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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젠틀우먼 22화

22 드론

“이제 누구에게 진실을 묻죠?”

by 김은주

조정배는 오치상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요트 앞에 오치상이 서 있었다. 집, 사무실, 애인의 집 그 어느 곳도 편하지 않았다. 반면 요트는 작은 섬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섬과 다를 바 없었다. 조금만 먼 바다로 나가면 완벽하게 혼자가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정희주를 만난 다음 이곳으로 왔다. 순간 오치상이 자신을 미행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조정배는 이런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일부러 얼굴을 가리듯 손을 들었다.

오치상은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치부를 아는 이들끼리 우리끼린 괜찮다는 의미로 하는 악수.

“여전히 신수가 훤하네. 좋아 보여.”

“형은 예전이랑 똑같아.”

“나? 난 다됐지 뭐.”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는 걸 안다. 오치상은 자신이 여전히 현역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상당했다.

“덥네. 뭐 마실 거 좀 있어?”

오치상은 조정배의 두툼한 팔뚝을 툭툭 치면서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조정배는 오치상을 따라 들어갔다. 갑자기 갈증이 심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좋지 않은 느낌이 엄습했다.

“그건, 잘 있지?”

오치상이 말하는 ‘그건’ 총이다. 최준석의 총.

최준석은 총이 사라졌다고 진술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최준석은 경찰에 신고를 한 다음 오치상과 통화를 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총을 숨겼다가 오치상에게 전달했다. 오치상은 총을 범인이 가져간 걸로 오해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야 수사가 계속 혼선을 거듭하면서 시간을 끌 테니까.

사라진 총의 소재를 찾아 정희주가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오치상은 도대체 누가 이 일련의 복수극을 꾸민 것인지 알아낼 계획이었다. 총은 조정배에게 맡겼다. 불법으로 입수한 총을 가장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은 바로 전직 형사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총을 구해 준 것도 조정배였다. 그는 흰 장갑을 끼고 침대 옆 장식장 서랍에서 헝겊으로 싸 놓은 총을 꺼냈다.

“잘 보관해. 언젠가 제대로 처리해야 하니까.”

“그럼. 제대로 처리해야지 물론.”

조정배는 다시 총을 원래 자리에 넣어 두었다.

“처리, 하니까 생각나는데 그 여자 딸 말이야. 기억나지?”

“그 애는 그때 김재화가 데리고 갔잖아. 형이랑 내가 뒤처리하고 있을 때.”

“그랬지. 그럼 예상대로 흘러갔겠군. 그 여자 때문에 꽤 애먹었지. 특히 우리 조 형사가.”

….”

“우리, 뭐 좀 마실까? 아침부터 내리쬐네. 이럴 땐 두어 군데만 들려도 셔츠가 흠뻑 젖는다니까. 차라리 겨울이 낫지.”

조정배는 칠링 바스켓에서 잘 익은 레드 와인을 꺼냈다. 최근에는 아침이건 점심이건 가리지 않고 눈에 뜨이는 술을 모조리 마셔 댔다. 그래서 한동안 보트에 술을 싣지 않다가 오늘 정희주를 만나고 돌아와 한잔할 생각에 얼음을 채운 바스켓에 와인을 미리 넣어 두었다. 그는 와인을 오치상에게 내밀었다.

“덕분에 호사야. 이 좋은 배에서 이 좋은 와인을 마시다니. 근데 말이야, 아까 확인 못 한 게 있는데 그거 좀 다시 꺼내 보겠어? 이건 내가 들고 있지.”

오치상은 자연스럽게 조정배의 와인을 받아들었다. 조정배는 말없이 다시 침대 옆 서랍장으로 갔다.

그 순간, 오치상은 자신의 와인을 단번에 들이켜고 주머니에서 주사약을 꺼내 유리로 된 입구를 부러뜨리고 조정배의 잔에 빠르게 부었다. 그리고 가벼운 스냅으로 와인 잔을 돌렸다. 조정배가 총을 든 채 돌아섰다.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타이밍이었다.

“와인 좋네. 잘 익었어.”

오치상은 총을 받아들면서 와인 잔을 내밀었다. 조정배는 잔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한 잔으로는 부족했다.

“고마워. 별거 아니네.”

오치상은 대충 살펴보고는 총을 다시 내밀었다. 조정배는 총을 받아 서랍에 넣었다.

“요즘도 잠 설치고 그래? 소풍 전날 애들처럼?”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애초에 기억 삭제니 뭐니 역겨운 수술을 받는 게 아니었어. 나약해 빠진 인간들의 발버둥이라니까. 말이 돼? 자기 감정 하나 제대로 컨트롤 못 한다는 게. 판검사도 별 볼 일 없어. 책상에 앉아 펜대만 굴리던 족속들. 우리처럼 현장 체질들한테는 그저 우습지 뭐.”

“그래. 그냥 잊었어야 했는데 내가 경솔했어.”

“아니.”

오치상은 정색하며 조정배를 응시했다.

“잊지 말고 간직해야지. 그것도 아주 디테일하게. 그래야 누가 물어도 정확하게 틀린 대답을 해 주지. 안 그래?”

조정배는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봤자 사람 하나 죽은 거야. 이거 체 게바라가 총살당하기 전에 한 말이라는데 우리 상황에도 딱 맞지 않아?”

오치상은 또다시 조정배의 경직된 팔을 툭툭 치며 보트 밖으로 나갔다.

조정배는 침대에 앉아 멀어져 가는 오치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돌아보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에 단단히 걸린 족제비가 된 것 같다. 조정배는 와인 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목구멍을 열고 흘려보냈다. 식욕도 감정도 불안도 이젠 더 이상 제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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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부터 불을 밝힌 고급 요트 주위로 여러 대의 드론이 날아다녔다. 희주는 선착장에서 서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은 이들이 하나둘 요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아예 휴대폰 속 자신의 팬들에게 오늘 입고 걸친 것을 보여 주며 떠들어 대는 여자도 있었다. 타인의 삶에 과도할 정도로 관심을 쏟고 또 거기에 기생하는 이들의 심리를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너무 노출한 탓에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되는 케이스가 점점 늘고 있기에 그들만의 유희를 마냥 좋게만 볼 수는 없었다.

한 무리의 대범하고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들이 차에서 내려 요트가 줄지어 있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파리처럼 목적 없이 붕붕 날던 드론들이 여자들을 향해 다가왔다. 여자들의 목적지인 한 요트에서 남자들이 나와서 여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개중에는 휘파람을 부는 인간도 있었다. 어디서 터트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알 만하군.”

희주는 이덕식이 뭘 좋아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내에게 낚시를 핑계로 즐긴 것도 미녀들과 대중의 관심이었을 것이다. 판사님은 여배우들과의 보내는 황홀한 시간과 그걸 질투하는 사람들의 시선 모두를 즐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판사라는 위대한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마음속 깊이 차올라 다른 사람들의 성실한 인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희주는 지나친 억측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덕식을 향한 악의를 제어하기 힘들었다.

희주는 불을 밝힌 요트 무리에서 조정배의 요트를 찾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요트는 불이 꺼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여기 있는 건 확실했다. 그는 오늘 아침 희주와 헤어져 헬스장 카운터를 지키는 애인을 만난 직후 바로 이곳으로 왔다. 이걸 확인시켜 준 사람은 물론 그의 애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이 또 한 번 자살 시도를 하고 그 장면의 최초 목격자가 자신이 될까 봐 돌아버릴 지경이라고 했다. 그래서 희주가 조정배를 예의 주시한다는 것에 오히려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를 한 번 더 압박할 생각이다. 단순히 희주가 범인에 대해 알아낸 게 있는지 정도의 이유로 만나자고 한 건 아닌 게 분명했다. 그게 궁금했다면 오치상에게 물었을 것이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강희건과 관계된 인물들 중 가장 심하게 죄책감에 시달린 인물이었다. 주용훈처럼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경고 메시지가 밖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조정배는 내면이 박살 난 상황에서도 깔끔하게 주름 하나 없는 옷을 걸치고 향수까지 뿌리는 남자였다. 희주는 잘 알고 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어느 날 깜짝 놀랄 만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을.

요트 앞에 서서 조정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 같아선 무방비 상태의 그를 만나고 싶지만 그랬다간 트집을 잡으며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줄 것 같아 관뒀다. 벨 소리가 요트 밖으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전화 주인은 보이지도 않고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별수 없네.”

희주는 성큼 요트 갑판 위로 올라갔다. 벨 소리가 계속 안에서 들렸다.

“이건 뭐 변심한 애인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요트 내부로 들어가는 문손잡이를 잡으려다가 본능적으로 땀에 전 티셔츠 자락을 당겨 문손잡이를 감싼 다음 문을 열었다.

“이 요트랑 어울리지도 않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 미안하지만 아까 못다 한….”

희주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밖의 온도와는 거의 10도 이상 차이가 날 만큼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타고 비릿한 쇠 맛이 코점막을 자극했다. 조정배는 요트 중앙의 암갈색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까 희주가 본 차림 그대로였다. 깔끔하게 접은 바짓단에 다림질이 된 리넨 바지, 하늘색 셔츠. 맨발에 신은 스웨이드 재질의 로퍼.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희주의 뒷덜미를 공격할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그는 죽어 있었다.

희주는 패닉이 빠졌다. 빨리 신고해야 한다는 판단,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할 것인가 대한 계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오기 전까지 뭔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쳤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신경 쓰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몸싸움 흔적은 없다. 바지 아래 드러난 발목과 팔에 긁힌 자국이나 묶인 흔적도 없다. 하지만 오른쪽 관자놀이 뒤쪽 머리카락은 피로 떡이 져 있다. 피가 오른쪽 어깨를 다 적시고 하늘색 셔츠 가슴팍을 물들이고 바지 앞부분까지 흘러내린 다음 말라붙어 있었다. 총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조정배의 오른손을 보았다. 손가락에 점점이 흩어진 화약 흔적과 피가 묻어 있었다. 희주는 재빨리 자신의 운동화 바닥을 확인했다. 외부 흙이나 바닥에 자국을 남길 만한 물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운동화는 깨끗했다. 요트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요트 갑판 위와 도로에 핏자국은 전혀 없었다. 조정배는 자신의 요트 안에서 죽은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자살이었다.

희주는 경찰을 부르기 전에 요트 내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빈 와인 병 3개와 와인 글라스 하나, 그리고 휴대폰이 있었다. 희주는 요트 안 싱크대를 살펴보았다. 그 안에 와인 글라스가 하나 더 있었다.

방문자.

누군가 여기에 왔었다. 잔은 비어 있지만 잔 바닥에 붉은 와인의 흔적은 남아 있다. 티셔츠를 이용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통화 2건. 희주가 건 것이었다. 흔적이 남았으니 경찰 조사를 피할 순 없을 것이다. 오히려 조정배를 만난 걸 가지고 팀장이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심신이 미약한 은퇴 형사를 압박해 자살에 이르게 한 악랄한 여형사 프레임을 씌울 것이다.

문자 내역을 확인했다. 항공권 결제 내역이 눈에 띄었다. 이틀 뒤 인천을 떠나 뉴욕 JFK에 도착하는 편도행 티켓. 편도? 당분간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가? 조정배의 애인에게는 듣지 못한 이야기다. 다시 조정배의 시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피범벅이 된 얼굴과 피로 젖은 셔츠와 바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제 누구에게 진실을 묻죠?”

그제야 평화를 찾은 조정배는 말이 없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거죠?”

만약 자살이 아니라 살인 사건이라면 용의자가 흔적을 지우고 도주하기 전에 추적을 시작해야 한다. 차라리 후자이길 바랐다. 그래야 전직 판사와 전직 검사가 살해당한 연쇄살인사건에 조정배 케이스를 포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결국 강희건도 더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오치상과 최준석 그리고 그 위에 누군가가 더 있어서 강희건을 보호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희주는 휴대폰을 꺼내며 요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여전히 여러 대의 드론이 찍을 만한 것을 찾아 후덥지근한 여름 하늘 위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희주는 고개를 돌려 요트 주위를 날고 있는 드론의 주인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 남자는 캠핑용 장비들을 거하게 세팅해 놓은 채 드론을 날리는 중이었다. 바닥에는 아이스박스가 있었고 남자는 아이스박스에서 새 맥주를 꺼내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 캔이 두 개쯤 있었다. 적어도 한 시간, 혹은 그보다 더 길게 이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드론을 날렸다면 남자의 드론에 뭔가 찍혔을 것이다. 조정배의 요트에 누가 올랐다가 내렸는지 정도는 찍혔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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