶었지만, 이 숙소에 다시 오고 싶어 다음의 보홀을 기약하게 되었으니 노스젠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쯤 해 볼까 한다.
일주일을 계획했던 여행이 갑자기 2주의 여행이 되면서 여행경비가 늘 수밖에 없었다. 줄일 수 있는 것은 숙박과 식비였기에 숙박은 무조건 가성비로 가야 했지만 '생각보단'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가성비 숙소 몇 군데를 검색하여 후기를 살펴보면서 벌레가 나와서, 지저분해서, 너무 습해서, 중심지에서 멀어서, 두 달 전인데도 이미 예약이 끝나서, 등등의 이유 여기저기가 제외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선택지가 점점 좁아져 내 기준에선 가성비라고 하기엔 조금 갸웃거려지는 곳들만 남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고르고 골라 예약했던 곳이 바로 노스젠이다. 노스젠은 중심가(알로나비치)에서 제법 떨어져 있다. 알로나 비치에서 노스젠으로 가자고 하면 200~250페소(알로나비치 근처는 보통 100페소) 정도를 요구하는 거리인데 다소 외진 곳이라 처음엔 조금 망설였지만 주변에 상점과 식당이 없다는 것 빼곤 모든 것이 아주 좋았던 숙소였다. 남편은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무조건 노스젠에 올 거라며 그땐 꼭 오토바이를 빌려서 타고 다닐 거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말은 그 '다음'이 좀 더 구체화되었을 때 해야 소용이 있을 듯하여 일단은 그러라 했다.
노스젠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선셋 명소로 유명한 대나무 길이 숙소 안에 있어서였다. 노스젠 뒷마당엔 맹그로브 숲에서 바다로까지 이어지는 대나무 길이 있는데 당연히 투숙객에겐 입장이 무료다. 게다가 체크인을 할 때 두말루안 비치에 위치한 사우스팜(이름이 바뀌어 현재는 '오셔니카'이다)의 데이유즈권도 주었기에 노스젠에 묶으면 선셋투어 공짜, 두말루안 비치 입장도 공짜였다. 나이스 가성비!! (아무래도 나는 본전충이 맞나 보다. 작년 보라카이 여행기를 쓰면서 '행복을 찾아서'라는 제목을 쓰긴 했지만, 실은 '본전을 찾아서'라는 제목을 쓰고 싶었다고 고백했던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본전과 가성비를 찾아 헤맸다. ㅠㅠ)
체크인을 하자마자 짐을 정리한 후 노을을 보러 나가자며 가족들을 보챘다. 그 길은 꽤나 명소라서 투숙객이 아니라도 데이유즈권을 구입하여 많이들 온다고 들었다.
"얼른 가 보자고. 좋은 자리 차지하려면 빨리 가야 한대. 해가 지기 전에 가야한다고오오오오~~!!"
남편은 이미 침대 위에 뻗어 있었고 아들은 와이파이 비번을 입력한 후 유튜브가 잘 나오는 걸 확인하고선 곧장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기에 노을을 보러 나가자는 내 말을 제법 귀찮아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미 수십 개의 후기와 사진을 보며 그곳에서의 노을이 얼마나 근사한지, 일몰뿐 아니라 일출까지도 멋진 곳이라는 말에 설렘이 가득해 있었지만 남편과 아들에겐 그저 '엄마가(남편한테도 나는 그냥 엄마다) 보채는 곳, 빨리 안 움직이면 화내는 곳'이었기에 엉덩이를 움직이기가 더욱 머뭇거려지는 듯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어차피 내가 짠 여정이었으니 나와 같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지 않다 해서 마음 상해할 필요 없이 그들의 표정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그저 끌고 나가면 되는 거였는데, 시큰둥해하고 피곤해하는 표정에 살짝 마음이 상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때가 이번 여행의 1차 빡침이었나 보다. (2주 동안 아들 둘때문에 자주 빡친단 소리)
어이, 44세, 죽으면 어차피 내내 잘 건데 당장 침대에서 못 일어나?
야이...(이하 생략) 11세, 이 노을을 앞에 두고 유튜브 같은 걸 왜 보니?
......라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론 꺼내지 못했지만 앞뒤통수 가득 담아내었더니 아들 둘의 엉덩이가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나무 길(뱀부워크라고 부르는 듯?) 저 너머에선 해가 지고 있었고 그 방향을 향해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다. 구름이 많은 하늘이었지만 저쪽 하늘의 틈새에서 오렌지 빛이 새어 나오길래 이 정도 구름이라면 어쩌면 붉게 타오르듯 번지겠는데? 생각했다.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멍하니 조용하게 바라보고 싶었으나 마땅히 기대어 앉을 곳이 없었다. 양 옆으로 중국의 단체 관광객이 있었던 것인지 변화무쌍한 높낮이의 말들을 쏟아내며 꽤나 소란스러웠다.
내가 기대했던 오렌지빛 여유로움에서 멀어진 탓은 그저 그곳이 명소라 그러했던 것인데, 좀 더 서두르지 못했던 가족들, 특히 유튜브를 봐야 하는데 왜 자기까지 데리고 나오냐며 아직도 입이 잔뜩 튀어나온 채 다시 숙소로 가자고 조르는 아들에게, 그 원망의 화살이 날아가려 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활이 날아간 듯했다. 아들이 아빠에게 "엄마, 왜 화났어?"라고 내 귀에 다 들리게 귓속말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키를 훌쩍 넘는 촬영장비까지 꺼내 들고선 영상을 찍으며 까르르거리느라 야단법석인 주변 사람도, 이렇게까지 붐비고 있는 인파도, 모두 내가 보았던 후기엔 없었다. 노을이 아닌 내 눈치만 보는 아들들 또한 내 기대 속엔 없었다.
아주 쿨한 말투로 "너네 먼저 숙소 가 있어. 나는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좀 더 보고 갈게."라고 했더니 전혀 쿨하지 않음을 감지했는지 아들 두 녀석은 도망치듯 숙소로 가버렸고 나는 홀로 남아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내려앉는 어둠과 붉어지고 있는 노을을 바라보게 되었다.
지는 해가 남긴 여운이 어둠과 섞여들며 변해가는 하늘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그 아래 혼자 남겨진 나는 조금 외로웠다. 그냥 같이 보자고 할걸.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저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해도, 그냥 엄마랑 같이 좀 보자며 부탁해 볼 걸. 아스라 지며 사라져 가는 그 붉은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주변의 소란스러움과 웃음소리가 문득 나의 예민함과 외로움으로 치환되고 있어서, 모든 것들이 까만 어둠 속으로 잠길 때까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내내 후회했다.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온전한 외로움을 견뎌내기엔 여전히 나약하며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 돼버렸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도 내 아들들은 여전히 하나는 침대에만 붙어 있으려 했고 또 하나는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궁금해하며 유튜브만 보려 하여, 너네랑 다시는 같이 여행 안 온다며 몇 차례 악다구니를 쏟아내었지만 그러는 순간에도, 바로 지금도, 여전히, 혼자 그곳에 갈 생각은 없다. 특히, 노스젠의 대나무길만큼은 절대 혼자 가지 않을 테다. 어차피 여행 또한 생활의 일부인 것이고, '뭐 이런 데가 다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곳의 석양은 몽환적인 아득함이 가득했으니, 꾸역꾸역 싸워가면서라도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다.
노스젠은 야자수가 가득한 예쁜 정원 한가운데에 수영장이 있고 그 주변을 빌라형 숙소 20채 정도가 둘러싸고 있는 자그마한 숙소이다. 규모가 작은 만큼 로비나 수영장, 식당 등과의 동선이 짧아 여유로웠다. 조용하고 한적해서 '아, 내가 휴양지에 왔구나'를 느끼며 유유자적 쉬기에 좋았다.
숙소를 옮길 때마다 밤수영을 했던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는데 유난히 노스젠에서의 밤수영이 기억에 남는다. 한낮의 태양에 데워진 것인지, 온수를 살짝 틀어놓은 것인지 물 온도는 적당히 따뜻하여 포근한 느낌이었다. 물 위에 누워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나무를 바라보다 가끔은 그 너머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뒤에선 아들과 남편이 물장구를 치며 웃고 있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렇게 한참 동안 그 소리를 들으며 둥둥 떠 있으려니 어쩌면 지금이 살아가면서 드물게 만날 수 있는 꽤나 낭만적인 순간이겠구나, 싶었다. 한참을 더 그렇게 물 위에 떠 있다가 몸을 뒤집어 남편과 아들에게로 헤엄쳐갔는데 문득 이 순간이 앞으로의 나에게 언젠가 한 번쯤은 손을 내밀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틀림없이 이 순간의 힘으로 다시금 헤엄쳐 나가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물살을 가로질렀다. 아주 많이 행복했던 밤수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