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소통의 기본인 것을...
결혼 19년 차, 가정주부. 요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아도 밥은 매일 먹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한다. 이왕 해야 하는 거라면 좀 더 맛있게 해 보자는 책임감이 생겨, 나보다 나은 유튜브 선생님들을 찾아 나선다.
요즘 나는 요리를 할 때 쇼츠 영상을 틀어놓는다.
예전엔 블로그를 참고했지만, 요즘은 짧고 빠르게 핵심만 전달하는 쇼츠가 더 편하다. 냉장고에 똑같은 재료가 없어도 대체할 수 있는 게 있으면 그걸 쓰고, 양념도 정확히 계량하지 않는다. 그냥 내 감대로, 대충.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 맛은 꽤 괜찮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이거 내가 했다고?"
하며 감탄하기도 한다.
이게 바로 내 요리 스타일이다.
물론 레시피대로, 정확한 재료와 정량으로 하면 더 맛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정성을 요리에 쏟을 만큼 요리를 좋아하진 않는다. 그런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게 있다면 바로 '베이킹'이다. 굳이 내가 만들지 않아도, 맛있는 빵과 쿠키는 가까운 빵집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빵은 매일 먹어야 할 필수도 아니니 관심이 없었다. 큰언니가 인천에서 제법 규모 있는 빵집을 하고 있어서, 빵이 생각날 때면 가끔 보내달라고 하거나 언니가 가져오는 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딸아이가 베이킹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새집으로 이사하며 오븐이 생긴 영향도 있는 듯하다. 처음엔 계란 흰자로 머랭쿠키를 만들더니, 이젠 마들렌, 피낭시에, 식빵, 멜론빵, 갈레트 브루통까지. 이름도 어려워 외우지도 못할 다양한 빵과 쿠키들을 척척 만들어낸다.
딸은 취미가 생기며 사달라는 것도 많아졌다.
다양한 도구와 재료들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점점 더 고급 제품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생활비에서 빠져나가는 지출이 만만치 않아 가끔은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베이킹에 임하는 딸아이의 태도는 나와 완전히 다르다. 정확한 계량과 순서, 레시피를 철저히 따진다.
갑자기 연락해서
"버터랑 우유 꺼내놔 줘!"
하고는, 내가 깜빡하면 신경질을 낸다. 그럴 땐 나도 화가 치밀지만 꾹 참는다. 유통기한 임박한 재료는 절대 쓰지 않겠다고 제외시키고, 비싸게 산 재료가 그냥 버려질 때도 많다. 그럴 땐 정말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딸이 베이킹을 할 때 아주 가끔 옆에서 보조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실, 그런 건 내게 너무 귀찮은 일이었지만 딸아이와 거리가 멀어지고, 학교 문제로 힘들어할 때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 노력한 방법이었다. 옆에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감탄사로 추임새를 넣고 아이가 좋아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본 것이다.
딸아이는 저울로 아주 정밀하게 재료를 계량하고, 온도계로 몇 번이나 온도를 체크한다.
재료가 조금이라도 덜 들어가거나 더 들어가면 작은 스푼으로 덜어내고 더 넣으며 정확성을 추구했다. 초콜릿의 온도나, 버터의 온도를 체크하고 어떤 것은 땀을 뻘뻘 흘리며 휘젓거나 반죽을 했다. 그럴 때면 난 옆에서 부채질을 해주거나 물을 데워주거나 그릇을 치우는 등 소소한 역할을 해 준다.
아이가 그렇게 정확하게 레시피대로 제과나 제빵을 하는 것을 보면 난 답답했다.
그냥 대충 눈대중으로 하면 될 거 같은데 하나하나 정확성을 기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어느 날 초콜릿이 들어가는 과자였나 보다. 아이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거품기를 계속 돌리는 통에 너무 시끄러웠다. 평소보다 비싼 초콜릿과 버터를 산 날이었다.
"그냥 좀 대충대충 해. 요리는 꼭 정확하게 하지 않아도 대충 그 맛이 나는 거야."
"아니야, 엄마는 만들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대충 하면 실패한다고!"
"요리가 거기서 거기지. 그냥 대충 해도 될걸?"
"아니야. 이건 반찬하고 달라. 온도가 안 맞으면 섞이지도 않고 완전히 실패하는 거라고!"
아이는 내게 짜증을 냈다.
순간 욱하는 마음에 한마디 더 보탤 뻔했지만, 아이의 눈과 비질땀을 바라보니 그 안에 진지함과 간절함이 보였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정성을 쏟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걸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건 결국 아이의 마음을 몰라주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많은 부분에서 ‘대충’이라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물론 그 안에도 나름의 감각과 경험이 있었지만, 그것은 나만의 스타일이었을 뿐이다. 반면, 아이는 ‘정확함’과 ‘질서’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한 채 내 기준으로만 바라본 건 아닐까.
유연함은 분명 삶을 편하게 만든다.
큰 실수 없이 어찌어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지혜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넘길 수 없는 것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정확성’이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 되기도 한다. 특히 딸아이처럼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을 가진 아이에게는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의 방식에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기로 했다.
내가 옳고 아이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다름을 존중해 주는 것. 어쩌면 진짜 소통은 그런 다름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다.
요리를 할 때마다 눈대중으로 간을 보고, 감으로 불 조절을 하며 살아온 내가 있고, 계량스푼을 몇 번씩 확인하고 정확히 180도로 예열된 오븐에 반죽을 넣는 아이가 있다. 우리는 다르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아이가 만든 쿠키를 한입 먹으며, 아이에게 칭찬했다.
"그래, 이건 내가 평생 만들어 볼 수 없는 맛이야. 채빈이가 이렇게 정학한 레시피로 쿠키를 구워서 더 맛있게 되었나 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