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양이가 우리 집에 도착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를 부른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에 마음을 담고 기억하고 신경을 쓴다는 건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아가 관계를 맺거나 호감이 생길 가능성, 그리고 그 호감의 가능성까지도 뛰어넘게 되면 감정적인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그 이름을 불러주게 되는 건 그 이름의 존재를 존중하게 된다는 말과도 같다.
쥬도. 그 고양이의 이름은 쥬도 judo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의 대표 스포츠 유도를 라틴어 발음으로 읽는 쥬도. 사실 왜 이름이 쥬도 일까 물어본 적은 없다. 왜냐면 일단 쥬도에게 이 이름을 주신 할머니는 치매로 인해 많은 기억들을 잃고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하시고 조금 난폭한 모습을 보이시다가 결국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단다. 아무튼 많이 아프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 고양이를 대신 맡게 된 손녀딸 소니야에게 조차도 딱히 고양이 이름의 의미를 물어보거나 할 기회가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쥬도가 태어난, 지금으로부터 십일 년 전엔 일본이라는 나라가 프랑스에서 너무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었고(물론 지금도 유럽에서 자포니즘이 주는 꿈과 환상은 계속된다...), 지금의 한류 붐처럼 그 당시에 일본 문화는 다양한 분야에서 돌풍처럼 유행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정통 프랑스인이었던 소니야의 할머니는 하얀 영국 혈통 고양이를 데려와서는 유도복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그의 이름을 쥬도라고 지어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직접 물어본 적은 없어서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나의 상상은 그러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할머니의 손녀딸인 소니야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
우리 집에 도착한 이 낯설고 새하얀 고양이 쥬도는 소니야와 그의 남자친구인 쟝이 떠나자 현관 앞을 잠시 맴돌다가 복도 한가운데에서 멍하니 서 있더니 복도 중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곧바로 꼬리를 몸에 말고 동그랗게 자리 잡더니 가만히 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덩그러니 길고 긴 복도에서 눈을 내리 깔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냥 우두커니 있었다.
나의 기억 속에 처음 우리 집에 온 고양이 쥬도는 쓸쓸했던 느낌이다. 사실 그 후에 그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하게 기억된 그 모습은 복도에 앉아있던 그 모습뿐이다. 이 기억의 삭제에 관해 굳이 말하자면, 나는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표시이자 그의 존재를 존중해 주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낯선 공간에 갑작스럽게 떨어지게 된 이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괜찮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괜찮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양이는 영역동물 이라는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내가 이 상황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일까. 자신과 함께 있던 애정하는 사람들이 갑작스레 낯선 공간에서 자신을 떠난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남기고 몇 번의 쓰다듬음 후에 문을 닫고 그들은 사라진다. 낯선 냄새, 낯선 집의 구조 그리고 그의 영역에 낯선 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던 나는 그의 존재를 인식해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라고 생각했고, 그에게도, 나에게도 서로에게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를 '신경 쓰지 않기'라 결론 내리고 그를 곧바로 시도했다.
생각해 보니 고양이에 대한 상식이 정말인지 하나도 없었다. 그저 개인적인 동물이며 매우 독립적이다 정도만 알고 나서 그를 맞았고, 그가 내 앞에 있으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미리 공부를 좀 해볼걸이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무지함이 답답해졌고 내 눈앞에 나타난 이 생명체가 나에게도 낯설고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당혹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지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불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직감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
재미있는 건, 얼음처럼 굳어있는 그런 쥬도의 모습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이 겹쳤다.
그리고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고양이를 '그 고양이'가 아닌 '쥬도'라고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