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 고착화 사회의 패러독스
프랑스의 재정 위기로 시끌벅적하다.
국가 신용등급이 하락하고, IMF 구제 금융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루머가 돌지만, 정작 국민들은 연금 개혁에 반대하고 격렬한 시위까지 불사한다. 금 모이로 나라의 위기를 돌파한 한국인들에게는 이질감이 클 수 밖에 없다.
현재 프랑스의 국가 부채는 3조 3,000억 유로로 GDP 대비 114.1%에 달하며, 이는 유럽연합에서 그리스(152.5%)와 이탈리아(137.9%)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더 심각한 것은 연간 부채 상환 비용만 670억 유로로 교육부와 국방부를 제외한 모든 정부 부처 예산보다 크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복지 시스템은 전 세계적으로 부러움의 대상이다.
GDP 대비 57.2%에 달하는 정부 지출은 OECD 평균(42.6%)을 훨씬 상회하며, 연금 소득대체율 74%는 독일(48%)이나 영국(28%)을 압도한다. 주당 35시간의 법정 근로시간, 연간 30일의 유급휴가, 그리고 평균 임금의 57%를 최대 36개월간 지급하는 실업수당까지, 숫자만 놓고 보면 프랑스는 완벽한 복지 천국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 수치들 뒤에 숨겨진 사회적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드러난다.
프랑스 사회의 핵심은 그랑제콜(Grandes Écoles) 시스템이다.
이 엘리트 교육기관들은 프랑스 혁명 이후 가문이나 배경이 아닌 실력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그랑제콜 준비반에서 노동자 자녀 비율은 6-7% 수준으로 1990년대 이후 변화가 없으며, 최상위 명문대학 및 그랑제콜 학생들은 대부분 상류층 가정 출신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교육 시스템은 단순한 학벌 구조를 넘어서, 실질적인 경제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진다. 배당소득의 96%를 상위 1%가 가져간다는 사실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초고액 소득자들은 홀딩컴퍼니나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실질적인 세금 부담을 20-25%에 불과하게 만드는 반면, 일반 국민들은 소득의 40-50%를 세금으로 납부한다.
프랑스의 복지 제도가 단순히 사회적 필요에 의해 발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연금 제도만 봐도 현세대가 낸 보험료로 곧바로 은퇴자의 연금을 지급하는 분배형 시스템으로, 부족한 부분은 정부 재정으로 충당한다. 이는 한국과 같은 적립식과 달리, 정부가 직접 나서서 국민들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구조다.
주목할 점은 프랑스 국민들이 이러한 복지를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로 인식한다는 사실이다.
2023년 연금개혁 반대 시위에서 보듯이,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는 것만으로도 대규모 파업이 이어졌다. 이는 복지가 단순한 사회보장이 아니라, 지배층과 일반 국민 간의 '사회 계약'의 형태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요즘 같은 경제 위기가 닥치는 상황이 되면 지배층에 대해 "나라가 어려워진 건 너희가 잘못해서인데 왜 그 문제를 우리에게 전가하느냐"는 국민 정서가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와 정면 충돌하고 있다.
프랑스의 워라밸 문화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017년 "연결되지 않을 권리(Right to Disconnect)" 법제화나 주35시간제 등은 표면적으로는 진보적 정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이 오히려 사회적 이동성을 제한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실제로 프랑스 근로자들의 실질적인 주간 평균 근로시간은 37-39시간으로, 법정 시간보다 길다. 이는 경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에서 제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상층부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반 국민들은 치열한 경쟁을 포기하고 삶의 질을 중시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프랑스에 혁신 기업이나 스타트업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두각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도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프랑스의 출산율 변화는 이러한 사회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1993년 1.66명까지 떨어졌던 출산율이 2010년 2.02명까지 회복되었다가 다시 1.88명(2017년)으로 하락한 패턴은 단순한 정책 효과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출산율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교육을 통한 극심한 경쟁이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 과도한 교육열과 자기책임 사회 문화가 저출산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사이토 고헤이 도쿄대 교수는 "눈앞의 이익을 추구해 경쟁을 부추긴 자기책임 사회가 저출산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계급이 고착화되어 애초에 경쟁을 포기한 사회인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높은 출산율을 유지하는 것은 논리적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희망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자녀 교육에 과도한 투자를 할 이유가 줄어들고, 이는 자연스럽게 출산 부담을 경감시킬 수 밖에 없다.
프랑스가 이러한 고비용 복지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무시할 수 없다.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형성된 프랑스 식민제국은 현재까지도 경제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 착취한 자원과 노동력은 프랑스의 자본 축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현재도 프랑스 흑인 인구의 증가와 관련된 복잡한 역학이 작동하고 있다. 이민자들의 높은 출산율이 전체 출산율 상승에 기여했다는 분석은, 프랑스의 복지 시스템이 다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프랑스의 복지 모델은 분명히 안정적인 사회 시스템을 제공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높은 복지 수준 뒤에 숨겨진 계급 고착화, 사회적 이동성의 제한, 그리고 엘리트와 일반 국민 간의 암묵적 타협이라는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한국이 추구해야 할 것은 프랑스의 표면적 복지 지표가 아니라, 진정한 사회적 이동성과 공정한 기회 제공이 가능한 시스템일 것이다. 복지는 사회적 달래기 수단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발판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높은 교육 열기가 출산율 저하로 이루어지고, 점차 소득계층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또다른 연구 대상일지도 모른다. 복지도 없고, 게급 이동의 공정한 기회마저 사라진 채, 생산 인력만 줄어든다면 프랑스의 시위가 반찬 투정에 불과하는 씁쓸한 자화상을 그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