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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들춰낸 <나는 생존자다>

by siwoorain

시청 내내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단전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고, 분노도 일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저렇게 취급할 수도 있다는 공포, 어디까지 썩은 것인지 감도 잡기 힘든 공권력을 향한 무력감, 그리고 이 모든 게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두려움. 시청을 접을까 싶은 순간마다 다시 화면을 마주하게 한 건, 용기를 내서 카메라 앞에 선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의 용기를 외면해선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공포를 이겨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정지 버튼을 누르다 재생하기를 반복하며 가까스로 엔딩에 도달했다. 넷플릭스 8부작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 이야기다.


《나는 생존자다》는 많은 사회적 이슈와 파장을 불러모았던 《나는 신이다》의 후속작이다. JMS(기독교복음선교회) 사건을 비롯해 형제복지원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지존파 연쇄살인 사건을 2화씩 8부작으로 다뤘다. 사이비 종교(JMS 총재 정명석, 오대양 사건 박순자, 아가동산 김기순,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라는 유사 소재로 묶인 전작과 달리 에피소드별 사건이 개별적이다.


다소 동떨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묶어내는 건 앞서 언급한 '생존자들'이다. 피해자가 아닌 유의미한 증언자로 이들의 위치를 전환시킨 데는 제작진의 의지가 큰 몫을 했다. "저희를 위해 증언해준 많은 분들은 단순히 피해자라고 부를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소중한 분들이고 존중받아 마땅한 분들인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나는 생존자다》라는 이름을 정했다"는 조성현 PD의 이 워딩은 버릴 게 하나도 없다.


국가가 키운 '형제복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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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의 문을 여는 '형제복지원 사건'은 '부랑인 선도'를 이유로 수천 명의 일반인을 불법 구금하고 강제노역을 강요한 인권 유린 사건이다. 황당한 건 부랑인에 대한 기준 자체가 애매했다는 점이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다가, 부모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골목길에서 놀다가 이유 없이 끌려간 억울한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렇게 끌려간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구타를 당했고, 강제노동을 강요받았고, 성 노리개가 됐다.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은 담요에 싸여 뒷산에 암매장됐다. 공식 집계 사망자만 657명에 달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거리 정화라는 명목하에 '인간 청소'를 지시한 것이 형제복지원 탄생과 성장의 좋은 빌미가 됐다. 직업군인 출신인 박인근 원장은 국가보조금을 지원받으며 자신의 부를 축적했다. 사람 수가 곧 보조금이었기에 박 원장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잡아 가뒀다. 이 과정에서 뒷돈을 받은 수많은 경찰이 형제복지원과 공조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여성 생존자들은 형제복지원 안에 있는 박인근 원장 가족들의 사택에서 집안일을 했다고 증언한다. 한 생존자는 예쁜 옷을 입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사는 박 원장 아이들을 보면서 '부럽다. 내가 저 딸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다고 회고한다. 이 에피소드를 보며 연상된 건 지난해 국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유대인이 죽어 나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담장 너머로 나치 장교 루돌프 회스의 평화롭고 목가적인 사택이 펼쳐져 있던, 이질적이고 야만적인 풍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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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현재진행형인 이유는 그들을 가해했던 그 누구도 지금까지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해자 박인근의 조카는 사과를 받기 위해 호주까지 찾아온 생존자와 취재진에게 사과 대신 다음과 같은 말을 던진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이미 50년도 넘은 일 아니에요?" 지난해 정부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승소한 국가배상소송을 기계적으로 항소하며 논란을 낳기도 했다. 이 와중에 박 원장을 비롯한 형제복지원 가해자들은 가벼운 처벌만 받고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당시 벌어들인 범죄수익금은 지금도 박 원장 가족에게 윤택한 삶을 안기고 있다.


다만 여러 유의미한 접근에도 '형제복지원' 편은 전작이 그랬듯 보도 윤리(재현 윤리)에 대한 여러 논란을 부를 것으로 보인다. 다큐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게 과거의 유니폼을 입히고, 과거의 공간이 재현된 곳에서 인터뷰를 진행한다. 출연자들의 동의하에 진행됐다고는 하지만 생존자들이 느낄 트라우마에 대한 접근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네 개의 사건 관통하는 '돈이라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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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이다》 공개 이후 JMS의 상황을 담은 3∼4부는 JMS의 2인자 정조은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암세포처럼 퍼져 있는 JMS 신도들을 폭로한다. 이들이 장악한 범위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방송국은 물론이고 경찰, 검찰, 국정원 등 국가기관에 기생 중인 신도들의 면면이 충격적이다. JMS 신도인 경찰이 JMS의 본거지인 충남 금산 내 경찰서 여성아동폭력전담 경찰로 위촉됐다는 사실엔 간담이 서늘해진다.


삼풍백화점 참사 편에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망각돼가는 게 두려워 출연을 결심한 생존자들의 인터뷰가 울림을 안긴다. 삼풍백화점은 공사 과정에서 비용을 아끼기 위해 수시로 설계를 변경했다. 80cm였던 기둥 굵기를 60cm로 변경하고 그 속의 철근 개수도 줄였다. 이 과정에서 삼풍백화점은 눈을 감아주는 대가로 인허가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에게 수시로 떡값을 쥐여줬다. 502명의 생명을 앗아간 삼풍백화점 참사는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생존자들은 이러한 거대 참사는 망각하면 반복된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삼풍백화점 참사는 장소를 바꿔서, 이름을 바꿔서 계속 출현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라는 이름으로, 오송 지하차도 참사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순살 아파트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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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존자다》가 다룬 형제복지원, JMS, 지존파, 삼풍백화점 네 사건을 꿰는 건 '돈이라는 욕망'이다. 형제복지원과 경찰이 부랑자를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데는 국가보조금이라는 돈이 있었고, JMS 정명석이 수감된 후에도 이 조직이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정조은을 비롯한 비호 세력들의 돈을 향한 집념이 있다. 지존파 연쇄살인은 돈과 계급에 대한 분노가 왜곡되면서 벌어진 범죄. 삼풍백화점 붕괴는 규정과 법들을 무시한 채 너도나도 돈을 더 벌기 위해 눈감은 선택들이 모인 결과였다.


다큐의 마지막 부분, 조성현 PD는 삼풍백화점 생존자에게 묻는다. "항상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세요?" 생존자가 말한다. "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는 않다고요. 특히나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는 모두 생존자다'라는 자막은 강한 어퍼컷을 날린다. 이 살얼음판 같은 대한민국에서, 우린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


('시사저널'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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