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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Sep 19. 2024

내 나무에 올라간 미친놈들 이야기

아파트라는 건 무엇인가.

그 뜻은 모른다. 그냥 어디서 한번쯤 들어는 본 것 같다.

놀이터는 학교에 있다. 그 대신 집에서 300미터 쯤 떨어진 고물상을 놀이터라고 불렀다.


우리집에 전화기는 있었지만 전화번호는 모른다. 친구네 집 전화번호도 당연히 몰랐다. 그냥 놀러가서 있으면 노는거고 없으면 다른 데로 가면 되는 거였다.


각자 어떤 순서로 들린건지 모르겠지만 우리집에 차례로 다섯명이 모여들었다.

시오의 친구들이다.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야 너 친구 또 왔잖아!"


듣던 엄마가 혼낸다.

"너 누가 오빠한테 야라 그래, 어?"


저 새낀 오빠가 아니다. '야'가 맞다. 그래봐야 5분 먼저 태어났다.

입이 댓 발 나와서는 중얼중얼 입 주변에서만 맴도는 욕을 하고선, 그래도 누가 왔다고 운동화 찍찍이도 안붙이고 털럭털럭 끌며 서둘러 나갔다.

그새끼들은 나무를 타려고 작전회의 중이었다.


우리집 앞마당에는 아주 작은 연못이 있고, 그 뒤엔 개집이, 그리고 그 왼쪽으로 평상과 아주 큰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어찌나 크고 단단한지 내가 아무리 돌을 던져도 끄떡도 안했다.

내 언젠간 너를 흔들 수 있는 힘을 키우리. 나만 공격할 수 있고 나만 너를 쓰러트릴 것이다.

그런데 나의 그 나무를 올라 타겠다고?


나완 다르게 남자애들은 잽싸게 나무를 올라갔다.

별로 오르고 싶진 않았지만 내가 못하는 걸 하니까 약이 오른다.

엄마한테 일러바치러 들어갔더니 엄마는 이미 시장에 가버리셨다.

언제 갔어? 나도 데리고 가지.. 칫...


다시 나가서 나무의 동태를 살폈다.

굵은 가지들마다 애들이 하나씩 올라타있다.

미친놈들 거기서 술래잡기를 한댄다. 미친놈들 진짜 미쳤구나.

저거를 가서 일러야 하는데 시장까지 가는 길을 모른다.


그러는 동안 게임은 시작됐다.

우와앍 아악거리는 미친놈들의 고함소리가 집마당에 쩌렁쩌렁 울리고 옆집 개새끼가 악!악!대며 끼고싶어 안달난 소리를 낸다.

흥분한 개가 주변을 뱅뱅 거리니 쇠사슬 목줄이 서로 부딪혀 처렁처렁

지 집을 드르르륵 긁다가 다시 처렁처렁.

저렇게 짖는데 저 할머니는 나와보지도 않네. 할머니 나오기만 해 아주. 내가 다 일러버릴거야.

나는 화가 난건지 재미가 있는건지 모르겠다.

다시 관중모드.


술래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나무가 제집인냥 샤샤샥 돌아다녔다.

한명이 이쪽 가지에서 저쪽 가지로 넘어가려 한다.

기둥을 부둥켜안고 발을 옮기던 중에 그대로 주루룩 미끄러져 내려왔다.

술래 체인지.

그놈은 옆구리와 배 사이가 발갛게 긁혔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렇지도 않다.

"아 씨 신발 짝짜나!"

못하면 장비탓. 역시.


술래잡기는 절정에 다다르고 있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움직임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저새끼 떨어질거 같은데.

와씨 안떨어지네.

왜 안떨어지지? 어?


한 명이 가지 끝으로 내몰려 술래를 피해야 하는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이다.

양손으로 발 밑 가지를 꽉 잡고 몸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파닥파닥 흔들흔들

몸에 반동을 주며 휙 날아 앞 가지로 착지.

"우와!!!!"

모두가 놀라워했다.

그런 식으로 가지를 옮겨탄 최초의 인물이었다.

영웅이었고 원숭이 그 자체다.

그러나 덜 여문 원숭이는 착지 후 손을 둘데가 없다.

어어!? 어? 어어어어어어!! 아아아!!

기우뚱 기우뚱 외줄타기 묘기를 부리다가 그대로 떨어졌다.


다시 술래 체인지.


헌데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놈은 술래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어딘가 부러졌거나 깨졌을 테지만 우리 모두는 그런 모른다.

그냥 떨어져서 아프니까 울고 있는 원숭이다.

"넌 그냥 집에 가."

무심한 녀석들. 어쩜 그래.

그러나 원숭이는 울고 있을 뿐이다.

나무 위의 다섯 멍청이들은 멀뚱히 내려다보며 게임을 언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이제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온다.

어떤 놈은 포기를, 어떤 놈은 라스트팡을 원하며 여전히 긴장중이다.


시오가 말했다.

"야, 야, 내가 술래! 한다? 한다!?"


원숭이가 울거나 말거나 라스트팡이 시작됐다.

약간은 떨떠름한 움직임이 어쩐지 이들의 자유분방함을 제어하는 것 같더니 약속도 없이 한 가지에 네 명이 모여버렸다.


술래를 자처한 멍청이는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상황인지 계산도 없이 끼룩끼룩대며 마귀할멈처럼 그들에게 기어갔다.

1타4피를 목전에 둔 완벽한 승리자였으리라.


퉁!


갑자기 커다란 진동과 함께 가지가 기울어졌다.

"안돼! 가지 꺽어질라그래!"


아니다. 그 가지는 너무나 굵고 이미 기둥과 하나가 된 최강 나뭇가지다.

진동은 뿌리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잠시 멍청이들의 멍청한 눈빛교환시간.

3

2

1

쩌걱!

나무 뿌리가 뽑혀나와 흙알갱이를 메달고 작은 밀림을 보인다.

푸우우우우우우우

나무가 기운다.

통째로 넘어가고 있다.

그 큰 나무가 우리집 마당 한가운데로.

연못이 있고 개집이 있는 현관 앞으로. 내 앞으로.

풀썩!

나무가 뽑혔다. 큰 나무가 쓰러졌다.

마당이 아수라장이 되고 나는 울고 말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트럭이 우리집 앞골목으로 들어와야했을 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했다.

골목 귀퉁이의 푹 꺼진 웅덩이들을 판으로 덮어줘야만 트럭이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그렇게 큰 자동차는 처음 봤다.

그렇게 우리집 큰 나무가, 너를 차지하겠다는 나의 소원을 이뤄주지 못하고 트럭에 실려 넘실넘실 가버렸다. 내가 돌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약해지지 않았을텐데. 미안했다.


나무의 자리로 개집을 옮겼다.

옆집 개와 너무 가까워져서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날마다 왈왈 곽곽 싸우고 지랄이다.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는 한동안 볼수가 없었다.

메뚜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원숭이와 마주쳤는데, 뭐하고 살았는지 물어볼 여유가 없을만큼 메뚜기가 풍년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다음해부터 그 자리의 옆 비파나무에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다.

엄마 몰래 개집에 들어가 앉아 사이좋게 비파를 뜯어먹던

나의 1987년 어느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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