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남편은 어릴 때 부모님이 고양이를 키웠었고, 특히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아버지는 또 본인의 어머니의 영향으로 고양이를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의 할머니댁에 가면 고양이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양이가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집안의 수많은 물건들의 테마는 '고양이'이다. 고양이 그릇, 고양이 사진, 고양이 쿠션, 고양이 가방 등 일명 온갖 고양이 굿즈들이 집에 있는 온통 고양이 세상이다. 그래서 이제는 고양이만 보면 자동적으로 할머님을 떠올리고 할머니께 사다 드린다.
취향을 뚜렷하게 갖는다는 건 좋은 것 같다. 자신을 남에게 가장 잘 기억할 수 있게 만드는 최고의 방법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선물을 고르거나 할 때 할머니가 가장 어렵지 않고 시간이 무지 단축 된다.
엄마는 남편의 친할머니를 '고양이 할머니'라고 부르시고 그의 외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라고 하며 친가, 외가의 할머니 두 분을 구분할 정도다.
아무튼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의 시아버지는 할머니만큼이나 고양이를 좋아하신단다.
생각해 보니 몇 년 전에 시댁에 늙고 뚱뚱한 고양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나이가 너무 많았고, 커다란 몸집으로 인해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소파 위에 무슨 하나의 장식물처럼 고정되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시아버지의 고개 뒷 쪽, 소파 등받이 위 작은 공간에 항상 몸을 구기고 앉아 있는 걸 보긴 한 것 같다.
그런데 뭐 그때도 마찬가지로 동물=더러움의 공식이 성립하고 있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냥 내가 편하게 있다 가기 위해서는 무시를 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라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냥 멀리서만 바라보고 존재를 무시해서 그런지 '그냥 그런 게 시댁에 있었다' 정도로만 기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들은 것 같긴 한데 이마저도 확실한 기억은 아닌 게 지금 그 고양이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 소식을 들은 적이 있을 터라 이렇게 써본다. 그 정도로 나는 고양이 자체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남편이 친구 죠와 열흘 정도 여행을 가게 된다. 나는 휴가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같이 갈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데, 본인은 나를 혼자 두고 가는 게 내심 미안했는지 괜찮다는데도 계속 자신이 없을 동안 내가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추천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에게 제안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캣 시터였다.
소니야네가 죠에게 고양이를 맡기고 휴가를 가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들이 비슷한 시기에 떠나게 되어서 차질이 생겼고, 지금도 아마 계속 봐줄 사람을 구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 혹시 고양이 돌보는 경험을 해 보는 게 어떻냐는데,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다그쳤다. 알레르기가 심해서 그 고양이로 인해 내 건강이 해쳐지고 일상생활이 안되면 책임은 누가 질 거냐고 나무랐다.
그렇게 잊힐 무렵 얼마 후 남편이 또 그 고양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머릿속 한편에 그때 죠네 집에서 봤던 그 작고 예쁜 고양이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사실 그 시기에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하루 종일 일에 절어 살다 보니 같은 일상의 반복에서 지루함을 느꼈고 이렇게 살다가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겠구나 싶어서 걱정을 하며 보냈다. 그래서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젊음이 길지 않다는 것. 매일 거울을 보며 달라지는 내 모습, 일차원적으로 신체적인 노화를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면서 내게 주어진 지금의 이 젊음은 잠시 스쳐가는, 일시적인 선물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시기였다. 그리고 한번 사는데 뭐든 여러 가지를 경험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조급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속으로는 고양이 돌보는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사실 나이가 들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나를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마음에 알레르기를 앞세워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쏘아붙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을 곱씹을수록, 내가 혼자 남겨지는 상황에, 게다가 '혼자서' 처음 해보는 일을 만약 잘 해내면 성취감과 뿌듯함이 굉장히 클 것 같고 요즘 자꾸 내려만 가는 자존감까지도 올라가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해보지 않은 일을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못하니까 안 하겠다, 안 해보고 못하겠다 또는 할 기회가 생겼는데 무조건 안 한다는 마인드로 늙어가는 건 내 사전엔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심 남편이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주기를 바라며 기다렸는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길래, 내가 먼저 혹시 그 고양이 시터가 구해졌을까라며 은근히 던졌더니 눈이 반짝이며 아마 아직 못 구했을 텐데 망설이지 말고 연락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딱 삼일만 봐주는 것이고 마침 날짜를 보니 본인이 휴가에서 그날 저녁에 돌아오는 날이더라면서 사실상 몇 시간만 그 고양이랑 단둘이 있으면 되고, 그 후엔 자기가 같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순간 이 일을 선택하지 않으면, 다시는 이런 기회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알레르기는 그 조그마한 기적의 알약을 먹어서 해결하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소니야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고양이 맡아줄 사람 아직 안 구해졌으면 내가 돌봐주고 싶은데! 그런데 사실 나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서 솔직히 조금 걱정되지만 네가 와서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메모하고 잘 돌볼 수 있도록 최대한으로 노력할게!]
누군가에게 내가 잘하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건 , (내가 고백이라고 쓰고도 놀랐다.) 아니 그냥 솔직해지는 것뿐인데 이게 어떠한 고백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자존심이 조금 상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잘 모르는 것을 못하는 건 당연하고 못하는 일은 배우면 할 수 있게 되는 건 더욱이 당연한 일.
그리고 나는 이로서 또 하나를 배웠다. 모르거나 잘하지 못하는 일 앞에서 허세를 부리기보다 솔직해지고 다른 이에게 당당히 도움을 구하는 일은 어쩌면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받아들일 자세를 준비하는 정성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요즘 말로 그런 기성세대가 가진 고집, 자신의 방식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꼰대 라고 하던데, 그 부정적인 뉘앙스의 꼰대로 늙어가고 싶진 않았다.
나도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의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과정에 놓여 있는데 솔직히 기성세대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나이를 먹어 간다는 증거이기도 해서 인정하기가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있다.
그래도 젊은 세대와 불쾌감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으면서 부드럽고 수용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또 그리고 그런 게 아주 멋진 거라는 주문에 꽂혀서 나는 그런 모습을 요즘 말처럼 그런 모습을 '추구미'로 하기로 다짐했기에.
그렇게 나는 삼 일간의 캣시터를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