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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을 읽으며
고전(苦戰)하지 않으려면?

고전의 인두 같은 문장에서 배우는 촌철살인의 짧은 문장의 힘

고전(古典)을 읽으며

고전(古典)을 읽으며 고전(苦戰)하지 않으려면?

고전의 인두 같은 문장에서 배우는 촌철살인의 짧은 문장의 힘


고요한 밤, 책장을 넘긴다. 다음 장이 열리는 순간 책을 읽다 첫눈에 반한 문장, 아니 문장이 내게로 달려와 심장에 꽂혔다. 문장의 의미가 심장에 꽂혀 생긴 이름, 의미심장(意味深長)! 언제 어떤 문장을 만날지, 문자로 수놓은 예측 불허의 문장 바다를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 밤도 건너고 있다. 밤이 깊어갈수록 남은 책장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드디어 먼저 읽고 기다리는 나와 지금 읽고 있는 내가 만난다. 마치 터널을 양쪽에서 뚫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만나는 것처럼.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몸부림치는 저자의 사투, 독자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숱한 사연, 사연을 매개로 사색의 강은 흐르고 눈앞에는 여전히 책 속의 문장이 아른거린다. 감동을 넘어 세상을 향해 파동 치기 시작한다. 생각의 파란(波瀾)을 일으키는 문장(文章)은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이 낳은 파란 문장이다. 파란 문장이 바로 아포리즘(aphorism), 심오한 진리를 단순하게 제시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지혜다. 깊은 밤의 알 수 없는 고요가 어느 사이 새벽을 낳았다. 밤과 새벽 사이에서 또 다른 생각 자손이 출산되었다. 오늘도 인두 같은 한 문장을 만나기 위해 활자의 바다로 항해를 시작한다. 사유의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진다. “읽기와 쓰기와 고독이 지닌 깊이가 나를 반대편에서,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게 했다. 너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사랑받을 거야”(85쪽). 리베카 솔릿의 《멀고도 가까운》에 나오는 글을 쓰는 이유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해서 글을 쓰지 않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면 일어나는 혁명적인 변화의 차이, 글로 인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과 친밀하게 연결될 가능성에 생각지도 못한 만남과 인연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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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나는 문학 창작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즉 평범한 대상을 미래 시간의 너그러운 거울에 비칠 모습으로 그리는 것, 아득히 먼 미래의 후손들만이 알아보고 가치를 인정해 줄 그 향기로운 유연함을 우리 주위의 대상 속에서 찾아내는 것. 아득히 먼 미래에는 지금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이루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저절로 절묘하고 흥미진진한 것이 될 거야”(368쪽).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나보코프 단편전집》 중에서 ‘베를린 안내’에 나오는 인두 같은 문장이다. 글을 쓰는 이유가 나온다. 지금은 평범한 대상이지만 미래의 후손들이 읽을 때쯤이면 비범한 사상의 씨앗을 품고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런 책을 누군가 읽어주면 독자와 저자는 사후에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9쪽).” 파묵의 《새로운 인생》 첫 줄에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책 한 권, 더 구체적으로는 책 한 권의 한 문장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책을 만나는 순간은 단순히 머리로 들어오는 정보와 지식과의 만남이 아니라 저자의 메시지가 몸을 관통하며 진저리를 치게 만든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사이, 그 사이에 돌아갈 수 없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책과 숙명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우연한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책과는 우연히 만나야 합니다”(70-71쪽). 우찌다 다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우연히 만난 한 문장이 한 사람의 한평생을 바꿔놓는 혁명이 일어나기도 한다. 짧은 문장의 힘은 바로 고전에서 만나는 한 문장에서 비롯된다. 인두 같은 한 문장을 만나는 순간 전두엽에 불이 켜지고 심장박동은 가속화되면서 주먹은 불끈 쥐어지고 시야는 지금 여기서 저기를 바라본다.


책을 읽는 건 느닷없이 다가오는 지적 마주침을 즐기기 위해서다. 책에 빠져 읽다가 우연히 마주친 인두 같은 문장이 강력한 앎의 상처를 만든다. 통념에 깨지는 아픔도 있고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안타까움도 있다. “푼크툼은 또한 찔린 자국이고,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베인 상처이며-또 주사위 던지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뿐만 아니라 나에게 상처를 주고 완력을 쓰는) 우연이다”(42쪽).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 나오는 말이다. 읽기는 인두 같은 문장이 갑자기 침범해 들어오면서 뇌리에 강력한 푼크툼과 같은 앎의 상처를 만드는 일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의미심장함은 측정이 불가능하다. “읽기는 추상화의 행동이기는커녕 오히려 육화의 행동이다. 읽기는 출산을 거드는 육체적인 행동, 몸의 활동으로, 순례자는 페이지들을 거치며 만나는 만물이 의미를 낳는 것을 목격한다”(190쪽).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에 나오는 문장이다. 책을 읽으며 한 문장을 만나는 독서는 정신노동이라기보다 육체노동이다. 문장의 논리적 의미를 분석해서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 정신노동이라기보다 짧은 문장이 품고 있는 교훈을 실제 삶에 적용하면서 육화 시키는 육체노동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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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삶을 불멸화시키려는 안간힘이다


“베껴 쓴 텍스트만이 그것에 몰두한 사람의 영혼에게 호령할 수 있는 반면 단순한 독자는 (텍스트에 의해 열린) 자기 내면의 새로운 광경들. 중략. 다시 빽빽해지는 내면의 원시림들 사이로 나 있는 길을 결코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저 읽기만 하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하늘을 떠돌며 자아의 움직임에 따르지만 베껴 적는 사람은 그러한 움직임에 호령을 하기 때문이다”(27쪽).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 나오는 깨달음이다. 책을 눈으로만 읽는 사람은 몽상을 하며 허공을 떠돌지만 인두 같은 문장을 만나 손으로 눌러쓰면서 자기 것으로 체화시키는 사람은 자기 방식으로 소화시키는 사람이다. 책을 읽는 한 가지 목적은 저자의 사유체계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거기에 완전히 빠지는 데 있지 않고 빠져서 읽다가 다시 빠져나와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의미를 반추하면서 나의 생각으로 다시 잉태시키는 데 있다. 아무리 좋은 책을 읽어도 내가 겪어본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미천하거나 협소하면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그의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p.35-36).”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에 나오는 독특한 독서법이다. 읽은 대로 실천하고, 실천하는 대로 내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니 왜 안 읽는가라는 반문이다.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377쪽). 니체의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중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겪어본 경험의 깊이와 넓이만큼 책을 읽어낼 수 있다. 내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책은 읽어내기 어렵다. “모르는 것은 쓸 수가 없다. 느끼지 못하는 것도 쓸 수가 없다. 체험하지 않은 일은 쓸 수가 없다”(2쪽). 프랑수아즈 사강의 《패배의 신호》에 나오는 문장이다. 겪어본 경험이 없으면 아무 좋은 정보를 입력해도 뇌는 그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기반이 없다. 경험을 바꾸고, 바뀐 경험을 어제와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연습이 나의 경험을 기반으로 대체불가능한 글을 창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경험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불멸화시키기 위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우리가 알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을 위해 증언해 주는 것이자 그들을 불멸화하는 것입니다”(45쪽). 롤랑 바르트의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사랑했던 삶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노력에 대해서는 종교적 이념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단순한 차원에서 우리가 글을 쓰는 소박한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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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환은 치료(cure) 대상이지만 질환은 치유(care) 대상이다


“나는 나의 신체 앞에 있지 않고 나의 신체 안에 있다. 아니, 차라리 나는 나의 신체이다(238쪽).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에 나오는 일침이다. 나는 정신이나 마음과 몸 그리고 이성과 분리독립된 개체의 집합이 아니다. 신체성에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 숨어있는 까닭이다. 내 몸에는 과거는 물론 현재와 심지어 미래 가능성이 담겨 있다. 몸은 마음이 거주하는 우주다. 몸을 쓰지 않고 머리로 재단한 앎이 무력한 이유다. “아아! 이렇게 연구실에 처박혀 있다가 겨우 휴일에나 세상 구경을 하는데, 그것도 먼발치에서 망원경을 통해 보는 거라면 어찌 설득을 통해 대중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43쪽).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정문일침이다. “아!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는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전보다 똑똑해진 것은 하나도 없구나”(29쪽). 괴테의 같은 책, 파우스트에 나오는 통렬한 회한의 뉘우침이다.


저자에게는 아픔이고 고통지만 독자에게는 아픔과 고통으로 건져 올린 글에 삶의 소중한 지혜를 만날 수 있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9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오는 소중한 깨달음이다. 달리기를 하는 경험에서 느끼는 아픔은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아픔으로 전신을 파고드는 고통의 흔적은 내가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하기 나름이다. “질병(illness)은 질환(disease)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질환 이야기가 몸을 측정한다면, 질병 이야기는 고장 나고 있는 몸 안에서 느끼는 공포와 절망을 말한다. 질병은 의학이 멈추는 점에서,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은 내 삶에도 일어난다. 내 삶에는 체온과 순환도 있지만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측정될 수 없다. 질병 이야기에 그 몸 같은 것은 없으며 오직 내가 경험하는 내 몸만이 있다”(28-29쪽).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 중에 나오는 의미심장한 차이다. 질환은 관념적으로 진단할 수 있지만 질병은 겪어보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구체적인 내 몸의 이상징후다. 질환은 치료(cure) 대상이지만 질환은 치유(care)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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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나는 경험이나 실천과 일치하지 않는 사안을 관조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389쪽).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정치학논고》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몸을 통과하지 않은 앎은 바닷가 모래에 객사한 조개껍데기에 불과하다. 자기 신념과 철학과 열정이 녹아든 지식만이 지혜로 건너간다.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 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끈을 자를 수도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이 잡것이! 끈을 놓쳐버리면 머리라는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끈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429쪽). 니코스 카잔 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명문장이다. 계산하는 머리는 인공지능에 불과하다. 지능은 빠르게 계산하는 기능에 불과하지만 지성은 딜레마 상황에서도 깊이 사유하며 윤리적 판단능력을 발휘한다. 지성은 책상에 길러지지 않는다. 지성으로 건져 올리는 지혜는 오로지 몸을 던져 체득하고 육화 시킨 흔적과 얼룩으로 만들어진다.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꾹 눌러앉아 있는 끈기-이것에 대해 나는 이미 한 번 말했었다-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죄라고”(353쪽). 니체의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디오니소스 송가.니체 대 바그너(1888~1889)》 중에서 ‘이 사람을 보라’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내장이 꼬일 정도로 오랫동안 앉아서 머리만 굴리니 진리보다는 진리에 이르는 편리한 길만 찾게 된다.


"영혼과 자유를 분리할 수 있는 자유는 더더욱 없다. 우리는 생각하는 개구리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산고를 겪으며 우리의 사상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으며 어머니로서 피, 심장, 불, 기쁨, 정열, 고통, 양심, 운명, 숙명 등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을 그 사상에 주어야만 한다. 삶-이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고, 우리가 빛과 불꽃으로 변화시키는 모든 것이며, 또한 우리와 만나는 모든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28쪽). 니체의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에 나오는 즐거운 통찰이다. 사상은 책상에서 생각하다 내장이 꼬여서 생기는 편견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사상은 산고를 겪으며 흘리는 피눈물과 피땀, 운명을 걸고 혁명을 거듭하는 위험한 탐험과 탐구의 산물이다. 그런 깨달음이 심장을 관통하며 쓴 글이라야 의미가 심장에 꽂힌다. 불꽃처럼 살다 간 작가의 글이 꺼져가는 영혼의 열기를 일깨우고 잠자는 타성에 각성의 죽비를 내리치는 이유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현상, 모든 인간을 그 불꽃의 형태로만, 정열을 통해서만 인식할 뿐입니다. 모든 정신은 피 속에서 끓어오르고, 모든 사상은 정열에서, 모든 정열은 영적인 감동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셰익스피어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먼저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진실로 젊게 만들어 줄 셰익스피어를 말입니다! 먼저 감동하고, 그다음에 공부하시오! 언어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가장 찬란한 세계의 교과서인 그 사람, 가장 고귀한 그 사람, 최고의 인물인 셰익스피어에 대해 연구하시기를!”(44-45쪽).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에 나오는 격정적인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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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으로 느껴보지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어떤 세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 세계의 모습을 해체하여 자기 시각으로 재조립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행한 일정한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가 부닥쳤거나 거절당했던 다른 선택들의 결핍 상태를 상상 속에서 직시해보아야 한다. 잘 먹는 사람들은 못 먹는 사람들이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서툴게나마 남의 경험을 파악할 수 있으려면 그 세계를 분해해서 재조립해봐야만 하는 것이다”(97쪽).

존 버거의 《제7의 인간》에 나오는 말이다. 책을 읽으며 만나는 인두 같은 짧은 문장에 담긴 의미도 저자의 입장이 되어 당시 어떤 경험을 통해 그런 느낌과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추체험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할 때 그나마 조금이라도 저자의 입장이 되어 왜 그런 문장을 썼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이 열린다.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느껴보지 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39쪽).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나오는 문장이다. 신체가 오감각으로 느끼는 직접 경험을 기반으로 창조하는 지혜야말로 책상머리에서 생각해서 제조한 관념의 파편이 아니라 몸으로 겪어본 시행착오의 산물이다.


“통찰이 행동으로 이어지기보다 행동이 통찰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137쪽). 칩 히스와 댄 히스의 《순간의 힘》에 나오는 문장이다. 내가 직접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보는 가운데 시행착오도 겪고 판단착오를 줄일 수 있는 통찰력도 얻는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내가 뭘 간절히 원하는지, 내가 하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지, 내가 하면 더욱 빛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40대가 되면 그들은 작은 집착이나 몇몇 개의 속담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자동판매기가 되기 시작한다. 왼쪽 주입기에 2수를 넣으면 은종이에 싸인 일화가 나온다. 오른쪽 주입기에 2수를 넣으면 물렁물렁한 캐러멜처럼 이에 달라붙는 듯한 귀중한 충고가 나온다(131쪽).”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문장이다. 경험이 중요하지만 어제와 다르게 경험하지 않고 과거의 성공경험에 갇히기 시작하면 다르게 생각할 가능성도 점차 줄어든다. 경험은 경전이다. 내 생각의 판단 기준이자 이전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통찰력의 텃밭이다. 과거의 경헌에 갇혀 있으면 내가 뭘 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다. 내가 뭘 욕망하는지, 무슨 일을 하면 나의 존재자체가 돋보이는지를 알아보려면 세상을 향해 내 몸을 던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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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가 자기 배려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7쪽).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문장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욕망의 물줄기를 따라가는 삶이 나의 소명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내 모든 삶, 내 의식적인 삶이 옳지 않은 것이라면?’ 전에는 이런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자신이 마땅히 살아야 했던 삶을 살지 못했으며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자들이 여기는 것에 맞서 싸우려고 했던 눈에 띄지 않았던 충동, 그가 즉시 억눌렀던 그런 충동이 진짜이고 나머지는 전부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86쪽).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문장이다. 자신이 마땅히 살아야 했던 삶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억눌렀던 충동대로 살아가는 삶이며, 데미안의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이다.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을 살지 않거나 억눌렸던 충동을 되살려내지 못하는 삶은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나의 존재이유를 드러내는 삶, 내가 살아가는 목적에 부응하는 삶, 소명이 요구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마땅히 수행해야 될 사명을 완수해 가는 삶이 가장 자기다움을 증명하는 Only One의 삶이다. 대체불가능한 원본으로 태어나서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는 삶, 바로 색달라지면 저절로 남달라 지는 자기다움을 실현하는 삶이다.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가 이 자기 실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고 중심 테마이기도 합니다”(132쪽). 미셀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에 나오는 문장이다. 푸코는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 되기가 자기 배려라고 한다. 자기 배려는 자기를 배려하는 의미가 아니라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고유한 생각과 욕망, 행동과 가치관을 어떻게 형성해 나갈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어제와 다른 나로 부단히 변신하는 과정이다. 데미안의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알아채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 나 자신을 능동적으로 탐구하고, 윤리적으로 더 나은 주체로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알아야만 하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인 것이다. 앎에 대한 열정이 지식의 획득만을 보장할 뿐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는 자의 일탈을 확실히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23쪽). 푸코의 《성의 역사 2》 중에 나오는 문장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이 없으면 자기 자신에 안주하고 아는 자의 일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고 기존의 안락한 앎에 안주하기 시작한다. 반복되는 일상이 틀에 박히고 늘 새롭게 맞이해야 할 내일은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은 동일한 삶이 지루하게 반복될 뿐이다. 그 순간부터 일상은 상상력이 자라는 텃밭이 아니라 습관과 관습이 타성을 만나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장소로 전락한다. 타성과 관성의 늪에서 벗어나 내 삶을 사랑하는 순간 질문이 폭발하고 어제보다 더 멋진 삶을 살기 위한 자발적 연구개발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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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이게 해주는 마법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즉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 기호들에 민감해지는 것이며, 이 기호들로부터 배움을 얻는 것이다”(27쪽). 질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나오는 문장이다. 기호는 나에게 생각하게 만드는 낯선 신호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변화라도 그것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하는데 온 신경이 곤두서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대의 모든 변화는 다 낯선 기호다. 그래서 늘 질문이 폭발한다.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11쪽). 메리 올리버의 《휘파람 부는 사람》에 나오는 문장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든 변화를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해석을 기다리는 기호다. 질문이 폭발하는 이유다. “길들인다’는 게 무슨 말이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너무나 잊힌 것인데,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말이야. “ 여우가 말했다……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이가 되고 난 너에게, 넌 나에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거야……”(153-154쪽). 앙투안 드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문장이다. 낯설었던 또는 알아맞히기 힘들었던 서로의 질문이 점차 알아맞힐 가능성이 높아지고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는 관계로 인연의 끈이 이어지면서 매너리즘에 빠질 때 사랑은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어지고 질문이 없어지는 관계로 전락할 수 있다.


"사랑이 사람을 눈멀게 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랑은 비로소 눈을 뜨이게 하고 심지어 미래를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알아보는 가치는 현실이 아니라 가능성이니까요. 아직은 그렇지 않으나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111쪽).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의 심리의 발견》에 나오는 문장이다. 눈이 멀고 관계에 타성과 매너리즘이 끼어들기 전에 함께 만들어갈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낯선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궁리가 시작된다. “물음의 역량은 물음이 향하는 대상은 물론이고 그에 못지않게 묻고 있는 자를 위험에 빠뜨리고, 또 자기 자신을 물음의 대상의 위치에 놓는다”(424쪽). 질 들뢰즈의 대표적인 저서, 《차이와 반복》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물음의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묻고 있는 자신이기도 하다. 존재이유와 목적을 자문할 때 자문받은 자기는 이전과 다른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긴다. 낯선 사유는 낯선 질문이 낳은 산물이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침입, 폭력, 적이다”(310-311쪽). 들뢰즈의 같은 책,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이다. 사유는 정상 적지 않는 낯선 상황에 갑자기 맞닥뜨렸을 때, 예고 없이 불법침입한 자극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게 낯선 사물이나 현상일 수도 있고 낯선 타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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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86-87쪽).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 나오는 문장이다. 엄습하는 낯선 타자는 나에게는 총체적인 기호로 다가온다. 그 기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낯선 타자는 낯선 사유를 잉태하게 만들어준다. “모든 마주침은 우발적이다. 그 기원들에서 그러할 뿐 아니라(마주침은 보증되어 있지 않다) 그 효과들에서도 그렇다. 달리 말해, 모든 마주침은 비록 일어났지만,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78쪽).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과 맑스주의》에 등장하는 글이다. 타자와의 우연한 만남, 사물이나 현상과의 우발적 마주침이 낯선 사유를 출산하는 원동력이다. 우발적 마주침 없이 창발적 깨우침도 없다. 그 마주침으로 체득한 깨우침을 언어로 고스란히 다 번역해 낼 수 없다.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87쪽).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조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우연예찬이다. 우연이 다가온 선물, 우연히 마주친 인연, 우연히 맞닥뜨린 경험에서 생각지도 못한 깨우침의 향연이 펼쳐진다.


“영감은 예기치 못한 질량이며, 은닉의 시간에 급습하는 뮤즈다(10쪽).” 패티 스미스의 《몰입》에 등장하는 깨달음이다. 마주침이나 영감은 급습한다. 언어가 뒤따라 번역을 시도하지만 표현하기 어렵다. 몸으로 깨우친 깨달음의 지혜를 언어적 진술로 담아내기에는 언제나 역부족이다.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알 수 있다”(31쪽). 마이클 폴라니의 《암묵적 영역》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런 유형의 앎이 마이클 폴라니가 《개인적 지식》에서 강조하는 알고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앎이 암묵적 지식이다. 문서로 정리해서 우세에게 전달할 수 없는, 가르칠 수 없고 오로지 몸으로 배우고 익혀야 하는 지혜다. 경지에 이르는 사람은 언제나 독특한 깨달음의 경험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107쪽).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의 유희 1》에 나오는 문장이다. 진리는 진저리의 산물이다. 진저리는 몸부림치며 안간힘으로 버티며 견뎌낸 애쓰기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 없네”(206쪽).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나오는 문장이다. 지혜는 신체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신체적 경험으로만 감각적으로 각인되는 땀과 눈물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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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상처이자 문신이다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33쪽).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앎의 나무》에 나오는 말이다. 지혜는 삶으로 앎을 증명할 때 탄생된다. 지혜는 먼저 지식을 습득하고 나중에 실천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산물이 아니라 삶과 앎과 함이 3박자로 맞물리면서 돌아가는 와중에 생기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산물이다. 지행합일로 깨달은 지혜는 언어적 진술을 거부한다. 내가 아는 앎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 몸속에서 잠자는 가능성으로 남아있는다. 특정한 문화공동체 내에서 나도 모르게 배우는 언어 꾸러미에서 선택, 나의 심정과 심리 상태를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문신이라는 지바 마사야의 《공부의 철학》에 나오는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언어는 타자에 의해 강제적으로 우리 몸에 새겨졌다. 언어란 상처다. 언어의 형태가 우리 몸에 새겨졌다. 언어는 문신이다”(126쪽). 언어는 나라는 존재와 그 존재가 살아온 삶과 무관하게 배우는 게 아니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다. 그 언어가 나를 만들고 내 삶을 바꾼다. 하지만 모든 걸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 우리는 경험과 생각을 어제와 다른 언어로 벼리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117쪽).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말을 해야 한다. 감각적 깨달음의 경지를 어제와 다른 언어로 표현하려는 안간힘에서 언어는 늘 어제와 다른 우리 생각을 매개하는 생각의 옷이다. “성공이란 절묘한 언어 표현에 달려 있다. 그것은 종종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영감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대개는 적확한 말, 그러니까 한 단어도 바꿀 수 없는 문장, 소리와 개념의 가장 효과적인 결혼으로 얻어진……간결하면서도 집중된, 잊을 수 없는 문장을 찾는 참을성 있는 탐구 끝에 얻어진다”(133쪽).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에 등장하는 깨달음이다. 절묘한 언어표현은 똑 같은 경험도 다른 이해의 경지로 이끈다. 언어를 벼리고 벼리는 가운데 가장 적확한 언어를 벼르는 사람만이 경지에 이른 경험적 깨달음을 독특한 언어로 번역, 창의적인 생각으로 번역해 내는 것이다. 경지에 이른 사람은 사용하는 언어가 색다르고 남다르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언어를 사용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 그 언어의 품격이 인격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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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웃음 하나 함께 하지 않는 진리는 모두 거짓이다


“모든 단어에는 자신의 냄새가 있다”(301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에는 저마다의 삶의 굴곡진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단어마다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된 얼룩과 무늬가 다르기 때문이다. 단어가 문장을 만들고 문장이 문체를 만든다. 저자 특유의 문제의식이 담긴 문장에는 주관적인 신념과 주장이 서려 있다. 해석의 틀이 그 문장 안에서 숨 쉬고 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것이다”(25쪽).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에 등장하는 도발적인 주장이다. 니체도 모든 고통은 해석된 고통이라고 말했듯이 해석은 특히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은 창작자의 의도와 신념과 관계없이 자기 마음대로 가하는 언어적 폭력이자 왜곡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사물에게도 나름의 음악이 있다. 수도꼭지에서 반쯤 찬 양동이 속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라”(13쪽). 파스칼 키냐르의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에 나오는 일상에서 건져 올린 상상력의 날개다. 생명이 없는 사물이 읊어대는 음악을 비평가가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물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의적으로 해석을 가할 수 있다. 사물이 말하고 싶은 바는 오로지 사물만이 알 뿐 우리를 포함해 예술가는 자기가 들은 이야기만 번역해 낼 뿐이다.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102쪽).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아름다움 찬양이다. 아름다움은 앓고 난 사람이 보여주는 사람다움이다. 그 사람다움에 아름다움의 시작과 끝이 존재하고 고통을 번역해서 창작하려는 몸부림이 들어있다. 해석자의 해석을 거부하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예술의 임무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네. 자네는 비루한 모방자가 아니라 시인이야!”(82쪽). 오노레 드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에 나오는 통찰이다. 시인의 시선으로 표현하는 일상의 세계는 한 마디로 시적이다. ‘시적(詩的)’이라는 말은 ‘지적(知的)’이라는 말과 다르다. 지성의 언어를 논리적으로 벼린 무표정의 언어가 아니라 시적 순간을 포착했지만 그 순간의 농밀한 감각적 깨달음을 번역하기 어렵지만 압축과 절제와 긴장감으로 버무린 예술적 깨달음의 흔적이 시적이라는 말이다. 촌철살인의 통찰이 서늘한 가을 저녁 무드로 잠자고 있고, 차가운 의심이지만 근원을 파고드는 질문이 여전히 숨 쉬고 있으며, 뜻밖의 해학과 기지가 빛나는 순간이 바로 시적인 순간이다. “큰 웃음 하나 함께 하지 않는 진리는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자!”(348쪽).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말이다. 웃음과 재미가 의미와 만나야 유머의 본령에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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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교육학, 경영과 경영학, 지리와 지리학은 왜 다른가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니. 모든 게 지금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는 항상 끝났던 곳에 이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생겼다”(11-12쪽). 라이너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말이다. 시인은 보는 사람, 견자(見者)다. 똑같은 일상이나 사물과 현상도 전혀 다르게 보고, 아예 다른 것을 보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렇게 안 보이던 부분, 봤어도 못 봤던 부분을 보는 시적인 순간을 시적인 언어로 벼리고 벼리다 더 이상 버릴 수 없는 적확한 언어를 벼르고 별러서 시어로 그 순간의 깨달음을 언어로 문장을 건축한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90쪽). 장 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색다른 시선이다.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가려진 부분, 저마다 삶의 가려진 부분은 다르지만 그곳에 우리가 찾는 진리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법은 가르치지만, 육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화학은 공부하되 자기의 빵이 어떻게 구워지는가는 배우지 않으며, 기계학은 배우되 빵을 어떻게 버는가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는다. 해왕성의 새로운 위성은 발견해 내지만, 자기 눈의 티는 보지 못하며 또한 자기가 지금 어떤 악당의 위성 노릇을 하고 있는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 방울의 식초 안에 사는 괴균(怪菌)들을 연구하면서 자기의 주위에서 우글거리는 괴물들에게 자신이 잡혀 먹히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83쪽).”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에 나오는 문장이다. 교육학은 배우지만 교육현실을 모르고, 경영학은 배우지만 경영에는 문외한이며, 지리학은 배우지만 지형과 지리가 수시로 바뀌는 현장은 모르는 절름발이 지식인이 전문가로 득세하는 사회의 아픈 모습이다.


“물체는 제 중심에 따라서 제 자리로 기웁니다. 중심이란 꼭 밑으로만 아니고 제자리로 기웁니다. 불은 위로 향하고, 돌은 아래로 향합니다. 제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 중략. 제 중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고 제가 끌려갑니다”(523-524쪽).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등장하는 말이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사랑이다. 자기 자리로 끌어당기는 힘도 사랑이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도 사랑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자기 자리를 벗어나거나 자기 자리도 아닌데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이 많다. 더러운 인간이 탄생하는 이유다. “신발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고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이 더럽다. 음식이 그 자체가 더러운 건 아니라 침실에 식사용기를 놓은 것이 더럽거나 옷 위에 흘린 음식이 더럽다. 마찬가지로 응접실의 화장실 도구나 의자 위에 놓인 옷, 실내에 있는 실외 도구, 아래층에 놓인 위층 물건, 겉옷 위에 드러난 속옷 등등, 요컨대 우리들의 오염에 관한 행동은 일반적으로 존중되어 온 분류를 혼란시키는 관념이나, 이것과 모순되는 일체의 대상에 대한 관념을 그른 것이라고 하는 반응이다”(69쪽). 메리 더글러스의 《순수와 위험》에 나오는 놀라운 통찰이다. 더럽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언제 더러워지냐.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다른 자리에 가 있을 때 더럽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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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그 생각이 내 마음을 깊이 뒤흔들었다”(171쪽).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문장이다.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서면 아름답게 빛날 살자리다. 설자리가 바로 살자리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261쪽).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문장이다. 자기가 설 자리를 찾아 묵묵히 걸어가는 방법, 자기가 맡은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는 길 밖에 없다. 지금 당장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본래 미래는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길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우직지계가 시사하듯 돌아가는 길이 빠른 길일 수도 있다.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367쪽). 스파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이다. 고귀한 것을 얻으려면 무작정 열심히 고난을 경험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고귀한 것은 빠지기 쉬운 쾌락을 절제하고 다양한 원인에 휘둘리지 않는 자기의 존재이유, 즉 자유를 추구할 때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단 하나의 진실한 법은, 자유로 이어지는 법이다. 다른 법은 없다”(99쪽).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말이다. 소명을 따라가는 길, 사명을 다하는 방법, 존재목적과 존재이유를 찾아가는 길만이 자유로운 길이다. 그 길은 고귀하고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나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시련과 역경이 그 길의 장애물이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안락한 삶이다. “평생의 꿈을 가로막는 건 시련이 아니라 안정인 것 같아. 현재의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그저 그런 삶으로 끝나겠지”(168쪽). 하야마 아마리의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중에 나오는 역발상이다. 어제와 나와 다르게 재탄생하려면 현실안주나 쾌락의 덫에서 벗어나 고통이 닥쳐오지만 그 세계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어야 한다. 뛰어들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삶은 준비할 수 없다. 몸풀기 따위는 건너뛰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태도다. 안전망 하나 없이도 자신만만하게 뛰어들 수 있다면 자전거나 경마를 배우는 것처럼 인생을 배울 수 있다. 삶 자체가 품고 있는 추진력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삶은 놀라움의 연속일 것이다……충분한 대비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망설이면 일이 더 어려워진다. 행동하기 전에 확신이 생기기를 바라지 말자.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미래에 가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57쪽). 올리비에 푸리올의 《노력의 기쁨과 슬픔》에 나오는 깨달음의 문장이다. 미래는 오지 않은 미스터리의 세계다. 미스터리는 지금 여기서 머리로 해결할 수 없다. 몸을 던져 다가오는 미래로 몸을 던져 현실에서 진실을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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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원시림이다


사람도 미스터리 천국이다. “자연이 만든 인간은 예측불허의, 불투명한, 위험스러운 존재이다.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72쪽).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만나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다. 정해진 각본이나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구상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는 불확실한 세계다. “우리는 보통 잘 아는 것을 선택하지 낯선 것은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우리는 충격을 받거나 실망하거나 단순히 다루기 곤란할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잘 모르는 것은 선택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실망과 경악을 안겨주는 그 모든 미지의 것들이 바로 우리를 가장 살찌우는 것들이다.”(139쪽). 앤 머로 린드버그의 《바다의 선물》에 나오는 비범한 문장이다. 실망과 경악을 안겨주는 그 모든 미지의 것이 살아가는 곳이 미지의 원시림이고 그 속에서 부딪히며 마찰을 일으키는 마주침이 통찰을 낳는 깨우침이다. “타인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유한하고 고독하며 불안으로 가득 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래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579쪽)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문장이다. 잘 몰라서 실망과 경악을 안겨주는 미지의 세계가 고독하며 불안으로 가득 찬 세계다. 그곳이 바로 존재의 의미를 밝혀내는 소중한 공간이다.


“우리가 아는 것 중에 가장 큰 부분이 우리가 모르는 것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즉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무지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144쪽).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오는 비범한 통찰이다. 우리가 아는 게 많다고 자신감을 보여줘도, 사실은 아직 전혀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것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를 잘 안다고 해도, 실제로는 우주 공간의 지극히 작은 일부밖에 안 된다는 의미다. 아는 게 많다고 자만하지 말고 아직도 모르는 게 더 많으니 자세를 낮추고 겸손한 자세로 배움과 익힘의 여정을 멈추지 말라는 의미다. 아무리 지식이 풍부하고 지혜가 넘쳐도 인간은 다른 생명체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가장 나약한 존재다.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 내가 먹고 마시고 사용하는 도구나 장비, 환경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다른 생명체나 비생명체에 의존해서 살아가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화 된 존재인한 한 폭력은 우리의 운명이다”(146쪽). 메르롤 퐁티의 《휴머니즘과 권력》에 등장하는 위대한 통찰이다. 오늘도 하루 세끼의 식사를 위해 동물과 식물을 죽여서 먹는 폭력범으로 살았다. 앞으로 이런 폭력행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덜 폭력적으로 살아갈 것인지만을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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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두 번 다시 오늘처럼 빛나지 않는다


자연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미물이라고 해도 함부로 기존지식에 비추어 재단하고 평가하지 말자. 모든 존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시원에서 탄생했으며, 그 탄생의 신비는 나의 앎으로 밝혀질 수 없는 미스터리의 세계다. “멀리 있는 달과 태양은 그 긴긴 세월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밀물과 썰물의 들고 남을 재촉했을 것이다. 기후변화에 따라 풍화작용도 한몫했겠지만, 세월이라는 인내의 도움 없이는 해변의 모래밭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닷가 모래밭은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을 실감케 하고 세상이 인류보다 훨씬 더 오래됐음을 가르쳐준다”(318쪽).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나오는 말이다. 모래밭에 존재하는 모래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인내와 인고의 시간을 따라오는 동안 곳곳에서 방해작용을 하면서 긴 시간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한 톨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본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적 상상력이 이해가 되는 이유다. 오늘의 평범한 보행 속에는 미래의 언제나 혁명적 변화가 시작되는 행보의 꿈이 꿈틀거리고 있다. “하루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눈을 뜨면 그날 적어도 한 사람에게 한 가지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이다”(588쪽).

프리 드리히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에 나오는 인두 같은 삶의 지침이다. 자연의 삼라만상도 인간 세상도 모두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의지하며 서로가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살아가는 세계다. 내가 속한 관계에 좋은 인연의 끈을 이어가는 소중한 한 사람이 된다면 그 덕분에 누군가 또한 소중한 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과의 희망과 연대망 속에서 자기다움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길모퉁이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아주머니, 모퉁이 너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어떤 초록빛 영광과 다채로운 빛과 그림자가 기다릴지, 어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지,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과 마주칠지, 어떤 굽잇길과 언덕과 계곡들이 나타날지 말이예요“(518쪽).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에 등장하는 희망적인 메시지다.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베푼 덕분에 행운이 나타날 수도 있고, 그동안 열심히 뭔가 흔적을 축적한 덕분에 마침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313쪽).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세상을 살아본 어른의 일침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전부가 신비이고 기적이며 경이로운 깨달음의 천국이다. 주어진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뜻밖의 행운이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나 사고로 잠시 힘든 시기를 보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오늘의 경이로운 모든 순간을 흘려보내거나 미래를 담보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낭비하지 말자. “오늘은 결코 다시 오지 않으며 오늘을 먹고 마시고 맛보고 냄새 맡지 않는 사람에게 영원히 절대로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는 거야. 태양은 두 번 다시 오늘처럼 빛나지 않을거야”(32쪽). 헤르만 헤세의 《클리조어의 마지막 여름》에 나오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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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라는 걸 말이오. 바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때에만 우리가 가진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오. 앞으로 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될지 어떨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함께 있는 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인데, 오직 그 하나를 위해 인간은 이 세상에 온 것이기 때문이오”(110쪽).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오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은 지금 당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찾아가 뭔가를 함으로써 서로 의미심장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고대하는 미래는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모든 순간을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소중하게 사랑해야 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177쪽).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행복예찬이다. 행복을 추상명사로 생각하는 관념적인 사람은 행복을 맛볼 수 없다. 행복은 행동이며 행동하는 동사다. 동사의 바뀜이 곧 어제와 다른 행복을 가져오는 비결이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기보다 그 자체를 만끽하며 즐기는 시간에 행복은 저절로 몸으로 파고든다. “삶을 위해서 마시는 거야, 사랑스러운 형제! 삶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지!”(154쪽).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에 나오는 문장이다. 삶을 위해 살아야지 삶의 무엇을 달성하기 위해 살다 영원히 내 삶을 살 수 없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p.39).”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나오는 문장이다. 모든 순간에 경탄하지 않는 자는 한심한 사람이고 한탄만 반복하며 삶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43-44쪽).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나오는 문장이다. 사형을 면하고 고독형을 받았으니 지금부터라도 모든 순간을 경이로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경탄하는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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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빛과 불, 그것을 찾아 지금 떠나라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17쪽).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나오는 관능적 메시지처럼 내 삶의 빛과 불을 찾아 영혼의 열기를 쫓아가는 가장 나다운 삶을 살아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빛은 내가 누구인지를 비춰주는 소명이고 불은 그 소명을 다하는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욕망이다. 그런 삶을 찾아가는 사람은 이유가 없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11쪽). 《안나 카레니나 1》에 나오는 문장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안 되는 이유나 핑계를 찾기보다 되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면 세상은 꿈을 꾸게 만드는 설렘의 텃밭이다. 지금까지 주로 고전에 만나는 인두 같은 문장을 만나 삶의 교훈적인 메시지를 짧은 인두 같은 문장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인두 같은 문장에 빠져서 읽었지만 지금부터는 거기서 빠져나갈 시간이다.


“이제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너 스스로 해방시켜라. 나를 떠나라.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거기에 만족하지 말라. 너의 진실이 어떤 다른 사람에 의하여 찾아진다고 믿지 말라. 그 점을 그 무엇보다도 부끄럽게 생각하라(p.202).”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나오는 말을 결론을 대신해서 전달하며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고전(古典)을 읽으며 고전(苦戰)하지 않으려면 인두같은 문장을 곱씹어 소화하면서 내 삶에 적용해보고 그 문장을 내 생각으로 다시 재해석하고 재구성해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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