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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Mar 18. 2019

백수의 소개팅

나조차 설명하기 힘든 나를 그래도 만나보시겠어요?

안녕하세요, 차 선생님 소개로 연락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서울이신가 봐요. 전 부산에 있습니다.

네 전 고향은 마산인데 서울에 올라왔어요.

서울에서 쭉 계신 건가요??

네, 당분간 내려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언제쯤 내려오시나요? 안 되면 한번 올라갈 수 있게 시간 잡아봐야겠네요.



연애할 사람은 없는데 소개팅을 주선해준다는 사람은 많다. 


어른이 나서서 소개팅을 주선해 주시는 경우에는, 조심스럽고 또 최대한 예의를 갖추게 된다. 이번에는 좀 특별한 인연인 것이, 2년 전 키르에 여행 오신 차 선생님 지인분이 그 아드님을 소개해 주신다고 하신다. 한창 봉사활동을 하며 자유로운 영혼이었을 때, 머리 흩날리고 몸빼바지 입으며 방방 뛰어다니던 시절, 그때의 나를 예쁘게 봐주시다니. 이제야 기억이 나는데, 그 때에도 그분은 아들 사진을 꺼내 보이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들 만나보라고 말씀하셨다. 한참이 지나서도 말씀을 잊지 않고 이렇게 연락을 주신 것이 새삼 그 인연이 소중하게 느껴져 감사하다.


그런데, 사실 마음이 무겁다. 무엇보다 연애를 시작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고, 또 직업이 없는 백수 신분이라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렇기 때문이다.


직업이 없어서 안 좋은 점은,
나를 설명하는 말이 길어진다는 거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를 말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첫째로 내 이름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로 내 소속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할 수가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참으로 장황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도 그랬다.      


얼핏 들었는데, 취업 준비를 하신다고요.

네... 제가 직장을 그만두고 봉사를 떠났어요. 봉사를 가게 된 계기는 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떠나게 된 게 큽니다. 가서 사니까 너무 평화롭고 좋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봉사를 하며 살까 하다가, 아, 사실 한국에 돌아와서 또 바깥에 나가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지연이 됐고, 한국에 있다 보니까 한국이 너무 좋은 거예요. 게다가 이 나이에 봉사든 무엇이든 너무 세상 물정 모르고 바깥에서 혼자 여유롭게 지내는 건 아닌지 죄책감도 들고, 하하, 저도 아무래도 한국 사람인가 봐요. 죽어라 24시간 일하는 게 싫어서 한국을 떠났는데, 또 그렇게 하고 있지 않으니 불안하고 청춘이 아깝고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말이에요, 아무래도 지금 나이에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서 지금은 취업을 준비 중입니다.

아, 네...      


실컷 얘기를 하긴 했지만 그다음으로 이어지긴 힘들었다. 상대로부터 약간의 당황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사실 상대방이 실제로 그렇게 느꼈든지 아니든지 간에, 내가 듣는 이를 당황스럽게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지레 겁먹게 해서 어서 빨리 조금의 호감이라도 거둬내 버리고 싶은 심보랄까.       




어렵게 만나게 된 자리였다.


차 선생님께서 한국에 잠깐 귀국하셨을 때 친구분을 만나 뵙게 되셨고, 내 얘기가 나왔던 모양이고, 그래서 차 선생님이 갑작스레 내게 연락처를 줘도 되냐고 물어보셨다. 그게 한 몇 주 전쯤인 것 같다. 딱히 거절할 만한 이유는 없어서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중간에서 차 선생님이 고생해주시는 것 같아 감사해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솔직히 그렇게 내키지는 않았다.       


게다가 알고 보니 상대방은 부산에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서울에 있다. ‘어른들이 소개해 주셨으니, 일단 만나보긴 해야겠는데...’ 둘 다 이런 의무감이 있었던 지라, 어떻게든 한 번은 만나야겠단 생각은 하긴 했나 보다. 하지만 애먼 거리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며칠 전 그분께서 서울에 올라오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상대방은 일하느라 바쁘신 분이고 나는 일이 없으니, 내가 내려가서 보는 게 맞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왠지 막 여자 쪽에서 그렇게 하는 것도 남자 쪽에서 부담스럽겠단 생각도 들어서 내심 올라와주길 기다렸는데, 다행히도 먼저 그런 말씀을 꺼내 주셨다. 우리는 서울에서 보기로 했다.      


'서울에까지 올라오셨으니 그 시간과 노력과 정성이 아깝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이드까진 아니더라도 완벽한 에스코트를 해 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동선과 맛집 정도는 생각해 놓아야겠지. 밥도 내가 사고 차도 내가 사 드려야지. 어디를 가지? 뭐든 잘 드신다고 하니... 최대한 무난한 게 뭐가 있을까? 산책 코스는 어디로 할까? 한강을 걸을까 남산을 갈까 청계천을 걸을까. 산책을 안 좋아하시면 어떡하지? 전시회 같은 걸 구경 갈까? 서울까지 와서 영화를 보는 건 좀 아니겠지?’      


나는 약간 불안한 기운을 감지했다. 막상 그쪽에서 서울에 올라오겠다는 말을 들으니, 이제 그게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걸. 서울까지 왕복 6~7시간, 교통비까지 계산해 보면 결코 그냥 소개팅처럼 밥 먹고 차 마시고 하는 걸로 끝낼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분이 ‘서울까지 온 보람이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사실 그건 서울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장거리 연애도 하는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옆에서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신뢰관계가 있는 사람들 간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장거리 연애를 하는 것과, 애초에 모르던 사람들끼리 신뢰를 쌓기 위해 애써 장거리를 오가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후자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라는 끊임없는 이해타산을 하게 된다. 먼 거리는 성격, 단점, 습관 등 사랑의 장벽이 되는 수많은 조건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진입장벽이 되어버린다.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가치가 먼 거리를 극복할 정도라야 만이 겨우 얼굴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평소에도 소개팅은 나에게 큰 부담이었는데, 이젠 백수의 신분, 게다가 먼 거리까지 더해 완벽한 3종 세트가 되어 나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생각했던 밥집들이 브레이크타임에 걸려 몇 군데나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나는 좀 당황했다.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내 불안한 기색을 눈치채고 상대방은 연신 "괜찮아요, 서울구경 하러 온 게 아니니까요."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려고 노력했다.


결국 여차 저차 해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래저래 서울 구경을 했다. 하루가 끝난 것이 다행이랄까. 하지만 이번 소개팅이 다시 또다른 만남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사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사실 소개팅 자리는 어쩌다 보니 취업 상담소가 되어 버렸다.


그는 고맙게도 나에게 맞춰, 우리의 대화 주제는 가면 갈수록 취업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그가 몇 년 전 겪었던 취업과 이직을 했을 때 시절을 들춰내 보이며,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나에게 어떤 조언이라도 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노력이 감사할 따름이다.      


나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렇게 술술 내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어쩌면 다신 안 볼 사이, 오늘이 끝나면 더 이상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래서 오히려 더 쉽게 내 이야기를 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는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었고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랑 어울릴 수 없다고,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할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는 항상 연애가 1순위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뭐 공부나 일을 잘한 것도 아니지만요. 사실 지금도 연애보단 일을 찾는 게 먼저네요.

줄곧 자신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제가 보기엔 그게 오히려 현실적인 모습인 것 같은데요. 일단 먹고사는 문제가 급선무라는 말이니까요.      


내가 스스로 너무 꿈만 먹고사는 사람 같다는 자평을 하며 이야기를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해줬다. 그런데 이상하게 위안이 되는 거다. 내가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주변에서도 항상 그런 걱정을 했기 때문에, 내가 현실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굉장히 신선하게 들렸다.     




그는 이따금 주옥같은 말들을 내뱉었다. 오죽하면 내가 그분에게 글을 쓰거나 유튜브를 해 보시라고 권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취업 고민을 제외하면 소개팅 자리 내내 오히려 듣는 쪽이었다.


그런데 유독 별 말 아닌, 지나가는 말처럼 그가 했던 말 중에 너무나 공감이 되었던 말이 있다면... 그래서 울컥한 말이 있다면, 그가 했던 말이 만약 글이었다면, 그래서 북마크라도 해놓고 싶었던 말이 있다면.     


어쩌면 벼리 씨는 보기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을 견뎌내느라 애쓰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순간 잠깐 동안 그의 눈동자와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내 고민을 얘기하면서도 알량한 자존심에 위로 따윈 받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를 이해해주려는 진심 어린 노력을 듣고 나니 스스로 기꺼이 동정의 대상이라도 되고픈 마음이었다.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의 말을 이렇게 글로 옮겨 놓으니 굉장히 평범한 말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그런데 그땐 왜 그리도 특별한 말처럼 들렸는지.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라서 그랬던 걸까. 나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조차 갈구할 만큼 타인의 이해에 목말라 있었던 걸까.


그날의 분위기에 따르면, 그의 말은 우리의 대화 말미에 쉼표를 찍고 또 마침표를 찍는 말이었다.      




좋은 꿈 꾸시고!! 다 잘 풀릴 거예요.ㅎㅎㅎㅎㅎ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나눴다. 다 잘 풀릴 거라는 그의 말이 굉장히 따뜻하게 들렸다.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지라도 어쩌면 기억에 남는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렇게 몇 마디 위로의 말들만 기억나는 걸 보면 내가 했던 맛집 고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나는 과연 그분에게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라는 고민은 다시 되돌아가, ‘나는 과연 그분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 말을 해줬을까’라는 고민이 되었다. 이미 지나가버렸지만 가장 후회되는 건 그거다.


난 아직까지 매사에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짧은 만남. 백수라는 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겁 많고 강한 보호본능으로 꽁꽁 무장한 내 모습을 발견했던 날이기도, 내가 과연 상대방을 배려한 맞은편의 대화 상대였는지 반성하게 되었던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소개팅이란 게, 연애, 결혼이란 게 나에겐 한참 뒷전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은 날이었다.


조금은 씁쓸했고, 왠지 모를 아쉬움과 후련함이 동시에 들었던, 이상하게 뿌듯한 마음이 여운으로 남는, 어느 소개팅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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