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에 새겨진 권력과 욕망
신발은 단순한 발을 보호하는 도구를 넘어, 인류 역사에서 권력과 억압, 해방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강력한 문화적 기호였다.
발에 신는 작은 물건 하나가 어떻게 수천 년의 역사를 관통하며 인간의 욕망과 고통, 그리고 변화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신발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단순히 패션의 변천사가 아니라 인간 문명의 진화와 사회 구조의 변화, 그리고 젠더 정치학의 복잡한 궤적을 만날 수 있다. 신발은 그것을 신는 사람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소속을 알리며, 때로는 저항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신발은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지를 말없이 동행한다.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신발일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로맨스와 마법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동화 속 신발이 단순한 로맨스의 상징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어두운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초기 버전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살펴보면, 구두는 유리가 아니라 비단이나 금박으로 만들어진 섬세한 소재였다. 프랑스의 샤를 페로가 1697년에 '유리 구두(pantoufle de verre)'로 기록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버전이 탄생했다. 일각에서는 '모피(vair)'를 '유리(verre)'로 잘못 기록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학계에서는 페로가 의도적으로 유리를 선택했다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왕자가 사랑하는 이의 발에 구두를 조심스럽게 신겨야 한다는 설정은 성적인 각성과 관계의 시작을 은유한다. 너무 세게 밀어 넣으면 깨지는 섬세한 그릇처럼, 첫 경험은 신중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요구한다. 유리라는 물질의 투명성과 깨지기 쉬움은 순수함과 동시에 위태로움을 상징한다. 이는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의 섬세함과, 그 과정에서 필요한 배려를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다.
더욱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동화의 덜 순화된 버전들이다.
그림 형제가 수집한 독일 판본에서는 못된 언니들이 자신의 발가락을 잘라내어 구두에 맞추려 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장면은 충격적이지만,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했던 극단적인 순응해야하는 압력을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사회가 정한 기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몸 마저도 훼손하는 행위는, 당시의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억압의 은유로 해석할 수 있다.
잘린 발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로 구두가 빨갛게 물들었다는 이야기는 처녀성의 상실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 피와 결혼, 성적 경험의 연결은 많은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다. 이렇게 빨간 구두는 성적 상징으로서의 오랜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훗날 '레드 슈즈'라는 영화나 크리스티앙 루부탱의 빨간 밑창 하이힐이 가지는 상징성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국의 전족 관습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신발 관련 억압이었다.
10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천 년 동안 지속된 이 관습은 어린 소녀들의 발을 의도적으로 부러뜨린 뒤 꽉 조이는 천으로 감아 성장을 억제했다. 목표는 발을 연꽃 봉오리처럼 작고 뾰족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연화신(蓮花鞋)'이라는 특별한 신발을 신겼다.
전족의 과정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보통 여섯 살에서 여덟 살 사이에 시작되는데, 발가락을 발바닥 쪽으로 구부려 부러뜨린 뒤 천으로 단단히 감았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과 염증, 감염의 위험을 견뎌내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발은 점점 더 작아지고 변형되어 갔다. 이 과정은 수년간 지속되었고, 한번 변형된 발은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불과 7~8센티미터 길이의 이 작은 신발에 발을 맞추기 위해, 소녀들은 평생 지속될 고통과 장애를 감수해야 했다. 전족을 한 여성은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 항상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걸음걸이는 버들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흔들렸고, 이것을 '연보(蓮步)'라 하여 우아하다고 칭송했다. 하지만 이는 정상적인 보행이 불가능한 장애 상태를 미화한 것에 불과하다.
어처구니 없는 점은 이 극심한 불편함이 오히려 상류층의 표시가 된다는 점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유한 가문의 여성이라는 증거였던 것이다. 작은 발은 한가하고 여유로운 삶의 상징이 되었다. 남성들은 이렇게 작고 연약한 발을 성적 매력의 상징으로 여겼고, 전족은 좋은 혼처를 찾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다. 당시의 시와 문학 작품들은 작은 발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20세기 초 계몽운동가들과 외국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전족은 점차 금지되었지만, 관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에 전족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관습이 계속 이어졌다. 1950년대까지도 일부 지역에서 전족이 이루어졌고, 마지막 전족 여성들은 21세기까지 생존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중국의 일부 노인 여성들에게서 전족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기형적인 발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의 증거이자, 가부장제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통제하고 왜곡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였다. 전족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성들은 사회가 정한 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변형하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높은 하이힐도 결국 전족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는 '초핀(Chopine)'이라는 극단적인 플랫폼 슈즈가 유행했다.
1600년경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퍼진 이 신발은 처음에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유럽의 거리는 진흙과 오물로 가득했고, 비싼 드레스의 자락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중요했다. 베네치아는 특히 수로와 습한 기후로 유명했기 때문에, 신발을 높이는 것은 실제로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패션은 언제나 실용성을 넘어선다.
귀족 여성들은 곧 깨달았다. 키가 클수록 더 많은 비싼 천을 사용한 드레스를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을.
초핀의 높이는 점점 더 높아져서, 어떤 것들은 무려 36센티미터, 심지어 50센티미터까지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정도 높이의 신발을 신으면 혼자서는 걸을 수 없었다. 양옆에 시녀들이 부축해야 했는데, 이것 역시 부의 과시였다. 여러 명의 하인을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이었던 것이다.
파티에 입장할 때 초핀을 신은 여성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높은 곳에서 전체를 조망하며 매력적인 남성을 찾을 수 있었고, 대화를 나눌 때도 상대방이 올려다보게 만드는 심리적 우위를 점했다. 초핀은 단순한 신발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시각화하는 도구였다. 베네치아 정부는 초핀의 높이를 제한하는 법령을 여러 차례 발표했지만, 귀족들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더 높은 신발을 만들어 신었다.
남성들도 초핀이나 높은 굽의 신발을 신었는데, 처음에는 말을 타고 내리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지만, 곧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운 계급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프랑스 귀족 남성들의 빨간 굽 하이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불편함과 비실용성이야말로 특권의 증거였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는 높은 신발이 다른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평민들과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실용적인 도구가 된 것이다. 병균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믿었던 당시 사람들은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이 감염을 막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패션과 건강, 권력이 복잡하게 얽힌 이 시대의 초핀은 인간의 허영심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였다.
1895년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낡은 구두 한 켤레는 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분석된 신발 그림 중 하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노동자의 낡아빠진 작업화일 뿐이지만, 이 그림에는 화가의 삶과 철학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 그림에 대해 긴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구두는 심하게 닳아 있고, 곳곳에 수리한 흔적이 보인다. 가죽은 거칠고 주름져 있으며, 끈은 헐겁게 풀어져 있다. 이 구두에서는 땅의 냄새, 노동의 땀, 그리고 긴 하루의 피로가 느껴진다. 반 고흐는 이 구두를 통해 노동자의 삶과 그들의 존엄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신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좌우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뒤에 등장하겠지만, 1818년이 되어서야 미국 필라델피아의 구두 제조업자 윌리엄 영이 최초로 좌우 구분 신발을 만들었다. 그리고 혁신이 유럽의 서민층까지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유층만이 좌우가 맞춤 제작된 신발을 신을 수 있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여전히 좌우 구분 없는 값싼 신발을 신었고, 신다 보면 발 모양에 맞춰 변형되었다.
노동자들의 구두는 삶의 고난을 고스란히 기록했다.
수리를 거듭하다가 한쪽이 먼저 못 쓰게 되면, 그것만 버리고 새 구두 한 짝을 사서 멀쩡한 짝과 함께 신었다. 그래서 반 고흐가 그린 이 구두도 완벽하게 짝이 맞는 한 쌍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구두들은 아마도 농부의 것이었을 것이다. 땅과 직접 접촉하며 일하는, 정직한 노동자의 구두. 하이데거는 이 구두에서 "대지와의 연결, 노동의 신뢰성,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불안"을 읽어냈다.
반 고흐는 벨기에 보리나주의 가난한 광산 마을에서 사제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노동자 계급의 삶을 직접 목격했고, 그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광부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자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누구와도 오래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연애도, 우정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 쌍의 구두가 오랜 세월 함께하는 것처럼, 그도 누군가와 그런 관계를 갖고 싶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당연하게 좌우가 다른 신발을 신는다. 왼발용과 오른발용이 구분되어 있고, 각각의 발 모양에 맞게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보편화된 것은 불과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1818년 이전까지 대부분의 신발은 좌우 구분이 없었다. 똑같은 모양의 신발을 어느 발에나 신을 수 있었고, 신다 보면 각자의 발 모양에 맞춰 변형되었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구두공 윌리엄 영이 처음으로 좌우가 다른 신발을 만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회의적이었다. 제조 비용이 두 배로 들고, 재고 관리도 복잡해진다. 한쪽 신발만 망가지면 다른 쪽도 함께 버려야 한다.
하지만 신어본 사람들은 그 편안함에 감탄했다. 발의 자연스러운 곡선을 따라 제작된 신발은 더 편했고, 발의 건강에도 좋았다. 물집도 덜 생겼고, 장시간 걸어도 피로가 덜했다.
이 혁신이 전 세계로 퍼지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 부유층은 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값싼 좌우 구분 없는 신발을 신었다. 유럽에 이 방식이 도입되고, 다시 대중화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좌우 구분 신발이 점차 표준이 되었고,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보편화되었다.
이 작은 혁신은 산업화와 대량생산의 발전과도 맞물린다. 표준화된 신발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좌우 구분 신발의 생산 비용이 낮아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신발을 신을 수 있게 되었다. 신발의 민주화였던 셈이다. 이는 단순히 신발의 변화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편안하고 건강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인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신발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인간 문명의 복잡한 단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유리 구두는 순수함과 성적 각성을, 전족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초핀은 허영과 권력의 과시를, 반 고흐의 구두는 노동의 존엄성과 고독을, 그리고 좌우 구분 신발은 작지만 의미 있는 기술 혁신을 보여준다.
이처럼 신발은 단순히 발을 보호하는 도구가 아니라, 시대와 문화, 권력과 저항, 억압과 해방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역사책이다. 우리가 매일 신는 신발 한 켤레에도 이러한 긴 역사와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발걸음 하나하나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신발은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없이 증언하는 동반자인 것이다.
또다른 에피소드를 찾아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