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너무 오랫동안 보지 않으면 나는 그 사람의 본질, 그 사람과 엮인 감정의 흐름 같은 것들은 잊고
단지 그 사람 자체가 풍기던 분위기만을 기억하는 것 같아.
그때를 일일이 기억하며 모조리 다 모든 것을 품어내고 있기에는 내 머릿속이 참 많이 복잡해져.
그래서 최대한 나의 오감을 피곤하지 않게 하려다 보니 방어적으로 그렇게 되었나 봐.
뭐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기억력이 좋은 편도 아니지만.
하지만 사람에 대한 기억은 내가 일부러 잊으려고 하는 부분도 꽤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얼굴, 겉모습은 세월과 함께 변하기 마련이지.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면 우리는 겉에서 보이는 모습, 그 전과 비교해서 변한 것, 달라진 점을 인사도 제대로 건네기 전에 곧바로 줄줄 늘어놓아.
네가 아무리 변했지만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특유의 온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야. 그래서 어떤 사람을 기억할 때 전반적인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으려고 더 노력하는 것 같아.
그래서인지 어느 기회로 오랜만에 누군가를 다시 만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나면 기억 속 너라는 사람의 영상이 다시 재생되면서 뿌옇던 초점은 점점 뚜렷해져.
십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대화를 해야 맞는 걸까?
나는 항상 사람을 만나기 전에 작은 걱정 같은 것을 해.
내가 말주변이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고 소심하기도 하며 대화를 이끌어 가는 편도 아니야.
그래서 만나기 전에 이미 너라는 사람과 거리를 두기 시작해.
늘 한걸음 멀찍이 떨어져서 일찌감치 거리를 만들어.
그리곤 생각하지.
이 사람과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지? 따위를 우려하다 보니 어쩔 때는 혹시 대화가 끊기는 상황이 오면 어떤 말을 할지 까지도 생각할 때도 있어.
물론 막상 그 자리에 가면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상황에 나를 맡긴 채 시간을 보내고 오곤 하면서도.
네가 '난 점점 나이를 먹어 갈수록 옛날사람들 만나는 게 너무 편하고 좋더라'라고 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틀어놨던 수도꼭지가 단수되는 기분이 들었어.
조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고 내가 너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렇기도 했나 봐.
그래서 진심으로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지.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이 질문을 던지면서 혹시나 조금이라도 공격적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우려되어 표정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몰라.
네가 그랬지.
살다 보니 그냥 어느 날은 삼겹살에 소주가 많이 생각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편하게 불러 굳이 이렇게 저렇게 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각자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편한 사람과 먹고 마실 수 있는 그런 과거의 인연이 너무 안정감 있고 좋더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물론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그 부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는데 역시나.
그 말에 대해 공감을 하지 못했어.
'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던데..' 라며 의식의 흐름대로 중얼거리듯 흘렸는데 너는 이미 너의 말속의 추억여행에 심취해서 그 중얼거리는 듯한 내 말에 다행히도 크게 집중을 하지 않았는데 난 되려 안도감 같은 것이 들었어.
내가 너와 찬반 토론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과거의 인연인 너를 겨냥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그날은 네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려고 왔던 자리라서 굳이 반대되는 나의 입장을 말하는 게 의미도 없잖아.
아무튼 나는 너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고 지금도 이 주제에 대해 머리를 쥐어짜.
그런데 웃긴 건 내가 새롭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바라지만 그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의 주도적이고 멋진 사람은 아니야.
뭐든 그런 것 같아. 시도는 자체는 늘 쉽지만 그 시도를 지속시키는 것이야 말로 꽤 어려운 일이라서 그 부분에서 내공이 깊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구분되고 결국에 '어떤 것에 더 중요성을 두고 사는지'가 서서히 밝혀지지.
생각의 꼬리를 물고서 확실히 알게 된 게 있다면 나는 과거에 머무르는 것, 과거의 사람들과 멈춰 있는 것이 내게는 크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더라는 것이었어.
과거의 나는 미흡했고 부족했어. 아는 것도 없고. 내가 나 자신이었던 적도 없어.
그렇다고 해서 옛 인연들을 전부 피하고 싶고 다신 보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야.
나는 과거의 사람과도 어떠한 부분에서는 현재 그리고 미래가 어느 정도 연결 될 때가 좋아.
우리가 서로 전보다 변한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면서도 앞으로의 행보를 이야깃거리로 삼는 사이.
과거만을 안주삼아 쓰디 쓴맛의 술 한잔을 들이켜기보다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를 곁들여 맑고 시큼한 술잔을 부딪칠 수 있는 그런 사이를 선호해.
지금 보니 과거를, 과거의 사람을 분위기만 대략적으로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만 봐도 내가 어떻게 부족한 사람인지가 드러나는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해.
그래도 과거를 너무 뚜렷하게 기억하지 않으려 한 후 나름 수확이 있었어.
지난 일에 크게 매달리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미워하는 것과 멀어졌어.
이제는 누구를 마음먹고 욕하고 미워하려고 해도 잠시의 순간일 뿐이야.
천성이 그런 건지 아님 내가 의식적으로 회피하는 건지 노력인지 그중 하나일 거 같아. 전부 다 일수도 있고.
그 부분은 조금 더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보아야 하겠지.
미웠던 사람도 이제는 이해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커.
미움을 끌어안고 지냈던 적도 있지만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충분히 갖게 되면서 타인도 나름대로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갖게 되니 조금 더 많이 이해하게 됐어. 실은 나를 미처 깊게 돌보지 못했던 불찰로 고통은 진행이었나 봐.
결국 미워하는 마음조차도 과거에 놔두고 오기로 했지. 물론 나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상태인 것이지 아주 잘 이행하고 있다는 건 아니기 때문에 어쩔 때는 나도 사람인지라 하루 종일 어떤 몹쓸 생각에 사로잡혀서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불행의 숨을 땅이 꺼지라 쉬며 보내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스스로가 감정의 산에서 홀로 너무 버거워져서 다시 평정심을 찾으려 마음을 혹독하게 다스려.
내가 너를 미워했던 적이 있어서 이 말을 하는 것 같아.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때는 아는 게 없어서 그냥 나와 결이 다를 뿐이라는 대인배적인 생각을 하지 못했어.
특히 그때는 어리고 또 어리석어서 다름을 인정하는 방법을 몰라 그것이 곧바로 미움이라는 단어로 표출됐고.
하지만 이제는 나도 알지. 네가 특이하고 이상한 게 절대 아니었고 다만 그 당시엔 부족한 나 자신이 '타인을 인정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에 있었기에 너그럽지 못했다고.
그래서인지 지금의 나는 솔직한 심정으로 과거 인연들에 대해서는 딱히 미움도 없었지만
사실 미련까지도 없어지는 중이야.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감사만 남아.
'그때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나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고 어떤 영향을 주었었지.' 정도로.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인사를 하는데 너는 울음을 터트렸어.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에 그랬던 것 같은데
나는 형편없게도 세월이 지날수록 공감 능력이 무뎌지는 중이라서 예전만큼 쉽게 눈물은 안 나오더라.
그냥 스쳐가는 사람만 보고도 안쓰러운 마음에 눈물을 똑똑 흘릴 때도 있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네가 우는 모습을 보고 있다 보니 눈물의 의미가 조금 마음으로 느껴져서 널 토닥이면서 눈시울을 붉히긴 했지만. 금세 닦아버릴 수 있는 고마움의 인사 정도의 의미의 눈물이었어.
옛날 사람이 좋다는 너에게
네가 들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라고 했어.
자유로워 보이고 뭔지 모를 빛이 나던 내 모습을 동경했었다고 이야기하는 너에게 내가 뭐라고 뭐 그렇게 까지 라는 생각에 반은 어이가 없고, 반은 너의 당시 상황을 알기 때문에 이해가 되기도 하는데 형식적으로 '아니 왜'라는 말이 나왔지만 그 '왜'는 물음표의 질문으로 쓴 것이 아니라 그냥 의미 없이 비어있는 추임새 같은 의미로서 '왜'를 말하면서도 나는 너의 눈을 보진 못했어.
그것 또한 너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고백이고 용기인데 내가 그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현재에 만난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았고, 너의 쿨함이 대담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네 눈을 놓쳐버렸지.
그냥 네가 나라는 사람의 겉으로 보이는 어떠한 모습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기도 한데
사실 그렇게 보였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정작 나의 속내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전혀 반짝이고 있지 않았었는데.
그렇게 보였었다니 잘 숨겨낸 나 자신을 조금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되려나.
그 말은 내가 꼭 들어야 했던 말도 아니고 , 네가 꼭 해야 했던 말도 아니었는데 그 말을 결국 꺼냈다는 건.
너에게도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과거의 이야기 일 뿐이니까 그냥 그랬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라는 정도로 해석하고 어쩌면 네가 나를 계속해서 그런 기억으로 간직해 주면 좋겠더라.
십 년 후 만남은 신기한 경험이고 옛날 사람을 만났을 때의
네가 말하던 그 편안함을 감사해.
하지만 이제는 또다시 하나의 과거가 되어버린 우리의 재회.
우리가 나눈 이야기, 우리의 만남의 감정이 사소한 복잡함이 아닌
뭉툭한 어떠한 분위기로서 남는 것을 또 바라며.
나는 지금은 더 이상 많이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나를 조금 더 알게 되었거든.
또 언제가 다시 만나서 과거를 다시 쓸 날을 그 분위기를 다시 기억 속에 새길 그날이 언젠가 다시 오면
조금 더 어른이 되어 있을
나를, 우리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