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친구 죠의 집에 초대받았는데 , 주의 사항이 고양이가 한 마리 있을 거라고 했다.
현재 자신의 집에서 소니야네 고양이를 데려와 대신 돌봐주는 중이고 내가 알레르기가 있는 것을 알아서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 잠깐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와서 맛있는 저녁을 먹자고 했다.
알레르기가 워낙 심한 나는 그의 집에 가기 전에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알레르기 알약 하나를 입에 툭 털어 넣었다.
그리고 그 약을 먹을 때마다 나는 웃음이 난다. 이렇게 작은 덩어리 하나가, 나의 이 커다란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제어하고 편하게 도와준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고양이 있는 집에 가는 것을 무서워한다. 무섭다는 의미가 심난하다는 뜻으로 무서운 기분을 말할 것이다.
알레르기는 둘째치고 실은 위생을 생각하게 된다. 온 집안에 소파에 어딜 가나 날아다닐 털과 그 고양이가 올라갔을 자리, 그가 밟았을 바닥과 침구 위. 최악은 화장실도 왔다 갔다 했을 테고 그 화장실을 딛었던 발로 또다시 집 어딘가를 올라갔겠지. 그리고 나는 그런 곳 어딘가에 앉아야 하겠지. 그리고 그를 잠깐 만진 손으로 친구가 요리를 할 수도 있는 것이고 혹시 가벼운 털이 날아다니다가 요리 어딘가에 들어가진 않았을까?
나는 어릴 때 강박이 있었다. 사실 강박이라는 단어로 말하게 된 것도 어른이 되고 내가 지내온 이 방식이 하나의 강박에 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어쩌면 심리적 공황상태가 부르는 병적인 행동들이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정의할 단어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아닌 타인, 특히 낯선 이들의 발자취를 극도록 거부했다. 말하자면, 나는 다른 사람의 집에 가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싫어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어릴 적의 내가 느꼈던 강박에서 나온 공포심 같은 게 뒤섞여 있기에, 극도록 싫어했다고 표현을 해야 만이 맞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집이 아닌 다른 가족, 친구네 집을 가면 항상 가시방석이었다. 나는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많은 시간을 서서 보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신발 없이 발을 디디고 서있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어딘가를 만지지도 못하고 얼음처럼 있었다. 남의 집 화장실에 가는 건 고역 아니 고문이었다. 그리고 바닥에서 신나게 뒹굴고,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다른 친구나 사촌들을 보면서 그들이 너무 신기하고 부러웠다.
어떻게 저들은 저렇게나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나는 왜 그들과는 다를까? 의 의문이 줄곧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그리고 왜 이렇게, 이런 상태로 태어난 걸까라는 생각이 결국에는 나는 왜 태어났을까 로 자주 이어졌다.
그 어린 나조차도 지금과 다르지 않게 예민하고 또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는 아이였다.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건 내가 불편한 티를 내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라서 그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착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불편을 말해서 상대방이 신경을 써야 하거나 상대가 나를 챙겨주느라 번거로워지느니 내가 말을 안 하고 참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더 용납되는 편이었다. 그래서 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아마 나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에서는 무언가가 불편함이 계속 느껴졌을 것이다. 어린 나는 항상 완벽하게 잘 감췄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어른들은 혹시 뭐가 필요하냐는 둥 이제 좀 편하게 앉아있으라는 둥 내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이 터질 것처럼 불안했다. 그래서 서있는 게 편해서 그렇다라던지 허리가 조금 뻐근해서 그렇다는 둥으로 둘러댔다.
그렇게 내 진심이 걸리지(?) 않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가장 행복하고 해방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랬다. 항상 내가 딛고 만져야 하는 어딘가가 어떤 일이 있었을까라는 상상을 하는데 늘 조금 위생적인 부분으로 연결시켜 시작되는 걱정이었고, 상상력이 풍부한 탓이라고 하기에는 단순한 우려와 걱정이 아닌 나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 정도로 심각하게 힘이 들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그 이상했던 어린 시절의 행동이 강박증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걸 알고서 오히려 안도가 되었다. 병의 증상으로 분류된 그 단어가 내가 유별나고 이상한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어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유별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말의 정의는 [여느 것과 아주 다르다. 별나다. 특별나다.]이다. 그리고 특별하다와 특별나다는 확연히 다르다. 엄마가 나에게 자주 쓰던 이 말은 참 까다롭고 보통 사람들이 하는 반응들을 내겐 찾을 수 없고 뭔가 정상 범위에 들지 않는 느낌, 그리고 나의 태도가 엄마를 지치게 한다는 의미로 유별나다는 말이 내게 자주 쓰였다.
강박증이라는 명확한 병명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병이라고 정의된 것은 그래도 웬만하면 고칠 가능성이라도 있잖아. 극도로 예민하고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이 여기저기서 드는 이런 내가 미치광이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조금 아픈 증세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이 유별난 병은 감사히도 프랑스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치유가 많이 되었다. 유럽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지켜보니 위생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본상식과는 정말 많이 달랐다. 한국에서는 절대 용납도 안될 상황들이 참 많다. 여기는 생각보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또는 하고 난 후에 손을 반복적으로 씻는다거나 하는 일이 적고 음식이나 무언가를 손으로 직접 만지는 것에 대해 민감도와 우려가 한국과는 달랐다.
내가 겪어본 바로는 확실히 한국사람들과 유럽인들은 위생 개념이 같지 않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자면 프랑스에서는 레스토랑에 가면 모든 식기류를 테이블 위에 미리 세팅해 놓는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불편했다. 나의 상상의 나래는 계속 이어졌다. 그들이 그 식기류를 언제부터 저 위에 꺼내 놓았을까, 그 식기류를 놓은 사람의 손은 과연 깨끗했을까,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하진 않았을까 포크의 입 닫는 부분을 손으로 만지지는 않았을까, 이 공간에 먼지가 얼마나 많은데 그 먼지들이 나의 식기류 위로 쌓였겠지.. 와 같은 우려를 하면서 쩔쩔맸는데, 결론적으로는 그것을 항상 티 내지 못하고 늘 그랬듯이 참았다. 특히나 이곳의 방식을 따라가다 보니 선택권이 없었다. 또한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아무렇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차피 결국에 그런 상상을 하고 불편한 감정을 끌어와봤자 나에게 도움 되는 게 하나도 없었고 나만 빼고 다른 이들은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은 채 너무나 맛있는 음식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결심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별나지 않게 그런 환경 속에서 일부의 디테일에 목숨 걸지 말고 그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건강하게 집중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 식기류를 써서 배탈이 났다거나 세상이 무너진다거나 내가 내일 죽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프랑스인들의 위생개념을 보며 크고 작은 충격을 받은 적도 많지만, 그들 덕분에 점점 내가 알고 경험했던 것보다는 훨씬 유한 환경에 (어쩔 수 없이) 놓였고 자주 그런 사람들과 환경에 노출됐다. 그리고 그 위에 시간, 경험이 조금씩 겹겹이 쌓이면서 적응이 점점 되더니 이제는 많이 편해졌다. 특히나 어찌 보면 감사해야 할 일은 내 강박이 많이 사라졌다.
동물 털에 대한 강박은 쥬도를 통해서, 그의 덕분에 좋아졌다. 당연한 일이다. 매일을 같이 사니까. 특히 이 고양이와 단순히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를 가슴속에 너무도 깊이 품어버린 내가 되었으니까.
아니 이제는 오히려 누군가가 나의 위생 상태와 기준을 보면 충격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가 됐을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너무 힘든 생각에 갇혀서 여러모로 날개를 제대로 펼치지도 못했네. 당시에 만났던 좋은 사람, 환경들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시간들이 서운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그때는 알지 못한 것을 지금에야 아는 게 당연한 일이잖아.
살면서 '우선순위'를 현명하게 정하고, 어떤 가치에 초점을 맞출지 판단하고 그를 따르는 것 또한 나의 선택이자 몫이라는 생각을 했다.
쥬도를 처음 만난 날도 나의 강박은 진행 중이었다.
문 앞에서 크게 한숨을 쉬어내고 죠네 집에 들어갔는데, 뭔가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새 하얀 뭉게구름 위에 잿빛 하늘이 살짝 드리운 듯한 몸에 눈에는 에메랄드 원석 두 개를 반짝이고 있는 작은 생명체가 있었다.
'와 너무 예쁘다, 이렇게 예쁜 고양이가 있는 줄은 몰랐네.'
사실 예쁜 것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서 '살아있는 예쁜 것'을 본 게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예쁜 건 예쁜 건데 호기심이 생긴다거나 굳이 만져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나는 이 고양이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평소와 다르지 않게 음식과 이야기에 집중했고 저기에 돌아다니는 저 고양이는 정말 예쁘다는 생각, 그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한참 이야기 중에 그 예쁜 고양이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우리의 발밑에 갑자기 드러눕더니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고양이에 대한 생각이 '예쁘다'에서 '재미나고 신기하다'가 추가되었다.
강박진행형을 안고서도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 무사히 맛있게 먹고, 마시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