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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도 놀란 16세기 일본 여성들의 일상

아내가 당당히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고?

by 까막새

1585년,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가 일본에서 20년간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유럽과 일본의 관습과 차이에 관한 조약”은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다. 특히 일본 여성들의 삶에 대한 그의 기록은 16세기 세계 각지 여성들의 지위와 자유도가 얼마나 극명하게 달랐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프로이스는 잠깐 머물다 떠난 여행자가 아닌,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일본의 권력자들과 친분을 쌓으며 일본 사회 깊숙이 들어가 생활했던 인물이다.



"여자는 남편을 떠날 수 있고, 남편도 아내를 떠날 수 있으며, 둘 다 부끄러움 없이 재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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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스의 이 기록은 16-17세기 유럽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이혼은 거의 불가능했고, 특히 여성이 주도하는 이혼은 더욱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여성이 특별한 이유 없이도 남편을 떠날 수 있었고, 이것이 그녀의 명예나 재혼 가능성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로이스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자주 이혼을 한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주로 서민층에 해당하는 현상이었지만, 귀족 여성들도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다.



일본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성도 꽤나 충격적이다.

프로이스는 "일본의 부부는 재산을 독립적으로 소유하며, 아내가 때로는 남편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준다"고 기록했다. 고리대금업이 죄악시되던 가톨릭 유럽 사회에서는 더더군다나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생활력 강한 일본 여성들은 가업을 운영하고, 술을 빚고, 상인으로 활동하는 등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집안일과 육아에만 전념해야 했던 유럽 여성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유럽 여성들은 남편의 허락 없이는 집을 떠나지 않는다. 일본 아내들은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도 원하는 곳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프로이스의 이 기록은 당시 일본 여성들이 누린 이동의 자유를 잘 보여준다. 딸들조차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외출할 수 있다는 점은 2025년 한국 기준으로 봐도 쉽게 허용되는 일은 아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계층의 여성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 여성들은 여전히 시녀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의지로 외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럽 여성들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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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에서는 글을 쓸 줄 아는 여성이 그리 많지 않다. 일본에서는 명예로운 여성이 글을 읽을 줄 모르면 하층민으로 여겨진다."


이는 아마도 프로이스가 기록한 놀라운 사실 중 하나였을 것이다. 16세기 유럽에서 여성의 문해률은 극히 낮았다. 심지어 귀족 여성들조차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만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일본에서는 히라가나라는 '여성의 글자'를 통해 여성들이 편지를 주고받고, 일기를 쓰고, 시를 짓는 것이 일상이었다. 글을 모르는 여성은 오히려 무식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이런 문화는 헤이안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그럼 당시의 유럽은 어땠을까?

16세기 유럽 여성들의 삶은 프로이스가 관찰한 일본 여성들과는 정반대였다. 가부장제가 절대적이었고, 여성은 평생 남성의 보호 하에 살아야 했다.

유럽에서는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가 아내와 자녀들을 완전히 통제했으며, 여성들은 평생 남성 인물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 먼저 아버지에게, 그 다음엔 남편에게.


여성들은 12세부터 결혼할 수 있었고, 주로 가문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한 결혼이 이뤄졌다. 딸들은 장래에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한 기술들을 배웠고, 집안일이나 남편을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들에만 집중했다.

대부분의 유럽 여성들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부유한 가정의 딸들만이 읽기, 쓰기, 외국어를 배울 수 있었고, 가난한 집 딸들은 7세부터 일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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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의사나 변호사가 될 수는 없었고, 대부분 재봉사나 자수공, 또는 가정부로 일했다. 가장 일반적인 직업은 집안 하녀였다.

결혼 상대를 선택할 자유는 전혀 없었다. "결혼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행위이자 사회적 상승의 수단으로 여겨졌고, 아버지가 딸들을 결혼시키는 결정을 했다". 부유한 지주와 결혼시켜 더 많은 땅과 높은 지위를 얻으려 했다.



그럼 망원경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보자.


16세기 조선의 여성들은 일본이나 유럽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조선 전기와 후기 사이에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하락했다는 것이다.


고려 왕조 시대 여성들은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남성들과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었고, 자신만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으며, 토지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급격히 변했고, 여성들의 상황은 점차 나빠졌다.


이런 변화는 성리학이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면서 나타났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국에서 기원한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중국보다 훨씬 더 엄격한 방식으로 조선에서 시행되었다.


양반 여성들은 "사회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다. 낮에는 집을 떠날 수 없었고, 만약 외출해야 한다면 가마를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

집 밖에서 놀거나 즐기는 것은 당연히 금지. 남녀칠세부동석의 관념 속애 농민 집에조차 남녀가 분리된 방이 있었고, 부유한 가정에는 남성용 사랑채와 여성용 안채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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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성들의 문해률은 극히 낮았다. 공립학교는 남성만을 가르쳤고, 한글이 도입된 후에도 19세기까지 여성의 문해률은 4%에 불과했다. 양반 여성들은 집안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한자 학습은 금지되었고 조상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조선 초기에 사라진 여성 가장의 개념과 함께, 여성들은 점차 상속권도 잃어갔다. 딸을 시집보내려면 비싼 지참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딸들을 '도둑년'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결혼한 딸은 "출가외인(출가하여 남이 된 사람)"으로 친정과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겨 죽어도 시댁의 귀신이 될 수 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일본 여성들이 16세기에 이처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여성들의 높은 문해력과 문화적 지위는 헤이안 시대(794-1185)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 등 여성 작가들이 일본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히라가나라는 표음문자가 '여성의 글자'로 불리며 여성들의 문학 활동을 뒷받침했다.


가마쿠라 시대(1185-1333)까지 여성들은 남성과 같은 재산권, 세금 의무, 군사적 의무를 가지고 있었으며, 문서를 작성하고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일본 여성들이 오랫동안 경제적 독립성을 유지해왔음을 보여준다.


프로이스가 관찰한 16세기는 일본의 전국시대(1467-1615)였다. 이 시기는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해지고 지방 다이묘들이 할거하던 시대였다. 이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전통적인 사회 질서가 느슨해졌고, 여성들의 자유도가 상대적으로 높을 수 있었다.


남자들은 전투에서 사망해버리는 경우가 많으니 경제적인 책임도 자연스래 따라올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상인 계층과 도시 문화의 발달로 인해 여성들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졌다. 일본은 이미 16세기에 상당한 수준의 상업화가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여성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의 종교적 배경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불교에서는 여성을 "영적으로 장애가 있는" 존재로 보는 관점이 있었지만, 동시에 신토의 여신 숭배 전통과 결합되어 여성에 대한 복합적인 인식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성리학이 체계적으로 도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중국이나 조선과 같은 엄격한 유교적 여성관이 확립되지 않았던 것이 큰 요인이었다.



흥미롭게도 17세기 이후 상황은 역전된다.


도쿠가와 막부(1603-1868)가 성립되면서 일본에서도 성리학이 본격 도입되고 여성의 지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반면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와 함께 여성의 권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조선에서도 19세기 후반부터 근대화와 함께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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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스의 기록은 단순히 16세기 일본 여성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여성의 지위라는 것이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프로이스의 관찰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여성의 자유와 권리는 어떤 문화권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곳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6세기 일본 여성들이 누린 자유 - 이혼할 권리, 재산을 소유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이동의 자유 - 는 오늘날 많은 사회에서 기본권으로 여겨지지만,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이는 우리에게 진보와 발전이 항상 일직선상에 있지 않으며, 때로는 과거의 어떤 측면들이 현재보다 더 진취적이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그렇기에 오늘의 자유에 대한 감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과 도전 역시 지속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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