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건 고양이는 나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모습, 태도, 존재 속에서.
쥬도를 보면서 자주 우아함에 대해 생각한다. 우아해 보인다는 건 무엇일까, 그리고 왜일까.
우아함이 결정되는 것은 아주 빠르게 판단된다. 보이지 않는 지적 능력보다는 외관에서 보이는 면, 겉모습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물론 대화를 많이 나눠보고 그 사람의 생각, 가치관, 우선시하는 요소, 지식의 수준들을 듣게 되면 그 사람이 인간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우아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지적인 우아함을 이해하기에는 대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아하다는 단어의 순수한 의미는 겉모습에서 풍긴다. 어쨌든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겉모습의 우아함, 행동의 우아함이다.
나는 백조를 보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백조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백조를 보면 첫눈에 우아하다는 단어가 떠오른다. 고양이를 알지 못할 때는 이 단어를 고양이에게 쓸거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 고양이는 그 단어와 거리가 너무 멀었다.
새침함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얍삽한 동물 정도였다.
한때 나는 외적인 것에 치장하기보다 내면을 더 많이 신경 쓰고 채우자는 다짐을 했었다. 어쩌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잘하지 못하는 것이 두려워서, 내면을 신경 쓰는 주의 인척 하면서 외적인 것을 조금 배척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편한 것 같아서. 나라는 사람이 트렌디하지 못하고 유행과 변화를 잘 따라가지 못하니까.
요즘은 내적인 아름다움, 외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춰져야 더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사회가 된 것 같고, 사람들은 고군분투하며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유지하며 균형을 잘 맞추는, 말 그대로 '쿨'하고 멋진 사람들이 정말 많아졌다.
최근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의지로써 운동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운동에 취미를 가져본 적도 좋아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삼십 대 중반이 되고 나서 체력이 너무 많이 떨어짐을 느꼈다. 근육이 줄어들고 아픈 곳도 생기면서 신체에 불편함이 잦아졌다. 직업 특성상 고정 자세를 많이 하다 보니 늘 고질병처럼 삭신이 쑤신다고 투덜거렸고, 마침 회사에서 등록비 할인 행사를 하길래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혹하는 마음에 헬스장을 등록했다. 드라마틱하게 살을 빼어야겠다는 마음이 아니고 기초 체력을 늘리고 몸을 단단하게 하면 좋겠다고 시작하게 된 운동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내 몸을 거울에 조금 더 자주 비춰보고, 찍은 사진들과 내가 찍힌 사진들을 보면서 그동안 얼마나 나쁜 자세와 습관으로 살아갔었는지를 마주 보게 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사는 것이, 하루하루 살아내는 일이 버겁고 바쁘다는 이유로 정작 나 자신에 대해 돌볼 여유는 없었다.
쥬도를 보면서 어떠한 것에 대한 시선, 즉 태도와 생각이 바뀐 것들 중에 하나가 있는데 바로 외적인 것에 하는 치장과, 외적인 모습을 가꾸고 관리한다는 말은 조금 다르다는 의미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내가 생각했던 외적인 아름다움은 단순히 옷을 잘 입고, 스타일이 좋고 센스 있는 모습, 화장이나 머리스타일이 잘 가꾸어진 모습, 정말 '쿨' 하게 멋지게 보이는 것을 외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들이 자신의 몸을 자신의 침으로 씻어내는 행동 '그루밍'을 한다. 쥬도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깨어 있을 때는 그래도 적지 않은 시간을 자신의 몸을 닦는 데에 쓰곤 한다. 특히 앞다리 쪽은 물을 마시고 나서, 사료를 먹고 나서, 갑자기 복도를 걷다가도 멈춰서 수시로 핥아낸다.
그런 쥬도를 볼 때면 나는 그가 내 앞에서 한 편의 '쇼'를 하는 것 같고, 나는 그가 펼치는 '그루밍쇼'에 초대된 관객이 된 기분이다. 그리고 '우아함'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조그맣고 하얀 앞다리를 중간쯤 들고서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정확하게 고정하여 닦아내는데 그 행동을 하면서도 몸 전체의 균형은 그대로 유지한다. 그리고 그의 꼬리가 균형을 잡을 때 중심의 역할을 해주는데 하얀 털에 회색의 줄무늬가 들어간 예쁜 옷을 입고서 아주 툭 가볍게 내려트리지만, 땅바닥에는 닿지 않게 살짝 끝을 말아 올리거나 정말 아주 살짝만 바닥에 놓는다. 보통은 걷다가 갑자기 서서히 멈추고서 그루밍을 시작하는데 그 준비과정마저도 보고 있으면 감탄이 나온다. 또한 그의 시선은 온전히 자신하고 있는 행위와 그의 몸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 모습은 우아하는 단어를 떠오르게 하며, 다른 신체의 부분들을 닦아 낼 때도 어찌나 우아하다는 말이 정말 많이 생각난다. 꼬리를 닦으려고 마음먹을 때면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뒷다리 태를 뽐내듯이 있는 힘껏 뻗는다.
우아하다.
그리고 경이롭다.
나는 쥬도가 그루밍을 하는 모습을 보면 이러한 자연물이 창조되었다는 사실, 이 생명의 신비로움에 감탄을 멈추지 못한다. 그리고 넋을 잃고 쇼를 관람한다.
어찌 보면 정말 하찮게도 작디작은 몸을 가진 이 생명체는, 자신을 몸을 너무도 소중하게 여긴다. 발가락조차도 사이사이를 하나하나 벌려서 그 안을 꼼꼼하게 전부 혀로 쓸어낸다. 자신의 침을 묻힌 작은 솜털방망이로 얼굴을 왔다 갔다 쉴 새 없이 문지른다. 눈 주변, 손이 닿는 이마 쪽을 할 때면 눈 주변을 닦을 때 보다 손을 더 크게 휘두른다.
그가 잠을 자고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자신의 몸을 챙기는 일이다. 왼쪽다리 오른쪽다리 순차적으로 천천히 앞으로 뻗고 엉덩이를 뒤로 쭉 빼서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거나 고개를 들지 않고 몸통만 삐쭉 위로 들어 올리고 털을 세우며 몸을 풀어낸다.
나는 쥬도를 보면서 자신의 몸을 저렇게 소중히 여기는 동물이 있을까, 나는 내 몸을 저렇게 소중하게 여겨본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렇게 야무지고 단단하게 자신의 몸을 지켜내고 가꾸는 모습을 에서 '우아하다'라는 말이 계속 떠올랐다.
고양이 자체의 모습, 비율적으로 그가 지닌 실루엣이 우아한 것도 물론 있지만, 자신을 기품 있게 만들어내며 자신에게 주어진 육신을 너무도 끔찍하게 소중히 여기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나는 내 몸덩어리 하나도 제대로 돌본적도 없고, 그러려고 마음먹어 본 적도 없었다. 부끄러웠다.
쥬도르 보면서 자연이라는 신이 주신 본인 고유의 산물을 저렇게 잘 지켜내는 책임감 있는 동물이 또 있나 싶어 감동을 받는다.
나도 자세를 바르게 하려고 노력해 보면 어떨까, 우아한 실루엣을 갖도록 가꿔보면 어떨까. 그리고 나의 상태를 개선시켜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조각상처럼 완벽한 모습이 되자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내가 물려받고 태어난 주어진 모습에서 내 몸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꾸는 것이야 말로 나 자신을 존중하는 가장 일차원적인 방법이자 그 몸을 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하는 표시이며, 그로 인해 정신까지 맑아지는 청정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이 어쩌면 내면 가꾸기보다 우선적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멋 내는 그 외적인 부분이라기보다, 고양이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고 바르게 몸을 쓰고 가꿔내는 그 외적인 모습을 보았기에. 건강한 생각은 건강한 몸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정말 맞다. 내가 몸을 내방 쳐 놓고 피곤할 때는 정신적인 건강이 더 악화되곤 했다.
쥬도는 나에게 정말 묘하고 독특한 부분에서 미미하게 영감을 준다.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부분들에서, 또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내 환경을 바꾸지 않는다는 선에서 아주 미묘하게 새로운 경험과 신비로움을 느끼며 하루를 산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말을 빌리면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라'
나는 지금까지도 나의 고유함 즉 오리지널리티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며 보낸다.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보기 위한 생각을 한다.
그런데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조금 더 어릴 때는 '남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면 지금은 그들과 다르게 보이기를 위한 노력이 아닌, 나 '스스로가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을 갖기 위해 의식하는 중이다.
즉 달라진 것은 이제는 남의 시선 속의 나 보다는 순수한 나의 시선이 조금 더 많이 중요해졌다는 것.
그리고 쥬도를 보면서, 쥬도를 통해서, 그 덕분에 전과는 또 다른 눈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는 중이다.
쥬도는 내가 좋아하는 호크니 작가의 말처럼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을 내게 직접 가져다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