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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젠틀우먼 29화

29 패닉, 룸

“네 엄마가 죽은 건 너 때문이야.”

by 김은주

세하가 휘두른 메스가 왼손 손등을 스쳤다. 메스는 살덩이를 버터처럼 자르고도 남을 만큼 잘 벼려진 상태였다. 다행히 메스는 그저 스치기만 했다. 선홍빛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넌 미쳤어.”

희주는 숨을 들이마셨다. 당장 밖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들이켜고 싶었다.

“그래. 당신은 돌았고. 성격파탄자에 사회 부적응자의 대표잖아.”

“돌았으니까 네가 여기 나타날 걸 예상할 수 있었겠지. 나쁘지 않아. 좀 돌은 채로 형사 생활을 하는 거.”

세하는 쿡쿡 웃었다.

“난 당신이 좋아. 그 고집스러움과 경주마 같은 면이 마음에 들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거나 말거나 앞만 보고 달릴 테니까. 우린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아.”

“알아주니 고맙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온 건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테고.”

세하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여기서 죽으면 당분간은 아무도 못 찾겠군.”

희주의 등에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더 이상 아무도 죽지 않을 거야.”

세하는 천천히 희주 쪽으로 걸어갔다. 희주는 뒷걸음질을 쳤다. 아직 이 공간에 대한 파악이 덜 됐다. 예상보다 세하가 더 빨리 나타났다. 손등에서 쉬지 않고 피가 떨어져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을 가장 잘 아는 건 당신이니까, 이쯤 되면 내 일의 목적과 의미 또한 가장 잘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희주는 재빨리 손등을 닦았다.

“살인자가 되기 위해서 의사가 된 거 말이야?”

“내 노력을 깎아내리지 마. 동양인 고아 여자아이가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남의 두개골을 열고 장난질한 기분이 어때?”

“조금 신중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희주는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세하를 불필요하게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무척 정교한 시술이야. 뇌들보를 제거한다고 해서 전부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거든.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때에 제대로 미친 손이 활약하는 게 중요하지.”

“너희 어머니는 똑똑한 딸을 낳았다고 좋아했을 텐데, 지금 이런 널 보고도 똑같이 생각할지 궁금하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아는데 그만둬. 내가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메스를 떨어뜨리길 바라는 거야?”

“…인정할게.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었어.”

희주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 인간들은 더 심한 일을 당해도 싸. 난 그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이 별장에서 여자들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똑똑히 봤어. 당신도 그걸 봤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우리는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렸을 테니까. 아마 우린 끝내주는 한편이 되었을 걸? 우린 불친절한 세상에 엿을 먹이는 친절한 악당이 되었겠지.”

“그래도 이건 아냐.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해야 해. 이렇게 끝이 나면 대중들은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해. 그러면 똑같은 일이 또 반복될 거야.”

“아니. 교훈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럼 이 세상이 엉망이 된 게 교훈이 없어서라는 거야? 그게 아니야. 인간은 원래 교훈 같은 걸 얻지 못하는 우둔한 존재일 뿐이야. 자기 일이 아니면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고 무시해 버린다고. 중요한 건 교훈이 아니라, 본보기야.”

“넌 망가졌어. 정상이 아니야.”

“나도 알아. 하지만 그보다, 엄마가 강간당하는 걸 본 열 살짜리가 멀쩡히 살았다는 게 더 대단하지 않아?”

희주는 입을 다물었다.

“난 수녀원에 숨어서 살다가 1년쯤 뒤에 혼자 미국엘 갔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혼자 살았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나 혼자 깨우치고 배웠어. 엄마처럼 죽지는 않았지만, 세상에 버림받은 건 확실했지.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았어. 죽는 건 너무 쉬운 일 같았으니까.”

“결국 널 살린 건, 선한 마음이야. 루시아 수녀는 널 지키려 애썼어.”

그 순간, 세하는 복도 왼쪽에 있는 문을 열고 희주를 밀었다. 거긴 집주인도 들어가지 않는 잡동사니 창고였다. 업소용 대형 세탁기와 건조기, 각종 저장식품이 들어 있는 박스와 포대 자루들이 있었다. 그리고 8칸 남짓의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희주는 계단으로 굴러떨어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통증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발목이 부러진 것 같았다. 세하는 바닥에서 움찔거리는 희주를 내려다보았다.

“오만했어.”

희주는 약한 뇌진탕 때문에 머리를 들 수 없었다.

“날 그깟 말로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그만둬.”

“뭐라고?”

“그만두라고.”

“아직도 착한 척이야? 이젠 좀 솔직해져. 아기를 때려서 결국 죽게 만든 남자 말이야. 잊지 않았잖아? 그 남자가 출소할 날만 이를 갈면서 기다리고 있잖아? 당신도 보는 눈이 없고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 남자를 죽이고 싶잖아.”

“모든 사람이 너처럼 복수심 때문에 미쳐 날뛰는 건 아니야.”

“정말이야? 정말 그 남자가 기도를 열심히 하는 모범수가 되어 조기 출소해도 괜찮아? 그래서 다시 또 순진한 여자 하나를 꾀어서 아기를 갖게 만들고, 또 그 아이가 시끄럽게 운다고 리모컨으로 말랑말랑한 아기 머리를 내리쳐도 돼? 아기 머리통이 얼마나 부드럽고 말랑한지 당신은 모르지? 난 알아. 손가락으로 조금만 힘을 주어도 쑤욱 들어갈 만큼 연하다고. 정말 괜찮아? 복수하고 싶지 않아? 자신을 속이지 말아요, 경위님.”

“인정해. 그런 생각을 안 했다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 전부 생각한 대로 행동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

“나처럼 되겠지. 나처럼 생각한 대로, 계획대로 죽어야 할 인간들을 차례로 죽이면서 이 세상을 조금은 살 만한 곳으로 만들겠지.”

“강희건을 도대체 어쩔 셈이야?”

“강희건은 애 딸린 가정부들을 좋아했어. 그녀들은 독했어. 그게 그를 만족시켰어. 아름다운 여배우나 모델들은 그런 면이 없었어. 그녀들은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어. 하지만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독했어. 강희건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 그 짜릿함.”

희주는 정신을 차렸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통증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발목은 부러지지 않았다. 희주는 저만치 굴러간 리볼버를 몰래 다시 쥐었다.

“그런 여자들이 처절하게 몰락할 때의 짜릿함은 특별했을 거야. 강희건은 거기에 중독됐어. 그리고 우리 엄마는, 다른 어떤 여자보다 독했어. 엄마는 방음 장치와 각종 변태적인 도구들이 완벽히 갖춰진 지하실에서 매일 지옥을 봤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았어. 강희건은 엄마를 농락하고 협박했어. 만약 여기서 일어난 일을 발설할 경우 나한테도 똑같은 짓을 하겠다고 했어. 아직도 그가 걱정돼?”

“하지만 네 어머니는 죽었어.”

희주는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세하는 계단 중간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둘의 거리는 고작 2미터 남짓.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그래. 결국은 참지 못하고 도망쳤거든.”

“이제 그만해 줘.”

희주는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아니. 디저트가 남았어. 난 긴 디너 중에 디저트를 가장 좋아해.”

“제발….”

“그가 살려 달라고 비명을 내지르는 걸 듣고 싶지 않아?”

희주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세하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희주의 목에 팔을 휘어 감았다. 숨이 턱 막혀 손에 쥔 리볼버를 떨어뜨리고 목을 부러뜨릴 듯이 옥죄는 팔뚝을 움켜쥐었다.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죽을 뻔한 지난 일이 떠올랐다. 상대는 더욱 강하게 목을 졸랐다. 극도의 공포심에 다리가 풀리려 했다. 본능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때 최루액 스프레이라도 있었다면.

희주는 간신히 세하를 응시했다. 도대체 누구인지 세하가 알려 주길 바랐다. 그 순간, 목덜미가 따끔해졌다. 주삿바늘을 타고 정체불명의 약물이 혈액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목을 조이던 팔뚝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술에 취한 것처럼 온 몸에 힘이 풀렸다. 두툼한 손이 리볼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계단에 서 있는 세하를 겨누었다.

“감동적인 이야기 잘 들었어.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군.”

희주는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취제겠지. 이 정도로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는 거라면 꽤나 고용량 주사였겠지. 여기서 이렇게 쓰러져선 안 돼. 그러면 우리 둘 다 위험해지는 거야….

“하지만 조금은 뿌듯하군. 내 별장이 아름다운 두 여자의 만남이 장으로 활용된 것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겠지만, 난 이쪽과 할 일이 있어서.”

강희건은 계단 위로 올라갔다.


세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강희건의 스케줄은 완벽하게 파악했다.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면 별장으로 개인 트레이너를 불러 한바탕 땀을 빼고 마사지를 받고 잠을 자는 게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오늘도 개인 트레이너가 약속한 시간에 방문했고 30분 전 별장을 나갔다.

세하가 선택한 시간은 강희건이 무방비 상태로 달콤한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다. 별장 안에 사람이라고는 강희건뿐이고, 별장 밖에서는 김재화가 휴식을 취하는 주인을 위해 사냥개처럼 지키고 있을 시간이었다. 물론 김재화는 지금쯤 세하의 지시대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을 테지만.

“깜짝 선물은 언제나 환영이야. 난 아직 애들처럼 선물을 좋아해. 그중에서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받는 선물만 한 게 없지. 오치상이 수녀를 데려왔을 때도 즐거웠어. 오늘은 그날보다 열 배 정도 더 기쁘군.”

세하는 계단을 다 올라간 다음 출구를 향해 몸을 틀었다. 강희건이 고개를 저었다.

“그쪽이 아니지.”

세하는 이를 악물고 또 다른 지하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옳지. 우리가 재미를 볼 동안 용감한 형사님은 여기서 자게 두자고.”

강희건은 창고 문을 닫은 다음 잠갔다. 그리고 리볼버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건 좀 유치하잖아?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난 좀 전통적인 걸 선호하는 편이라.”

강희건은 복도에 세워 놓았던 낫을 집어 들었다.

“내 충직한 집사가 항상 잘 갈아 두는 편이라 아주 날카로워.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그 가소로운 메스는 바닥에 내려놔. 물론 들고 있고 싶겠지만, 내가 그게 거슬려서 이 낫으로 너의 그 연한 뱃가죽을 한 번에 그어 버리면 곤란하잖아. 게다가 네가 발 딛고 서 있는 대리석은 정말 비싼 거야. 대리석을 더럽히긴 싫어.”

세하는 강희건을 노려보면서 메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계속 걸어. 아주 천천히. 손님이 왔으니 내가 가장 아끼는 공간에서 특별한 대접을 해야겠지?”

세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강희건의 특별한 지하실. 완벽한 방음 시설과 갖은 도구들이 갖춰진 곳. 은색 스테인리스 수술대와 다양한 용도의 메스들. 그리고 자물쇠가 달린 수갑. 엄마의 손목이 항상 붉고 푸르게 멍들었던 이유.

“천재 의사의 방문이라. 정말 상상도 못 했어. 그리고 그 의사가 나의 오래전 가정부 이인애의 딸이라니. 정말 짜릿해. 모처럼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군. 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에게 묘하게 호감이 갔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강희건과 마주하는 장면을 수만 번 상상했는데도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약자의 고통을 에너지로 삼아 더욱 잔인해지는 그에게 먹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세하는 최대한 흔들린 없이 몸을 똑바로 서 있으려 애썼다.

“널 좋아하는 형사는 지금 창고에서 쿨쿨 자고 있고, 나의 충직한 집사는 보이지 않지. 아, 너의 충직한 집사던가?”

세하의 등 뒤로 지하실 문손잡이가 느껴졌다. 차가운 쇠가 손에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김재화는 오랫동안 날 위해 여자들을 처리했어.”

강희건은 슬쩍 낫을 들었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한 번 보라는 듯.

“난 그를 위해 부지런히 서핑 보드를 사서 날랐지. 그거 꽤 비싸. 그러면 김재화가 알아서 모든 걸 깔끔하게 처리했어. 난 그를 믿었어. 난 원래 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데, 내 충직한 개만큼은 정말 믿었다니까.”

강희건은 보이지 않는 김재화를 향해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 유머러스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은애한테 흑심을 품고 있는 건 미처 몰랐지. 깜찍한 노인네 같으니! 세상일이라는 게 항상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그건 상관없어. 하지만 그가 널 위해 비상벨 전원을 꺼 버린 것도 모자라 박살 낸 걸 보니까 배신감이 밀려오더군. 그 문제는 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 해결할 생각이야.”

“당신은 괴물이야.”

“나도 알아. 그런데 말이야.”

강희건은 세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도 괴물이야.”

“당신을… 죽일 거야. 메스로 한 조각씩 잘라 내면서 아주 천천히.”

“그거 아주 재미있겠네. 역시 우린 취향이 비슷한 것 같아. 네 이야기만 들었을 뿐인데 방금 아랫도리가 묵직해졌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해. 당신 같은 인간들 때문에 세상은 지옥이 돼.”

“오, 가련한 작은 아이! 넌 아직 세상을 몰라.”

강희건은 싱긋 웃으면서 낫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의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지옥은, 항상 네 머릿속에 있어. 앞으로 지하실에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상상해 봐. 약속하지. 아주 긴 시간이 될 거야.”

“당신이나 해. 조만간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경험하게 될 테니까.”

“아주 기대되는군. 역시 이인애 딸다워. 그년도 말할 힘이 있을 땐 한 마디 지지 않고 대꾸했거든. 그럼 난 더 흥분됐고.”

“그래?”

세하는 이렇게 대꾸하고 재빨리 주저앉았다.

그 순간, 강희건 뒤에 있던 김재화가 골프채를 휘둘렀다. 강희건은 머리를 맞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강희건은 신음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바닥에 쭉 뻗었다.

“대화 즐거웠어. 좀 지루했지만.”

세하는 엎어진 강희건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희주는 눈을 뜨려고 애썼다. 마취 주사의 효과가 점점 물러나는 중이었다. 고개를 들어 계단 위를 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도대체 불을 켜는 스위치는 어디에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보다 좁은 창고에 갇혀있는 것이 더 괴로웠다. 마치 작은 관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온몸이 옥죄어 들고 혀가 목구멍 안으로 말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항상 비상약을 넣어 다니는 바지 뒷주머니를 손으로 더듬었다. 약은 없다. 패닉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면 아무도 구할 수 없다.

머리가 빙빙 돌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강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집중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휘청거리지 않게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별장 관리인? 오치상? 강희건? 누구라도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리고 그게 누구라도 해도 박세하를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희주는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 목록에서 무원을 찾았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하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밖으로 향하는 작은 창이나 환풍구라도 있길 바랐다.

“젠장….”

조금 전에 또 한 번 죽을 뻔했다는 사실보다 전화가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 머릿속 톱니바퀴를 최대한 빨리 굴리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나무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진 않았다. 예상대로 문은 잠겨 있었다. 리볼버도 없다. 희주는 다시 내려가 야구방망이나 무기로 쓸 만한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철제 바구니에 가득 쌓인 세탁물과 출렁이는 세제 더미, 통조림 따위뿐.

희주는 다시 계단 위로 올라와서 최대한 문 가까이 붙어 섰다. 문에 귀를 대고 밖의 소리를 들어 보려 집중했다. 밖은 고요했다. 이미 모두 떠난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제발 딱 한 번만.”

더는 참기 힘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답답해졌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피가 말라붙은 왼손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휴대폰을 떨어트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인정할 때가 온 것 같다.

“…선배!”

희주는 놀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선배예요? 괜찮아요?”

“여기 별장이야.”

목이 멘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별장 뒤쪽 관리인 출입문이 열려 있어.”

“괜찮아요? 무사한 거죠?”

“난 괜찮아. 출입문으로 들어와서 왼쪽이야. 지하실에 갇혔어. 별장 안에 박세하 말고 누군지 모르는 인간이 있어. 그 인간한테 당했어.”

“당해요?”

“마취 주사 때문에 기절했어. 지금은 깨어났고. 그것 말고는 괜찮아. 이 빌어먹을 지하실에 갇혔다는 것 빼고는.”

“절대 나오지 말고 기다려요.”

“어차피 나갈 수도 없어. 밖에서 문을 잠갔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갇혀 있는 동안 박세하가 강희건을 죽일 수도 있어.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고.”

“그래도 혼자서는 안 돼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약도 없는데.”

“다친 데는요?”

“괜찮아. 그보다 빨리 와 줘. 사이렌도 헬기도 안 돼. 혼자 와.”

“죽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빨리 오기나 해. 숨이 막혀 미칠 지경이니까.”

“견뎌요. 꼭 구하러 갈 거니까. 선배를 구하고 나면, 절대로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강희건은 눈꺼풀을 한참 떨었다. 그러더니 눈을 뜨고는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손과 발과 몸통은 자신이 애용하는 스테인리스 수술대 위에 묶여 있었다. 직접 주문한 가죽 벨트가 온몸을 압박했다. 세하는 그의 목에 메스를 들이댔다.

강희건은 눈동자를 위로 굴려 자신의 머리맡에 서 있는 세하를 보려 애썼다. 하지만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았다. 뇌진탕인 것 같았다.

“날 어쩌려는 거야?”

“좀 기다려요. 지금 설명하려던 참이니까.”

강희건은 신음 소리를 냈다. 가죽 벨트가 가슴을 너무 세게 조여서 숨쉬기가 불편했다.

“거기 누워 있는 기분이 궁금하네요.”

“나쁘지 않아.”

“그래요?”

세하는 강희건의 목에 댄 메스를 슬쩍 눌렀다. 붉은 피 한 줄기가 가늘게 흘렀다. 강희건은 미동도 없었다.

“이런 다정한 시간을 꽤 좋아했죠.”

“즐기는 편이었지.”

“지금도 예전처럼 즐기는 마음이 드나요? 한번 말해 봐요. 1시간 전에 날 죽이지 못한 걸 후회하나요?”

“우리 거래를 하지.”

“거래?”

“너에게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주겠어.”

강희건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빛났다. 투자자들을 설득하고 여자를 매혹시키는, 항상 성공을 보장하는 눈빛.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세요.”

“네 아버지가 되어 주겠어. 네가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위대한 아버지. 내가 가진 걸 너에게 전부 다 주겠어.”

“과연 개자식의 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네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널 사랑하겠어. 물론 네 엄마 역시 내 방식대로 사랑했어. 물론 좀 폭력적인 방식이긴 했지만. 그 덕에 네가 세계 최고의 의사가 된 걸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강희건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혀를 놀렸다.

“네 엄마가 죽은 건 너 때문이야.”

세하는 강희건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널 버리고 별장을 나갔으면 저수지에 처박히지 않았을 텐데. 네 엄마는 내가 널 데리고 있다는 걸 알고 다시 이곳으로 왔어. 제 발로. 그래서 죽은 거야.”

세하는 챙겨 온 수술 도구들을 늘어놓았다. 가장 중요한 브레인 임플란트 칩은 멸균 캡슐에 넣어 가져왔다.

“네 엄마 목숨값으로 잘 먹고 잘산 기분이 어때? 넌 네가 그토록 혐오하는 네 부친과 다를 바가 없어.”

세하는 강희건의 입에 말아 놓은 붕대를 거칠게 집어넣고 테이프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메스로 강희건의 두피를 단숨에 그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밀려오자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눈알이 빠져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가죽 벨트로 묶인 몸이 요동을 쳤다.

“아직 쇼크에 빠지진 말아 줘.”

세하는 김재화가 미리 가져다 놓은 수술용 소형 전기톱을 집어 들었다. 주로 외과 수술이나 뇌수술에 사용되는 모델이었다.

“이걸로 두개골을 절개할 거야. 물론 아까처럼 마취는 없어. 당신이 그런 호사를 누릴 자격은 없잖아?”

강희건 입 안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아마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를 지나치게 세게 깨문 탓인 것 같았다.

세하는 브레인 임플란트 칩이 담긴 멸균 캡슐을 강희건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보여? 당신이 좋아한다는 깜짝 선물이야. 앞으로는 병원에 가는 게 쉽지 않을 거야. 치과 의자에 앉기만 해도 오늘 일이 떠오를 테니까.”

강희건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보통 사이코패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트라우마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혀 아니야. 당신 같은 사이코패스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 당신도 감정이 있고 자기보호본능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 있어. 그걸 내가 당신을 통해 이 세상에 증명해 보이려고 해. 수술 뒤에는 완벽하게 봉합할 테니 걱정 마.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 전문의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돼.”

세하는 전원이 꺼진 전기톱을 강희건의 두개골 위에 갖다 댔다.

“내가 가져온 선물은 그거야.”

세하는 고개를 숙여 눈물을 줄줄 흘리는 강희건의 붉은 눈을 응시했다.

“트라우마.”

강희건은 식도로 넘어가려는 붕대를 뱉어 내려 애를 썼다.

“탈출구가 없는 생지옥이 뭔지 이번 기회에 느껴 보면 좋겠어.”

세하는 캡슐에 든 브레인 임플란트 칩을 강희건의 동공 위로 가져갔다.

“당신을 위해 브레인 임플란트 칩에 가장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의 기억을 넣었어. 고문, 성폭력, 가정폭력, 집단 괴롭힘. 아, 그리고 돼지를 도축하다가 죄책감에 자살한 도축업자의 기억도 넣었어. 이걸 당신 뇌에 삽입하면 당신은 이 모든 걸 전부 자기 기억이라고 믿게 될 거야. 뇌를 속이는 거지. 가해자일 때는 몰랐던 피해자의 고통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거야. 숨 쉬고 있는 동안, 단 한 순간도 편안한 기분을 느끼지 못할 거야. 트라우마라는 건 그런 거니까. 그래도 절대 자살하지 말고 버텨 봐. 사이코패스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사니까.”

세하는 전기톱 전원을 켰다.

강희건의 눈이 더욱 커졌다. 이젠 정말 튀어나올 지경으로 도드라졌다. 붕대가 밀려 나오면서 피와 깨진 이가 함께 밀려 나왔다.

“박세하! 그만둬!”

세하는 얼어붙었다.

“이제 그만해.”

희주는 두 손을 들고 세하에게 다가갔다.

“난 지금 맨손이야. 난 그저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진정하고 그거 내려놔.”

세하는 전기톱을 내려놓고 메스를 강희건에 목에 겨눈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형사야. 이 쓰레기를 살리려고 목숨을 걸다니.”

“아냐. 난 널 살리려는 거야. 그 인간은 죗값을 치를 거야. 꼭 그렇게 만들 거야. 그러니까 죽일 필요 없어.”

“벌은 내가 내려.”

“우린 그런 권한이 없어. 그건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할 거야.”

세하는 메스로 반쯤 벗겨진 강희건의 두피를 헤집었다. 강희건이 고통과 쇼크 때문에 몸을 벌벌 떨었다.

희주가 말했다.

“죽이는 건 아주 쉬운 복수야.”

“맞아. 그래서 죽이지 않을 거야.”

멀리서 사이렌이 울렸다. 세하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희주를 응시했다. 그리고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했다.

“…죽이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정말이야?”

“불쌍한 우리 엄마를 걸고. 내 방식대로 처리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지금 당장 이 인간의 목을 긋고 내 목도 그을 거야. 그럼 당신도 나도 이 인간도 허무해지지. 그걸 원해?”

“아니, 제발.”

“당신 파트너 생각은 당신과 다른 것 같은데.”

희주는 고개를 돌렸다. 무원이 세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무원, 총 내려.”

“선배, 이리 나와요.”

“총 내리고 저리 가.”

무원은 황망한 표정으로 희주와 세하를 번갈아 보았다.

“선배!”

“내 말 안 들려? 당장 나가라고!”

무원은 세하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물러났다.

“냄새보다 더 효과적으로 과거를 되살려 주는 기억은 없다는 말 들어 본 적 있어? 『롤리타』를 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한 말이야. 사람들은 냄새로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잖아. 이곳에서 나는 피 냄새, 고통의 냄새, 각종 분비물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여기서 이 냄새를 맡으며 공포에 질렸을까….”

세하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우리 엄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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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는 자신도 모르게 세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치 곧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너도 무서웠겠지. 겨우 열 살이었으니까.”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인 세하가 희주를 바라보았다.

“정말 미안해. 널 너무 늦게 찾아와서.”

“시간이 별로 없어. 아직 선물이 남았거든. 나중에 내가 이 개자식한테 어떤 선물을 줬는지 알게 되면 당신도 내 마음을 이해할 거야. 어쩌면 그 선물을 아기를 때린 남자에게 주고 싶어서 날 찾고 싶을지도 모르고.”

희주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세하를 두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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