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영화의 지도자 윤기정 11.
전국에서 카프 맹원들이 속속 잡혀 들어와 조사를 받았다. 예비검속 혹은 각종 사건과 관련하여 이전에 경험한 일제 경찰의 조사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따귀를 때리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식의 구타와 폭력을 넘어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일본인 고등계 주임의 지휘 아래에 발가벗겨진 채 손발이 묶여 공중에 매다는 ‘비행기 태우기 고문’과 그 상태에서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코에 들이붓는 ‘물고문’이 이어졌다. 윤기정은 몇 번이나 졸도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일제 경찰은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길까 봐 허리끈을 빼앗아갔기에 죽을 수도 없었다.
카프 맹원들은 여러 감방에 분산 수감 되어 있었다. 심한 고문과 구타로 혼미해지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줄줄 흘러내리는 바짓단을 한 손으로 꽉 잡고 눈에 힘을 주었다. 어느 날 취조를 받고 끌려가는 카프 수원지부의 박승극이 보였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오?”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초주검이 된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당시 박승극은 수진농민조합사건으로 취조받고 있었는데 그가 있던 감방에는 시인 권환이 수감되어 있었다. 몸이 약한 권환은 심한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감방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결국 상태가 심각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권환과 박영희 등은 병보석으로 먼저 감방을 나갔다.
고등계 형사들은 카프 관련 사항으로 시작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 관련한 사항들을 물었다. 1928년 2월에 있었던 제3차 공산당(ML당) 사건 당시 체포되지 않았던 인물들이 이후 도쿄와 조선에서 공산주의 선전의 비밀 결사인 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였는데 카프의 핵심 인물들이 이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의 핵심인물은 고경흠이었다. 그는 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일본 도쿄에서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는 도중 오사카역 부근에서 수갑을 찬 채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하였고 상해로 밀항하였다가 만주와 조선을 거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 잠입한 그는 김치정, 김삼규, 이북만 등과 함께 무산자사를 설립하고 김민우라는 이름으로 ‘민족 단일 전선론’에 관한 팸플릿을 발행하였다. 이는 민족 단일 전선에 있어 민족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면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신간회 해소의 이론적 배경이 된 이 작은 팸플릿 하나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지방의 신간회 지부에서부터 신간회 해소의 선풍이 불기 시작했다. 결국 1931년 서울의 신간회 본부와 서울지부도 해소를 결정하였다. 이를 카프 소속원인 박영희, 임화, 윤기정 등이 주도했다.
신간회 해소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던 일제 경찰은 이들의 뒤에 고경흠을 비롯한 ML당 계통의 인물들이 있음을 확신했다. 카프에서 도쿄로 파견한 임화 등은 무산자사 멤버들과 교류하였다. 1930년 임화와 이귀례, 김남천이 서울로 돌아와 청복키노에서 활동하였고 같은 시기 일본에서 돌아온 안막이 청복극장을 세워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종로서에서는 형사를 붙여 도쿄에서 온 이들 카프 맹원들을 감시하며 고경흠 등을 체포할 기회를 노렸다. 이 과정에서 청복키노에서 제작하고 있던 <지하촌>의 투자자에게 압력을 넣어 영화가 완성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때 신간회 해소를 윤기정을 비롯해 임화, 박영희 등 카프 소속원들이 주도해 나섰고 이와 관련한 전단이 서울 시내 학교에 뿌려졌다. 일제 경찰은 이들을 체포하여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자협의회와의 관련성을 취조하였다. 그 사이 고경흠이 일본에서 체포되었다.
카프의 핵심 인물들 대부분이 감옥에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조선일보사의 사회부장으로 있던 김기진이 체포되어 들어왔다. 그 역시 ML당의 재건을 위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관련 조사를 받았다. ML당 사건으로 복역 중인 조각가 김복진의 동생인 그는 몰래 서울로 잠입한 고경흠과 김봉열, 서인석 등 ML당 소속의 혁명가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고 심지어 그들의 활동비까지 제공해 주었다. 고문을 받아 의도하지 않은 진술을 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히지 말자고 생각한 김기진은 단식을 시작했다.
종로서에서는 김기진에 대해 그렇게 열심히 조사하지 않았다. 이미 윤기정을 비롯해 박영희, 임화 등 카프 맹원들이 죽음을 넘기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어느 하나도 발설하지 않아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등계 형사들은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해 검사국으로 넘기려 김기진에게 앞서 맹원들이 진술한 내용을 그대로 인정만 하라고 했다. 그리고선 간단히 조사를 끝낸 후 사건을 검사국으로 넘겼다.
경찰 구치소를 떠나 형무소로 이감되어 가는 날 종로경찰서 앞에는 이감되는 카프 맹원들을 보기 위해 모인 백발의 노파에서부터 젊은 부인들과 아이들까지 수감자들의 가족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포승줄에 묶인 채 용수를 쓴 카프 맹원들이 경찰서에서 나와 가족들의 외침을 뒤로하고 대기 중인 버스에 올라탔다. 윤기정의 부인도 이기영, 임화, 김남천의 부인과 함께 남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얼굴을 내밀었다. 수갑을 차고 버스에 앉은 윤기정 역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는 용수의 성근 틈 사이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대문형문소에 도착한 이들은 발가벗겨진 채 겨드랑이, 항문 속, 입속, 귓속까지 검사를 받은 후 지급받은 푸른색 수의를 입었다. 누군가 “청복키노니 청복극장이니 하고 청복, 청복 하더니 기어코 청복을 입게 되었구먼”, 또 누군가는 “집단, 집단 하더니 집단생활을 하게 되었네”라며 자조 섞인 말을 뱉어냈다. 심한 고문을 당해 건강이 악화된 윤기정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검사국에서는 종로서에서 취조한 내용을 토대로 내용 확인 및 기소 범위를 정하였다. 모리(森) 검사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것이니 미결감에 들어가 있으라 명령했다.” 미결감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사상검사 이토 노리오(伊藤憲郞)가 김기진을 불렀다. 그는 김기진에게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의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제목으로 지나온 일과 장래의 전망을 솔직히 적어 내라고 명령했다. 김기진은 엿새 동안 50매 분량의 글을 적어 간수에게 전달했다. 그 글을 제출 후 카프 멤버들은 김남천을 제외하고 전부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1931년 10월 15일 밤 석방되었다. 윤기정은 불기소 처분 소식을 병원에서 들었다.
감옥에서 나온 카프 맹원들은 그해 연말 다시 외부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김창술, 권환, 임화, 박세영, 안막 등 다섯 명의 시가 수록된 『카프시인집』의 출판을 기념한 출판기념회를 1931년 12월 다옥정 다방원에서 열었는데 윤기정은 박영희, 김병제, 김기진, 송영과 함께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다음 해 3월에는 윤기정의 「양회굴뚝」을 비롯해 이기영, 한설야, 송영 등 카프작가 7인의 단편을 모은 『카프작가7인집』이 발간되었다. 이들 시집과 단편집의 발간은 감방에서 나온 카프 맹원들이 모진 고난 후에 점점 더 단련되어 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