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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뉴스보다 더 큰 내 작은 사건

by 마음꽃psy

기다렸던 날, 불행이 찾아왔다.

6월 3일,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온 날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날이 되자, 마음은 전혀 들뜨지 않았다.

기다려온 결과가 주는 기쁨보다, 불현듯 다가온 내 불행이 훨씬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며칠간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탓일까. 괜찮은 줄 알았던 내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참아보다 투표하기 전날 병원을 찾았고, 의사와 약사의 설명대로 약을 복용했다. 안심이 되었다.


6월 3일 새벽, 알람에 눈을 떴다. 일찍 투표를 마치고 데이지꽃이 만발한 카페에서
친한 선생님들과 커피 한 잔 하며 한가로운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얼굴은 뭔가 이상했다. 피부가 딱딱하고 부은 듯한 느낌.
‘내가 예민한 건가?’

의심하며 아침 준비를 했다. 잠든 아들을 위해 좋아하는 카레를 만들고, 세수만 한 채 투표소로 향했다.

화장을 하려 했지만 얼굴에 열감이 느껴지고 피부가 지나치게 건조했다. 결국 선크림만 바르고 외출했고, 선생님 한 분이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샘도 갱년기세요? 얼굴이 많이 붉어졌어요.”

기대하던 데이지 카페는 생각보다 감흥이 덜했다. 블로그 속 사진과 똑같았지만, 역시 사진은 각도의 예술이었다. 그래도 꽃이 예쁘게 피고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공간에서의 대화는 즐거웠다.
날이 날이니만큼 정치이야기가 잠깐 나왔다. 우리 넷 중 한둘은 정치 성향이 달랐지만 우리는 투표 이야기는 애써 하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의 만남 자체로 충분히 좋았다.


점심 후 식당에서 약을 복용했다. 지시대로 식후에 복용했고, 피곤해서였는지 집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나 달콤한 낮잠 후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더 부어 있었다. 약의 부작용임을 직감했지만 병원과 약국은 모두 휴무였다.


인터넷을 뒤져 약 이름과 부작용을 확인했다. ‘얼굴 부종’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그게 나에게도 일어날 줄은 몰랐다. 얼굴은 부었지만 다행히 호흡은 괜찮았다. 그래서인지 위급한 상황이라고는 느끼지 못했다. 부기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며 출구조사 뉴스를 함께 기다렸다. 그러나 결과보다 얼굴이 더 걱정됐다.


내가 기다렸던 그 뉴스보다, 점점 더 붓기로 변형된 내 얼굴이 더 큰 공포였다. 시간이 갈수록 눈은 사라지고 코마저 납작해졌다. 피부가 터질 것 같았다. 그 상황에도 숨은 쉬어져서, 응급실 생각은 하지 못했다.

기다려온 날, 기다렸던 뉴스였지만 난 행복하지 않았다. 정치적 기쁨보다, 머릿속엔 약 정보와 부작용 사례만 가득했다. 아들은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엄마 얼굴이 너무 무서워. 어떡해?”
“엄마도 무서워. 선글라스 쓰고 마스크 하면 내일 나갈 수 있을까?”
“근데 절대 벗지는 마!”

그렇게 우리는 농담처럼 현실을 덮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다음 날 새벽,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겨우 연락이 닿은 선생님과 출근하기로 하고,
앞머리를 내리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최대한 가렸다. 화장시간이 줄어 평소보다 더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오신 선생님들께 얼굴을 보여드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모두 놀랐고, 걱정해 주셨다. 그 와중에도 농담은 끊이지 않았다.

“선생님, 이 얼굴로 상담하면 애들 놀라요. 나 살찌면 안 되겠죠?”
“선글라스 쓰고 있으니까 눈이 커피콩이네~”


단톡방 친구들은 왜 응급실에 가지 않았냐며 걱정했다. 난 그저 ‘안 아프니까’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무너진 얼굴을 보는 것은 무서웠다. 급한 일들을 해결한 후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작년과 같은 약인데 체질이 바뀌었거나 면역이 떨어졌을 수 있다”

며 큰 병원에서 알레르기 검사를 권유했다.


이삼일이 지나며 조금씩 부기가 빠지며, 원래의 내 모습이 조금 돌아왔다. 그제야 뉴스도 보고, 유튜브도 보며 좋아하는 진행자의 이야기에 웃을 수 있다. 이제서야 뒷북을 치고 있다.




누군가의 암보다 내 손가락 가시가 더 아프듯, 나라 전체가 들썩일 만큼의 큰 뉴스도 내게 닥친 불행 하나에 쉽게 묻히는 법이다. 기다려온 결과보다 더 절박했던 건, 내 얼굴에 벌어진 낯선 변화였고, 환희보다 앞선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하지만 그 불안 속에서도 나를 일으킨 건 가벼운 농담 한 마디, 함께 걱정해 준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시간이 지나 회복되어 가는 나 자신이었다. 일주일이 지나 안정이 된 나는, 비로소 그날의 뉴스에 반가움을 느끼고 늦은 환희의 박수를 조용히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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