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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Jun 05. 2023

나영석 PD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침착맨>에 침투한 산업스파이

“단순히 본인이 심심하단 이유로 방송 틀어놓고 게임하던 우리 양반이 이제는 대한민국 TOP급 피디에게 천재 소리 들으면서 컨설팅을 해준다? 진짜 가슴이 웅장하다 못해 우주여행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 양반’은 유튜버로 활동하는 웹툰 작가 이말년. ‘TOP급 피디’는 나영석이다. 그리고 위의 글은 이말년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침착맨-나영석 초대석> 편에 달린 베스트 댓글이다. 이 댓글은 어느 각도에서 보든 옳다. 동시에 흥미롭다. 해당 유튜브 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것이다. 컨설팅 받는 주체가 이말년이 아니라 나영석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주제를 두고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솔직하고 깊어서다. 이 와중에 재미와 인사이트까지. 2시간 38분의 대화가 말 그대로 ‘순삭’이다.      


댓글 맥락에서 먼저 주목할 건 산업스파이를 자처한 나영석 PD의 태도다. 나영석이 누구인가.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받던 예능 장르를 메인 스트림으로 끌어올린 예능 천재. <1박 2일>로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를 연 선두자. ‘밥 짓고 먹는 것만으로 예능이 가능해?’라고 대다수가 의문을 표한 프로그램으로 방송가 트렌드를 바꾸며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된 남자 아닌가. 존재가 곧 명함인 PD가 몸을 한껏 낮춰 “전문 유튜버는 어떻게 하나 배우로 왔다”고 고백하고, 상대의 말에 경청하는 모습에서 나영석이란 사람의 열린 자세가 감지된다. (나영석은 이후 “지하 격투장에서 외줄을 타라”는 침착맨의 가르침을 바로 자신의 유튜브 <채널 십오야>에 적용하는 실행력 보여줬다.)


알려졌다시피, 예능은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야다. 하나의 콘셉트가 인기를 끌면 이를 모방한 작품이 우후죽순 생기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창의성 없는 모방만큼이나 문제는 이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관성적인 업계 분위기다. 이런 세태 속에서 나영석은 트렌드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안에서 대중과의 교집합을 찾아온 사람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기세가 들끓던 시절, 나영석은 “이 프로그램 망한다”라고 너스레 떠는 이서진을 강원도 정선에 데려가 농사짓게 했다. 돌아온 건 시청자들의 환대와 높은 시청률이었다.      


과장이 심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영석 예능을 보며 디즈니-마블의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 세계관을 떠올리곤 한다. ‘나영석버라이어티유니버스(NVU)’ 쯤으로 하면 되려나. MCU가 수장 케빈 파이기를 중심으로 ‘히어로들의 따로 또 같이’란 혁신적인 전법을 선보였다면, NVU는 나영석을 중심으로 뭉친 창작자들이 포맷 변주와 공간 이동을 통해 지속 가능한 시즌제를 예능 시장에 정착시켰다. 후배 PD들과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 가동’하는 협업 플레이 또한 마블의 그것과 닮은 지점이다.      

MCU 히어로들이 시공간을 넘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듯, NVU 콘텐츠 역시 후속작 탄생에 거름이 돼 왔다. <꽃보다 할배>가 <꽃보다 누나>를 낳고, 여기에서 파생돼 <꽃보다 청춘>이 피는 식이다. <신서유기> 외전으로 나온 <강식당>이 <윤식당>으로 <서진이네>로 이어지는가 하면, 농촌과 어촌과 목장 등을 오가며 세를 불린 <삼시세끼> 시리즈에선 독립된 세계를 주도하던 차승원과 이서진이 주인과 게스트로 만나 하나의 프레임에 담기기도 했다.     


숏폼 콘텐츠를 안방으로 안착시키려는 기운이 일어날 때, 선봉장 역할을 하며 이 분야에 먼저 깃발을 꽂았던 것 역시 나영석 PD다. 5분 분량으로 tvN에 편성되고, 방송 후 풀 버전이 유튜브로 공개됐던 <신서유기 외전: 삼시세끼-아이슬란드 간 세끼>는 편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후 나영석 PD는 tvN <금요일 금요일 밤에>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15분짜리 6개 숏폼 프로그램을 한 바구니에 담는 파격적 구성의 예능이었다.      


KBS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나와 CJ E&M에서 변화를 시도하고, 인터넷에도 몸을 실으며 매체 환경에 감각적으로 대응해 온 사람. 일련의 행보에 대해 <침책맨>에서 그가 한 말이 깊게 남는다. “남들은 이 정거장에서 내려서 다른 기차로 옮겨 타는데 나만 혼자 이 자리가 편하다고 계속 앉아 있으면 뒤처질 수 있잖아요. 잘 되든 안 되든 먼저 가서 경험은 해봐야 나중에 급박하게 바뀔 때 적응을 할 수 있으니까. 보험을 거는 거죠.” 변화하는 대중의 니즈를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흡수하려고 자세에서 오랜 시간 자신의 영역을 넓혀 온 사람의 마음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것도,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물리기 마련이다. 몇몇 변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나영석 PD는 ‘자기복제’라는 비판에 직면해 온 게 사실. 이러한 목소리에 대한 나영석의 선택은 정면 돌파다. <침착맨>에서 스스로를 ‘자가 복제의 아이콘’이라고 셀프디스한 나영석은 “연출자는 지금이 전성기야, 가 느껴지는 시기가 있어요. 내가 지금 세상과 싱크로가 완전히 맞아있구나, 라고 느끼는 시기가. 그 시기가 지나고 나와 세상의 싱크로가 안 맞는구나를 느끼고 있어요”라고 고백하면서도 “노욕 때문에 옛날의 영광을 다시 더 누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자기 안의 욕망도 솔직히 드러냈다. 눈여겨볼 건 이 욕망이 단순히 말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뿅뿅 지구오락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신개념 하이브리드 멀티버스 액션 어드벤처 버라이어티를 표방한 <지구오락실>은 잘라 말해 <신서유기>의 여성 버전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정리하면 뭔가 또 부족하다. 웃음이 터지는 포인트가 <신서유기>는 물론, 기존 나영석 PD 예능과 다르기 때문이다. 매력의 요체는 제작진과 출연진의 관계 역전. MZ 세대 출연진에게 쩔쩔매는 영석이 형은 게임의 주도권을 쥐고 출연진들을 구워삶았던 과거의 영석이 형과는 분명 다르다.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서의 기막힌 줄타기. NVU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궁금한 이유다.     

 

그리고 이말년이다. 나영석으로 하여금 이 모든 마음의 소리를 풀어내도록 하고,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알게 모르게 끄집어낸 진행자. 진행을 한다는 건 질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말년은 훌륭한 인터뷰어다. 시의적절한 리액션도 좋지만, 박진감 있는 외줄 타기하는 질문의 수위 조절도 놀랍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건, 편견 없음. 나영석이 타인의 의견을 편견 없이 듣는 능력을 지녔다면 이말년은 편견 없이 질문하는 재능을 지닌 듯하다.      


일례로 ‘지식의 저주(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알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상태)라는 게 있다. 배우를 주로 인터뷰해 온 내가 종종 빠지기도 하는 오류인데, 그에겐 그런 게 없다. 사실 이것은 크게 느꼈던 건 게스트로 나왔던 배우 박정민에게 이말년이 던지는 질문을 보면서다. 편견 없이 던지는 질문에서 다양한 답이 나오는 걸 지켜보며 반성한 기억이 있다. 과학자부터 이집트 전문가 등 전문 분야 게스트가 나왔을 때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던 것 역시, 지식의 저주에 갇히지 않고 대화를 이끈 이말년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번 나영석 편이 풍부하게 다가왔던 것도.      


친목을 위해 체육대회를 하자고 팀원들에게 질러 놓고선, MZ 세대 후배들로부터 꼰대 소리 들을까 봐 걱정돼, 천만 원 상당의 경품을 준비 중이라고 털어놓는 나영석의 인간적인 TMI는 또 어디서 들을 수 있겠나. 좋은 대화란 이토록 귀하다.      


(퍼스트룩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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