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은 왜 중요할까요.
<서울메이드> ISSUE 16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마음의 빗장을 여는 나만의 시그널
남녀를 불문하고 관계에 있어서 마음의 빗장을 여는 나만의 시그널 중 하나는 집으로 초대해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이다. 사적 공간에 타인의 출입을 허용하는 것은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모든 항목들을 나열할 수 없기에 그 시작과 끝에 대해서만 말해보자면 시작은 청소요 끝은 상차림 되시겠다. 일단 비우는 것으로 시작해서 채우는 걸로 마치는 셈이다.
비우는 방식은 아마 대부분이 비슷할 것으로 생각한다. 청소는 청결이라는 단 하나의 원칙만을 가지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싸움이기 때문에 빈도와 숙련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결국 최종적으로는 모두 비슷한 그림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우는 것은 호스트의 사적 취향이나 모임의 컨셉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로 구현될 수밖에 없다.
'최고의 술자리'를 위한 빌드업 과정의 마지막 단계
채우는 과정의 출발점은 단연 술과 음식을 고르는 일이다.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먹을 것인가가 정해지고 나면 테이블 웨어, 식기, 커트러리, 조명, 음악, 대화 주제같이 부차적인 요소를 설정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내적 플랜을 세우고 있으면 간질간질한 설렘이 발끝을 스친다.
하지만 이 중에서 내가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심사숙고하는 부분은 바로 술잔을 고르는 지점이다. 이벤트에 적합한 술잔을 고르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술자리’를 위한 빌드업 과정의 마지막 단계이자 술자리를 제안한 호스트라면 응당 보여줘야 하는 책임감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이 잔에 어떤 술을 담아 마시고 싶은가
내겐 몇 개의 성능 좋은 음주유발잔이 있다. 술잔은 딱히 애장품이랄 게 없는 내가 유일하게 욕심을 갖고 사 모으는 물건 중 하나인데 마음에 드는 잔을 고르는 나만의 몇 가지 팁이 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해자면 우선 하나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동원한 자문자답 방식이다. ‘이 잔에 어떤 술을 담아 마시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5초 안에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방식의 장점은 술잔이 아닌 여러 종류의 잔들까지도 (가령 찻잔, 물 잔, 커피잔 등) 술잔으로서의 쓰임새를 가늠해볼 만한 생각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 있다. 사실 애초부터 술을 담기 위해서 탄생한 잔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잔의 고유 용도만 생각하느라 술잔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중고 장터에서 주둥이가 좁은 사기 찻잔을 구매해 청주 전용잔으로 애용하고 있다.
같은 모양의 술잔은 절대로 2개 이상 갖추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는 집에 있는 다른 잔들과의 심미적 호환성을 체크하는 것이다. 사실 잔에 대한 소비 자체를 중단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 꾸준히 각기 다른 태생의 잔들이 하나 둘 합류하게 될 텐데 이때 저마다의 개성은 인정해 주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멋대로 존재감을 과시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선택에 대한 나만의 구체적인 기준을 세워서 한 테이블에 모였을 때 각기 다른 외형이라도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 잔들로 구성하는 것이 좋다.
이를테면 내게는 같은 모양의 술잔은 절대로 2개 이상 갖추지 않는다는 룰이 있는데 통일성에서 오는 지루함이 싫기도 하거니와 세트로 구성되어 있는 잔들은 그렇지 않은 잔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압감이 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물 잔은 최대한 통일하는 편이 경험상 깔끔하다.)
중심에는 언제나 술잔이 있었다.
아무쪼록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틈틈이 사 모으다 보니 나름 모든 주종을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의 잔 라인업을 갖추게 되었다. 잔을 구매한 경로와 시기도 각각 다르다 보니 잔에 얽힌 이야기들도 제법 많아져 이제는 술자리에서 한 꼭지 정도는 흥미롭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안줏거리로도 쓰임새가 생겼다. 잔에 대한 사연들을 풀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혼자 여행 떠나서 샀던 잔에 대해 말하려면 왜 혼자 여행을 떠났는지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술잔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공간에서 가장 나다운 이야기를 하게끔 도와주는 존재 같은 것이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나의 공간에 찾아왔었고 또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술잔이 있었다. 지금도 조용히 찬장에 진열된 잔들을 보고 있자면 차분히 그 잔을 쥐고서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던 사람들의 면면이 떠오른다. 술잔 덕분이다. 비우는 것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채울 줄도 안다. 마침 곧 이사를 앞두고 있다. 새로 가는 집에서는 좀 더 넓고 좋은 찬장 자리를 내줘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