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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젠틀우먼 25화

25 미친 손

“난 오래전부터 그 선을 넘고 싶었어요. 그게 어제였던 것뿐이에요.”

by 김은주

무원은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어제는 하루가 너무 길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온몸이 부셔질 것처럼 뻐근하다.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그 소리가 너무 갑작스럽고 커서 몸을 움찔했다.

무원보다 먼저 희주의 손이 휴대폰을 집었다. 희주는 알람을 끄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이 맑다. 범인을 잡기 위해 해야 할 일로 맑아진 머릿속을 채웠다. 그게 가능하다는 게 조금 신기하다.

“기분은 좀 어때요?”

무원은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희주를 부드럽게 안고 여전히 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살인범의 손에 죽을 뻔한 경험을 한 기분? 아니면 후배랑 잔 기분?”

희주는 대답하며 자신을 감싸 안은 무원의 길고 강인한 팔뚝을 매만졌다. 그런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고작 하룻밤을 같이 보냈지만 이상할 정도로 친밀감이 솟아올랐다. 아주 오랜만에 꿈 없이 죽은 듯이 잔 덕분일까.

“어떤 쪽이든 상관없어요. 그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뿐.”

어젯밤 희주는 모든 걸 다 폭발하듯 터뜨렸다. 몸과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져 아무리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던 상처를 전부 드러냈다. 바로 무원 앞에서. 주웅과는 단계적으로 가능하던 일이 어째서 무원과는 한 번에 가능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감정이 그들의 지친 몸을 휘감고 돌았다. 둘 다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행이에요. 이렇게 내 품에 있어서. 죽지 않고 있어 줘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니. 조만간 실업자가 될 선배를 안고 있는 소감치고는 꽤나 달콤하게 들리네.”

희주는 몸을 돌려 무원을 마주 보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 그의 얼굴이 있다. 여전히 기름기 없이 담백한 눈빛. 하지만 생각보다 더 강하고 거친 구석이 있는 남자. 희주는 문득 무원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앞에서 작아지고 싶지 않았는데.”

“선배는 여전히 나한테 넘지 못할 만큼 커요. 선배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싶지도 않고 숨기고 싶지 않아요. 그냥 솔직하고 싶어요.”

무원의 손이 희주의 귓불을 지나 뒤통수로 향했다. 그리고 희주의 뒤통수를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둘 다 선을 넘었어. 남들이 알면 뭐라고 할까?”

“난 오래전부터 그 선을 넘고 싶었어요. 그게 어제였던 것뿐이에요.”

희주가 반박하려 입을 열자 무원은 희주의 입을 막았다. 피로 때문에 조금 거칠어진 입술끼리 부딪쳤다. 무원은 희미하게 남은 희주의 눈썹 위 흉터를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이 여자의 상처를 천천히 오래도록.


주웅은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희주를 응시했다. 어딘지 모를 생기가 느껴졌다. 여전히 블랙진에 티셔츠를 걸치고 러닝화를 신은 모습.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라 보였다. 그게 뭘까. 정답을 아는 데까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뒤따라 무원이 오피스텔에서 나왔다.

사랑하는 여자의 업무상 파트너이자 애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남자. 이성 문제를 가지고 연인을 볶아 대는 한심한 애인 역할은 딱 질색이다. 그럴 나이는 한참 지났다. 분노와 증오는 자기 자신을 더럽힐 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지금 당장 전화를 해서 정희주가 뭐라고 거짓말을 하는지 듣고 싶다. 하지만 무원과의 관계를 인정하며 당장 우리의 관계를 끝내자는 선언을 할까 봐 두려워서 차마 전화할 수 없다. 조금 더 젊었다면 가능했을까. 주웅은 무의미한 가정을 하며 자신을 괴롭혔다.

보조석에는 감시 카메라 영상을 분석한 리포트가 놓여 있다. 밤새 해외 논문과 사례를 찾아 작성했다. 그리고 작업을 마치자마자 희주의 오피스텔로 차를 몰았다. 이걸 핑계 삼아 후배 말고 자신을 선택하는 게 좋을 거라고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단둘이 커피라도 마시면서 쌓인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다.

“젠장.”

하지만 주웅은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저 두 사람이 오피스텔에서 나와 무원의 차를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희주의 미소를 응시했다. 그녀가 자신 앞에서는 저렇게 미소 지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뼈아픈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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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는 아이의 방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방에서 나는 냄새가 났다. 곰팡이, 책 먼지, 좀먹은 옷가지 냄새.

“뭐가 좀 나와야 할 텐데.”

희주는 푸른 라텍스 장갑을 낀 두 손을 쓰다듬었다.

“근데 아이 방 같지가 않네요. 아이가 그린 그림이나 놀이동산 같은 데서 찍은 사진 같은 거요. 일반적으로 아이 방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일상적인 흔적이 안 보여요.”

희주는 무원의 말에 방 전체를 다시 한번 보았다. 낡은 책상과 의자, 3단짜리 작은 서랍장만으로도 꽉 차는 좁은 방은 가운데 요를 하나 깔면 남은 공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서랍장 위에는 라면 박스 2개가 포개져 있었다.

“아버지라는 인간이 버린 것 같지는 않은데.”

“애초에 그 사람은 딸 방에 뭐가 있는지 관심도 없겠죠.”

무원이 책상 위를 살펴보는 동안, 희주는 서랍장 위에 놓인 라면 박스를 열었다. 박스 속에는 잡다한 것들이 들었었다. 학교에서 받은 조악한 상패와 각종 안내문, 빛바랜 인형이나 소라 껍데기 같은 것들. 다 쓴 크림통과 뚜껑만 남은 립스틱도 있었다. 여자아이가 소중하게 모아 놓았을 법한 잡동사니 속에도 사진이나 일기장 같은 건 없었다. 희주는 잡동사니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밑에 있던 두 번째 박스를 열었다.

“이것 봐.”

희주는 사진을 한 장 집어 들었다. 사진 속 여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정현이 휴대폰으로 보내 준 이인애의 주민등록상 사진이 바로 떠올랐다.

“이 여자야.”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면 박스 안에 우리가 찾는 게 들어 있었네요.”

희주는 박스를 바닥에 내렸다.

“아이에 대한 건 어쩌면 일부러 처분했을 수도 있어.”

“딸을 숨기고 싶었겠죠.”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를 지켜 줄 사람이 없으니까. 누군가 아이를 찾아내 괴롭힐까 봐 두려웠겠지. 게다가 여자아이니까. 차라리 아이의 흔적을 전부 지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거야.”

“뭔가를 일부러 처분했다면 일부러 남기는 것도 가능해요.”

“그래. 우린 후자를 기대해 보자고.”

두 사람은 박스 속 물건들을 전부 꺼내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오래전에 찍어 귀퉁이가 접히고 날아갔지만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여자와 수녀야.”

무원이 사진 속 여자들 뒤에 있는 건물 벽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로사리오 성 루시아 수녀회.”

“거기군.”

사진 속 이인애는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채 웃고 있었다. 말간 얼굴에 해사하고 수줍은 미소. 이인애의 곁에 선 수녀 또한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이인애보다 조금 위일 테지만, 뒤에 서서 이인애의 어깨를 감싸 쥐고 있는 수녀는 좀 더 명랑한 분위를 풍겼다. 닮은 구석은 없지만 마치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이 같았다.

“이것 좀 보세요.”

무원이 또 다른 사진을 한 장 내밀었다. 수녀원 내부 사무실 같은 공간에서 이인애 혼자 찍은 사진이었다. 소박한 뜨개 덮개를 덮은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는 성모상이 놓여 있고 이인애는 테이블에 한 팔을 올린 채 수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 글귀가 적힌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희주가 글귀를 소리 내어 읽었다.

“해바라기 센터 벽에도 동일한 문구가 적혀 있어요.”

“그리고 한 군데가 더 있어.”

그때 희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깜박 잊고 진동으로 바꾸지 않은 탓에 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마치 방금 머릿속을 스치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옳다고 동조라도 하듯 벨 소리는 절묘한 순간에 적막을 깨부쉈다. 그 적막을 깬 것은 주웅이었다.

“영상 분석 결과가 나와서.”

“지금 현장에 나와 있고 파트너도 같이 들어야 하니까 스피커폰으로 들을게.”

희주는 주웅과의 불편한 대화를 회피할 심산이었다. 게다가 어제 일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물론 이 모든 고민과 결정에 대해 아직 그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병명이 나왔어. 나 혼자 판단한 건 아냐. 사건과 접점이 없는 신경과 교수들 의견도 듣고 싶어서 외국에서 일하는 동료들에게만 보여 줬으니까 이 일에 대해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거야.”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근데 병명이 나왔다는 게 무슨 뜻이야? 쇼가 아니라는 거야?”

“미친 것도 아니고. 에어리언 핸드 신드롬. 외계인 손 증후군이라고 통상 번역해.”

“지금 외계인이라고 했어? 외계인?”

희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원을 바라보았다. 무원도 들어 본 적이 없기는 매한가지였기에 고개를 저었다.

“국내에서도 뇌졸중, 뇌진탕 혹은 알코올성 치매의 후유증으로 외계인 손 증후군이 학계에 보고된 적이 있어. 뇌 좌반구와 우반구를 연결하는 코퍼스 칼로섬이 파괴되거나 수술로 제거된 경우, 한쪽 팔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게 돼.”

희주는 잠시 대답하는 걸 잊고 주웅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듣고 있어?”

“물론이야. 그 코퍼스 칼로섬이라는 게 대체 뭐야?”

“뇌들보, 뇌량이라고도 해. 말 그대로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다리 같은 거야.”

“그 다리가 그게 끊어지면, 사람이 기절할 때까지 자기 목을 조를 수도 있단 거야?”

“이론적으로는. 쉽게 말해서 한쪽 팔에 다른 영혼이 들어간 것과 비슷해. 정상 손이 재킷 단추를 채우면 외계인 손이 그걸 푸는 거지. 정상 손에 오렌지를 쥐어 주면 이게 오렌지인지 알지만, 외계인 손에 쥐어 주면 그게 주사위인지 컵인지 구별하지 못해. 눈으로 보고 나서야 오렌지라는 걸 알게 되는 거야. 외계인 손이 입속으로 비린내 나는 생선을 강제로 욱여넣은 사례도 있어.”

“내 손과 손이 싸운다….”

희주는 조금 전까지 이인애의 사진을 들고 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뇌 어딘가가 망가져서 직접 목을 조르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런 셈이지. 최준석의 경우 왼손이 외계인 손이 되어 스스로를 공격하는 거였어. 오른손은 그 손을 뜯어말리려 했던 거고.”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뭔데?”

“방아쇠도 당길 수 있어? 자기 관자놀이에 총부리를 겨눈 상태에서.”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하지만 그냥 맨 손일 때보다는 좀 더 강력한 요인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심을 이겨야 하니까.”

“예를 들면, 약물 같은 것?”

“알코올일 수도 있고.”

희주는 요트로 조정배를 찾아갔을 때를 떠올렸다. 빈 와인 병. 그리고 부검 결과 나온 데이트 강간 약물 케타민. 조정배의 뇌들보 역시 제거되거나 파괴된 상태였을까.

“그건 그렇고, 따로 할 말이 좀 있어.”

주웅이 말했다.

“지금은 곤란해.”

“우린 이대로 끝이야?”

더는 무원과 같이 들을 수 없었다. 희주는 스피커폰 설정을 해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 말해.”

주웅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파트너와 가까운 사이야? 우리 사이보다?”

“아직은 모르겠어.”

“아직은… 곧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야?”

“전화로 할 얘기 아닌 것 같아. 어제 많은 일이 있어서 머리도 좀 아프고.”

“당신한테 일어났다는 그 많은 일에 대해 난 아는 게 하나도 없어. 그저 당신이 시키는 대로 밤새 영상 분석을 하고 결과만 갖다 바칠 뿐이지.”

희주는 얼굴을 찌푸렸다. 결국 희주가 선택할 일이었다.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오늘 아침에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두 사람을 봤어.”

순간적으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희주는 볼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도 어제 일어난 많은 일들 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나한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일이야?”

주웅을 탓할 일이 아니다. 애인이 언제고 연인의 집을 찾는 건 당연하니까. 아마도 직접 영상 분석 결과를 알리기 위해 오피스텔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두 사람 앞에 나서는 대신 신사답게 참았다.

“나중에 얘기할게. 전부. 지금은 일하는 중이야.”

“요즘 일하지 않을 때도 날 찾지 않잖아.”

주웅의 말투에 비열함도 분노도 없었다. 오히려 슬픈 기색이 느껴졌다.

“미안해. 시간을 좀 줘.”

“물론이야. 난 당신을 이길 수 없으니까. 당신 앞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배운 무수한 이론이 적용이 안 돼.”

무원이 또 다른 사진 한 장을 들어서 말없이 희주 앞에 내밀었다. 수녀도 이인애도 아닌 소녀를 찍은 사진이었다. 생일 초를 꽂은 케이크를 앞에 두고 환하게 웃는 하얀 얼굴의 아이. 흡사 작은 파랑새처럼 작은 체구에 파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미안해. 끊을게.”

희주는 전화를 끊고 사진을 응시했다.

“이 아이가.”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이인애의 딸이에요.”

희주는 사진 뒷면에 적힌 짧은 메모를 읽었다.

“사랑하는 우리 주희 열 번째 생일. 아이가 살아 있다면 삼십 대 초반 정도겠지.”

“통화하는 동안 수녀회 위치를 찾았어요. 간간이 봉사자들의 관련 글이 검색되는 걸 보면 여전히 운영되는 것 같은데. 여기서 1시간 정도 거리에요.”

“거기에 우리가 찾는 게 있을까?”

“두드려 봐야죠. 늘 그래왔듯이. 그리고 이거.”

무원은 호신용 최루액 스프레이를 희주에게 내밀었다.

“나 그 정도로 최악이야?”

희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선배 살해한 범인을 잡으러 다니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렇긴 해.”

“가지고 다닐 거죠?”

희주는 스프레이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내가 이걸 쓸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게 제가 바라는 일이에요.”


로사리오 성 루시아 수녀회는 붉은 벽돌로 지은 납작한 2층 건물이었다. 비와 바람을 맞으며 깎이고 바래진 세월의 흔적이 건물에 여실히 남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검박하지만 의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이었다. 따로 경비원은 없었다. 우연히 만난 봉사자에게 물어보니 2층에 원장 수녀실이 있다며 자신이 직접 원장 수녀에게 불러올 테니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사진 속 밝게 웃는 명랑한 수녀는 편안한 얼굴의 중년이 되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우리 봉사자한테 경찰에서 오셨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희주는 인사를 하고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무원도 신분증을 내밀었다.

“로사리오 성 루시아 수녀회 원장 수녀님이신가요?”

“네, 맞아요. 루시아라고 불러 주세요.”

수녀는 갑작스레 찾아온 두 형사를 보고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좁은 제 방보다는 저기 앉아서 대화를 나누면 어떨까요?”

루시아 수녀는 웃으며 건물 밖에 놓인 나무 벤치를 가리켰다. 벤치 뒤에는 커다란 참나무가 있어 제법 큰 그늘이 드리워진 상태였다.

희주와 루시아 수녀가 나란히 앉고 무원은 두 사람의 뒤에 섰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곳 분위기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저희 수녀회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희주는 손바닥을 비볐다. 손바닥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옆에 앉은 수녀를 어디까지 믿어도 될까. 루시아 수녀는 온화하고 차분했지만, 어딘지 모를 강단이 느껴졌다. 이 벽돌 건물만큼 긴 시간 동안 세월의 갖은 풍파를 견딘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이곳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이인애라는 분을 기억하시나요?”

희주는 챙겨 온 이인애의 사진을 내밀었다.

루시아 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레지나는 항상 성심을 다해 이곳 살림을 돌봐 주었어요. 저희는 레지나에게 큰 도움을 받았지요.”

“그럼 이후의 일에 대해서도….”

“네, 알고 있습니다. 주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안식을 되찾고 편안할 겁니다.”

“이분의 따님도 기억하시나요? 종종 같이 이곳에 왔다고 들었는데요. 당시 나이는 열 살 언저리로 알고 있습니다.”

“네, 총명한 아이였죠.”

“그분께서 돌아가시고 따님은 어떻게 되었나요?”

“왜 그걸 알고 싶으신 거죠?”

루시아 수녀가 희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눈 안에 상대의 진심과 목적이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뚫어져라 응시했다.

“최근 여러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 중에 그분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신 것으로 알고 있으나, 죽음의 이유를 정확히 조사하지 않고 서둘러 덮은 게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때문에 사망 당시 같이 있었을 거라 추정되는 따님을 찾아 그날 일에 대해 정확히 알아보려고 합니다.”

“전 그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아이가 평온한 삶을 살았길 바랄 뿐입니다.”

수녀는 고개를 돌렸다. 수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성모상이 있었다.

“아이의 친부는 아이가 죽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희한테 이곳, 원장 수녀님의 존재를 알려 준 것도 친부입니다.”

“루시아라고 편하게 불러 주세요.”

“네. 아이에 대해 뭔가 아시는 게 있다면.”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네?”

희주는 당황한 채 되물었다.

“만약 아이가 살아 있다면요. 살아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과거 일 때문에 아이를 찾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형사님들의 입장과 의문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제 좁은 소견으로 지나간 일을 들추는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가 있는 곳이 어디든, 설령 그것이 주님 곁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니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힘없고 가난한 여자가 가족을 위해 남의 집에서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근데 다들 서둘러 사고를 덮기에만 급급했죠.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미 가정폭력 때문에 고통을 당한 분들이 경찰을 믿었다가 또다시 폭력의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도 있습니다.”

희주는 밝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이인애를 가리켰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혀내야만, 죄를 지은 자들에게 죗값을 물을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처벌받지 않은 자들이 세상을 활보하고 있잖습니까? 그러니 만약 그날 일이나 딸에 대해 아시는 게 있다면 제발 말씀해 주세요.”

루시아 수녀는 고개를 저었다.


희주와 무원이 돌아가고 루시아 수녀는 원장 수녀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고 지루한 한여름 빛이 제법 물러간 시간이었다.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젊은 형사들은 오래전 판자를 덮고 누름돌로 막아 둔 우물 안으로 들여다보고자 했다. 수녀는 물이 말라 더 이상 우물이라고 부를 수 없는 구덩이의 밑바닥을 떠올렸다. 짐승의 시커먼 아가리처럼 음습하고 냄새나는 그곳. 그녀는 책상 뒤에 앉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냥 그대로 둬야 할까요. 아니면 그들을 허락할까요.”

루시아 수녀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어 습관처럼 성경을 가져다 펼쳤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한 번 더 그 구절을 되새기려는 순간, 노크도 없이 원장 수녀실 문이 열렸다. 루시아 수녀는 방문자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읽고 있던 구절보다 조금 더 뒤에 있는 구절이 잘 보이도록 펼쳐 놓은 채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어쩌면 또다시 젊은 형사들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손이 떨리는 것 같아 다른 손으로 떨리는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봉사자들이 오늘따라 경찰이 자주 찾아온다며 원장 수녀가 지금 어디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 주더군.”

오치상은 원장실 문을 닫으며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잠갔다.

“다시 찾아올 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다시 이 지겨운 곳을 찾을 일이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 다시 왔네. 아까 왔다 간 형사들 말이야.”

“오래전 일을 묻기에 모른다고 하니까 그냥 갔습니다. 할 말도, 아는 것도 없으니까요.”

루시아 수녀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랬어? 오래전 일 뭘 물었는데?”

오치상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죽은 딸에 대해 묻기에 죽은 애를 왜 나한테서 찾느냐고 했죠. 그게 다예요.”

“근데 말이야,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닐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루시아 수녀는 몸이 휘청하려는 것을 가까스로 견뎠다.

“왜? 조금 놀랐어? 그 애 시신을 본 사람이 없잖아. 사실 나도 못 봤거든.”

오치상은 천천히 책상 뒤에 굳은 채 서 있는 루시아 수녀에게 다가갔다. 루시아 수녀는 고개를 숙여 아까 펼쳐 놓은 성경 구절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사실 애가 뭐가 중요해. 돈이 중요하지. 이인애가 얼마나 위험한 돈을 훔쳤는지 우리 수녀님은 모를 거야. 근데 그 여자가 자기 남편한테 돈 얘길 안 했으면 도대체 누구한테 그 얘길 했겠냐는 말이야.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세상에 달린 끈이라고는 남편 하나뿐인데, 그 남편이 등신 같다면 말이야. 응? 별장에 출근하지 않는 날은 종일 이 재미없는 수녀원에 붙박이가 되는 여자라면 말이야. 참고로 난 솔직한 사람이 좋아. 결국에는 솔직한 게 제일 낫잖아.”

두 사람의 간격이 점점 좁혀졌다.

“백번 천 번을 물어도 난 할 말 없어요.”

오치상은 실눈을 뜨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오치상은 재빨리 손을 뻗어 수녀의 신성한 검은 베일을 움켜쥐고 거칠게 당겼다. 루시아 수녀는 오치상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치상은 베일을 벗기고 늙은 수녀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아까 원장 수녀실에 들어올 때부터 오른손에 들고 있던 깜찍한 크기의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빼 들어 수녀의 목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조금 급하게 가져다 대는 바람에 목을 찔러 피가 배어 나왔다.

루시아 수녀는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해가 떨어지고 있는 창밖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려 애썼다. 오치상은 코웃음을 치며 왼손으로 커튼을 잡아당겼다.

“간단해. 알고 있는 걸 말하는 거야. 1분도 안 걸릴 거야. 돈 가방 어디에 있어? 이인애가 분명 말해 줬을 텐데. 기억을 잘 떠올려 봐.”

“나는 몰라.”

“물론 모를 테지. 하지만 기억해 봐.”

루시아 수녀는 입을 다물었다.

오치상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루시아 수녀는 눈을 꼬옥 감았다가 떴다. 어떤 결심이 섰다는 듯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오치상의 눈을 응시했다.

“너 때문에 죽은 죄 없는 여자들과 주님이 네 놈을 용서하지 않을 거다.”

“정말 무례하군. 그게 수녀 입에서 나올 말인가?”

오치상은 루시아 수녀의 목에 댄 칼에 힘을 주었다. 선명하게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수녀복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말이야. 요즘 이상한 일이 있어. 예전에 여자들이랑 재미 좀 본 내 친구들이 죽어 나가는 거야. 마치 누가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그날 일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없는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아차차, 그날 일을 아는 사람이 여기 또 하나 있긴 하네.”

루시아 수녀는 오치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였다.

“이인애가 너한테 뭘 남겼어? 죽기 전에 복수해 달래? 대체 돈은 어디다 숨긴 거야? 이 건물을 통째로 불에 태워야 입을 열거야?”

루시아 수녀는 이미 목을 찌르고 있는 칼날을 향해 체중을 실었다. 칼날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피가 오치상의 손을 적셨다.

“안 될 일이지.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 얼굴을 쉽게 영접하게 내가 둘 것 같아?”


오치상은 타고 온 SUV의 트렁크를 열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뭐야?”

강희건이 깜짝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시아 수녀는 팔과 다리를 청테이프에 묶인 채 트렁크 바닥에 누워 있었다. 양쪽 눈가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코뼈는 부러진 상태였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어요. 오히려 늦은 바람에 들개들한테 냄새만 풍겼죠.”

오치상이 말했다.

강희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처리할 일이 많군.”

“그래도 할 일은 제때 해야죠.”

강희건은 잡초를 베던 낫을 들고 이쪽을 보고 서 있는 별장 관리인 김재화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김재화가 다가오자 강희건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오치상은 감자가 담긴 자루를 꺼내듯 거친 손놀림으로 수녀를 끌어내는 김재화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날 말이야, 여자애.”

김재화는 말없이 돌아보았다.

“확실하게 처리한 거 맞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한 게 좋잖아.”

김재화는 잠시 감정을 드러내려다가 순식간에 건조한 얼굴로 돌아왔다. 오치상은 자신을 빤히 보는 김재화의 얼굴을 응시했다. 개처럼 부림을 당하고 있지만 실은 늑대에 가까운 사내. 잡부답지 않은 신중함과 반듯함이 늘 마음에 늘지 않았다.

“내가 묻잖아.”

모든 걸 녹일 것만 같은 강렬한 햇빛이 두 남자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오치상은 땀이 흐르는 콧잔등을 쓸어 내렸다. 김재화는 피가 묻은 검은 수녀복 차림의 중년 여자를 끌어내 땀으로 번들거리는 어깨 위에 얹었다.

“정 궁금하면 저수지를 뒤지던가. 그 안에 모든 게 다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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