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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하나씩 그리기

by 창작몽상가

나의 20대 후반 즈음에 디지털 드로잉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27살부터 그림 그리기에 본격적으로 푹 빠져있었고 30세가 되기 전 에는 이미 다양한 재료와 도구들을 경험해 보는 일이 하나의 취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사 모아 테스트 해본 모든 재료들을 간단하게 한방에 가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태블릿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태블릿 바람이 불어서 그것만 있으면 뭐든 해낼 사람처럼 이야기하며 아주 티 나게 기웃거렸더니, 결국 남편은 내가 30살이 되던 날을 의미 있게 축하해 주기 위해 물론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었을 테고, 내 작전(?)이 통해 반강제적으로 결국 내게 아이패드를 선물해 주었다.

그림 그리는 어플을 냉큼 다운로드하고 유튜브를 찾아서 영상을 보면서 기초를 배웠고, 난생처음 새로운 경험을 한다.


태블릿 드로잉의 가장 큰 장점은 여러 도구를 복잡하게 펼치지 않고, 주어진 펜슬 하나로 수채화, 과슈, 유화, 아크릴, 펜, 색연필, 잉크 등 원하는 도구의 느낌대로 그릴 수 있다. 또한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 접근성이 아주 쉬운 것에 비해, 문제는 그만큼 중간에 그만두기 또한 쉬워서 쉽게 관두고, 쉽게 질렸다.

그리고 디지털로 그림을 그려보니 아날로그의 감성이 그리워지는 변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심하게 나의 아이패드는 영화 보고 게임하는 용도로 점점 바뀌어 갔고, 사실은 그 시기에 그림 그리는 자체를 점점 그만두게 되었다. 내 생각만큼 잘 그려지지 않아서 권태기 비슷한 게 왔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결국 그림 그리기와 거리를 두었다. 시간이 정말 많은 코로나 팬데믹 시절에도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고 잠을 자는데 시간을 보냈다.


사실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가 그림을 하나를 그려낼 때면, 이건 우연으로 그려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내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아닌데 우연으로 어쩌다가 운 좋게 그럴 듯 해보이는 한 장이 그려졌다는 기분. 자신감이 자꾸 떨어지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많이 커져서 결국에는 그림을 아예 그리고 싶지도 않은 엄청난 부담감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림 그리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다시 그리고 싶은 마음은 계속 가슴 한편에 항상 남아있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 처럼 되어버려 심지어는 취미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동경하게 되었다.




영국출신의 현존하는 현대미술의 거장이며, 살아있는 피카소라고도 불리는 데이비드 호크니 작가의 전시가 루이뷔통 재단에서 몇 달째 열리고 있었는데 너무 가고 싶었으나 멀어서 귀찮다는 핑계로 계속 미루다가 결국 전시 클로징 일주일을 남기고 갑자기 다급해져서 티켓을 끊고 서둘러 갔다.


호크니의 전시를 보면서 입구에서부터 감동을 받았다. 전시장을 들어가던 꼴로, 전시 내내 , 전시를 나오면서 까지 '와' , '너무 좋다'라는 감탄사를 계속해서 쏟아내기 바빴다. 다른 말로는 표현도 안 되는 고장 난 바보가 되었다. 일단 엄청나게 많은 다작을 하신 분인데( 이 전시에만 450여 점이 전시되었다.) 일단 작품의 내용이나 완성도 뭐 전부 떠나서 그것에 쏟은 그분의 시간, 정성, 노력, 자체가 그냥 하나의 예술이었다.


갑자기 나는 핸드폰 메모장을 꺼내 들고 내가 느끼는 생각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 전시 덕분에 나에게는 엄청난 긍정적인 영향들이 펼쳐졌고 창작에 대한 시선마저 바뀌었다. 너무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일상 속에서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조건 연습하고 시도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분야에서든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은,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창작을 아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하게 될 때 자신만의 느낌이 생기고, 그 안에서 겹겹이 쌓아 올리고 여러 방식으로 시도해 보면서 정성, 시간, 영혼을 쏟는 그런 사람들이 나아가 예술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예술가 이전에는 창작자가 있다.




호크니 작가님은 특히나 주제, 재료, 소재 등등을 가리지 않았고 새로운 기계가 나오면 배우고 늘 관심을 가지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디지털 분야까지 섭렵하였으며 그렇게 장르와 방식을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실제, 상상 전부 그리셨다. 사진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사진을 직접 찍어서 그 사진을 보고 캔버스에 옮기기도 했다. 신 문물이 새로 나오면 겁을 먹기보다 호기심이 정말 많아서 직접 사용해 보고, 경험해 보기를 서슴지 않는 분이시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패드로 그린 드로잉들이 정말 많았다.


내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전시장에서 작가님의 모습이 담긴 영상들이 많았는데 그 부분이 그림만큼이나 인상 깊었다. 지금까지도 손을 떨어가며 그림을 그려내고, 떨리는 그 손으로 스케치북을 힘겹게 넘기는 모습이 담겨있다. 그런데 나 따위가(정말 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된다) 왜 열심히, 간절히 안 사냐.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미 자기 분야에서 최고 자리를 넘어 세계에서 최고인 분, 이런 분이야 말로 이제 좀 쉬면서 대충 살아도 될 자격이 있는 분인데도 아직까지 오직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신다는데 왜 나는 이렇게 설렁설렁 게으르게 사는지 말이 안 되고 부끄러웠다.





나는 좋지 않은 문제가 생겨서, 일을 잠시 그만두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이 평소보다 정말 많아졌지만 문제는 하루에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너무 아까운 시간들을 빈둥거리며 떠내려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그렇게 계속 지낸다면 나 스스로가 더욱 힘들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호크니 전시 이후에 몇 년 만에 창작에 대한 욕구와 용기가 솟구쳤다. 사실 전에도 크고 작은 전시들을 많이 갈 때마다 항상 그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으나 두려워서 시작을 안 했다. 숨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더 많이 흘렀고 그 두려움이 고질병처럼 남아버렸다.


생각해 보니 호크니 전시에서 정말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가 아이패드 드로잉이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작품'이 되는 것 같았는데 아이패드로 그린 자잘한 드로잉들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접근성이 좋은 장점만큼 드로잉의 가치는 떨어진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일단은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결국에는 창작을 하고, 마음을 쏟고, 시도하며 그림을 그려내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방구석에서 잊힌 나의 아이패드가 떠올랐다.




무엇을 그릴까?


쥬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바쁜 일상 속 하루 중에 가장 보람 있고,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는 일은 그와 보내는 시간이었다. 퇴근하는 것이 너무 기대되는 이유는 나를 문 앞에 마중 나와 고개를 쏙 내미는 쥬도의 얼굴. 그의 소리, 나에게 다가와 꼬리를 세우고 얼굴을 비비는 그 모습이 고된 하루의 에너지를 채워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관찰하고 사진 찍고 쓰다듬고 안아주면서 내 하루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하루가 완성되었고 그렇게 보람차다는 느낌으로 매일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가끔 어떠한 두려움이 밀려오는데, 그것은 바로 쥬도가 10살에 우리 집에 오고, 지금은 11살이 되면서 그 두려움이 조금 더 뚜렷해졌다. 고양이의 나이로는 적지 않은 노년기. 솔직한 심정으로 그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혈통이 있는 고양이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 한 전 집사 소니야의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긴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행복하고 알찬 하루가 깨지는 것, 나의 소중한 고양이가, 쥬도가 내 옆에서 사라지는 날이 걱정되고 두렵다.


이 작은 고양이는 이미 나에게 너무나 큰 존재가 되었고, 진하고 깊은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해서 보답할 수 있을까 하고 매일 고민하고 그가 최대한 편안함을 느끼도록 나름대로 많이 신경을 써주는데 과연 내 노력이 그에게 충분할까.


어쩌면 이 순간을 자주 기록하고 그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담아내는 일만이 언젠가는 떠날 쥬도에게 보답을 하고 평생 기억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봤다.

그리고 더 이상은 무엇을 그릴까라는 말을 그만하기로 했다.

잘 그리려고 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묵혀둔 아이패드를 정말 오랜만에 다시 꺼내 들었다.


연습할 겸 하루에 하나씩 그리기를 해보면 어떨까.

무엇을 그릴지 고민을 왜 하는 거야. 내 옆에 있는 쥬도가 바로 살아있는 영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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