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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연 Feb 23. 2020

프롤로그

참 많이 기다렸던 그 봄,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2016년 4월 6일 수요일. 이 날로부터 5년 간, 나는 중증 환자이다. 

그 사이 있을 여러 번의 검사와 그 결과의 좋고 나쁨의 정도도 이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
그리고 2021년 4월, 드디어 5년의 중증 등록이 끝났다. 이제 난 더 이상 암환자가 아니다."



이 이야기의 끝은 이렇게 맺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5년 간의 암투병이 끝나면 난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러나 2021년 4월, 나는 여전히 '산정특례 중증적용 암환자'이다. 

그저 5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명랑한 암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2016년의 봄은 참 기대했던 봄이다. 대학 졸업 이후 어느 몇 해들은 고시생으로, 어느 몇 해들은 학생들의 중간고사를 돕는 선생님으로 정신없는 봄날들을 보냈더랬다. 그 시간동안 아마도 수 십, 수 백 그루의 봄 나무들을 보았을 것이고 셀 수조차 없는 꽃송이들이 내 곁을 스쳐갔을 것이다.

다만 그 나무를, 그 꽃을, 그 봄을 난 진심으로 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해는 달랐다. 전적으로 내 선택을 존중해주는 남편과 내 진짜 행복을 응원해주었던 사람들의 기운에 실로 진심으로 홀가분하게, 백수 혹은 자유의 몸으로 봄을 기다릴 수 있었다. 수 십 수 백 그루의 나무와 수 천 개의 꽃잎과 따뜻하고 고즈넉한 봄 햇살을 진심으로 봄이라 받아들일 준비가 모두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2016년의 봄날, 나는 내가 그려나갔던, 그려나가고 싶었던 삶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상상할 수 없었던 암이라는 병에 걸려버렸다.

의식하지 못 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파래진 나뭇잎에, 동그랗게 맺어진 꽃봉오리들에 봄이 오고 계절이 바뀌고 있구나 생각하듯 미처 의식하지 못한 내 앞으로의 삶이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로 달라져버렸다.
30대 초반, 그저 평범하게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던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나의 죽음과 마지막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세상이 좋아져 초기 암은 고칠 수 있다지만 새 생명을 기다리던 내 맘엔 마치 사형선고가 내려진 듯했다.

그 봄날 이후, 함부로 내 미래를 그리고 계획하는 것에 대해 덜컥 겁부터 난다. 5년 후엔 암환자를 벗어나리라 호언장담했지만 여전히 나는 암투병 중이고, 생각지도 못한 농부가 되어 땅끝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다. 
계획하지 않았지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나를 이 곳까지 데려다 놓았고 그렇게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서 그저 묵묵히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명랑하고 즐거웁게.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재촉하지 않아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 시간에 있어주었던 그 봄날들처럼, 내가 어떤 일을 겪든 따스히 내 곁에 있어주는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랑"하게 내 삶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암환자'이기 전에 '명랑'한 사람이다. '명랑한 암환자'가 되었지만 내 삶의 명랑함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암환자'와 이별할 수 있는 그 시간이 꼭 오리라 믿는다. 


긴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는 2021년 4월, 이 곳 땅끝 진도에 찾아오는 이른 봄날의 햇살처럼 눈부시게 따뜻한 나의 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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