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롬 Dec 09. 2018

닮아놓고서 닮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1월 첫 주

                                                                                                                                                                                                                                                                                                                                                                                        


0.
자식은 부모를 닮아놓고서 부모를 닮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1.
엄마는 미뤄둔 청소를 갑자기 시작한다. 가을이 다 오고 나서 가을 옷을 꺼내고 냉장고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음식을 찾지 못할 때가 돼서야 냉장고 청소를 시작하는 식이다. 엄마는 이미 시기를 놓친 청소를 자기만의 철칙을 지키면서 하느라 굉장히 느린 속도로 진행한다. 참 이상한 청소습관이 아닐 수 없다. 설거지 하나에도 지켜야 할 원칙이 있고, 옷장정리에도 엄마만의 노하우가 있으며, 냉장고 청소에도 요령이 있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음식 한 번 해보겠다고 부엌에 들어서면 엄마는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서 칼을 쥐는 법, 야채를 오래도록 보관하는 법, 간을 맞추는 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빨래를 갤 때도 수건을 왜 두 번만 접었냐는 잔소리가 날아온다. 워낙 늦게 시작하는 데다, 엄마는 한 번 손을 댄 집안일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완벽하게 해야 해서 늘 오래 걸린다. 오후에 시작한 집안일은 늘 밤늦게야 끝이 났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으로 가득 차 있는 옷장은 음식을 찾기 힘든 냉장고와 같이 쓸모가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살림에 소질이 없는 엄마를 닮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취를 하게 되면 뭐든 제 때 해야겠다고, 냉장고 청소도, 설거지도, 옷장 정리도 제 때 조금씩 끝내놓으면 엄마처럼 오래 걸릴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2.
서울에서 나 하나 누울 공간을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형교회가 운영하는 기숙사, 학교 기숙사, 고시원을 지나 정식으로 월세방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당시 나는 학교 수업에, 알바에, 각종 대외활동까지 병행하느라 내 방은커녕 나 자신도 돌보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었다. 학교 수업을 듣고 곧바로 이어지는 팀플 모임에 가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아침부터 수차례 무시했던 엄마의 전화였다. “딸, 엄마가 우리딸 집으로 가고 있어.” 엄마가 말을 더 이어가기도 전에 나는 소리부터 질렀다. “왜 말도 없이 오는 거야!” 엄마는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아침부터 간다고 전화 했는데 네가 받질 않아서….”하며 말끝을 흐렸다. 집안은 엉망이고 스케줄이 꼬여버린 내 하루도 엉망이고 내 머릿속은 더 엉망이어서 나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서 내 날카로운 목소리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 오늘 집에 밤늦게 들어가서 엄마 못 봐. 엄마가 말 안하고 온 거니까 엄마가 알아서 해.


그 날 하루 종일 몇 번인가 엄마 생각을 하긴 했다. 서울길 잘 알지도 못하는데 집은 잘 찾아서 갔나, 집 비밀번호를 오래 전에 알려줬는데 문은 잘 열고 들어갔나, 하는 생각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당시 나에겐 엄마를 만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많았다.


3.
밤늦게 돌아온 집은 아침에 나설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니, 환골탈태 수준이었다. 주방은 기름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설거지가 가득 쌓여있던 개수통은 비워져 있었다. 뱀의 허물처럼 방에 널려 있던 옷가지들은 장롱 안에 개어져 있었고 화장실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무렇게나 나와 있던 책들은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의자바퀴가 움직일 때 마다 걸리적거리던 전선들은 고무줄에 돌돌 말려서 바구니에 담겼다. 책상 밑에 놓여 있던 쓰레기통은 화장실로 가고, 대신 조그만 비닐봉지가 서랍 손잡이에 걸렸다.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화장솜, 영수증, 빈 과자 껍데기 등이 친절하게 비닐봉지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이사 온 이후로 한 번도 빤 기억이 없는 침대 커버는 깨끗이 빨린 채 방바닥에 널려 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 집안을 청소하느라 열심히 움직였을 엄마의 등이 그려졌다. 엄마의 손길이 닿아 말끔해진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정리되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그 기분을 굳이 설명해 보자자면 매일 잃어버리는 우산을 또 잃어버렸을 때처럼 익숙한 후회같은 게 몰려왔던 것 같다.


4.
어느새 자취 2년 반차다. 엄마의 살림습관을 닮지 말아야겠다고 해놓고서 나는 오늘도 밀린 청소를 해가 질 때쯤에야 뉘엿뉘엿 시작했다. 빨래를 갤 땐 수건을 세 번 접었다. 두 번만 접으면 꼭 수건 끝이 보관대 밖으로 삐죽빼죽 튀어나온다. 엄마는 그걸 참 싫어했다. 오늘 점심으로 김치볶음밥을 해 먹기 위해 양파를 썰 때는 칼을 잡지 않은 손을 둥글게 말았다. 엄마는 그렇게 해야 손이 다치지 않는다고 했다.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나서는 꼭 고무장갑을 빨래집게에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그래야 고무장갑에 물이 빠져 다음 번 설거지를 할 때 축축하지 않으며 고무장갑이 바짝 말라 있어야 설거지 할 맛이 난댔다.


다가올 12월을 위해 옷장을 열었는데 11월의 옷장엔 8월의 옷들이 가득했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닮기 싫었는데, 우습게도 그녀와 나는 철지난 옷장마저 닮아 있었다. 한동안 입지 않을 하얀 반팔 티를 개는데 왼쪽 약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도 여기에 점이 있었지. 자식은 부모를 닮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모를 닮는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