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3년 9월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법정 안은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바깥세상과 격리된 재판정은 현대식 시설을 갖춘 도살장 같았다. 언론 보도를 통제하고 가족 한 명만 참석을 허가했지만 재판관과 피고인만으로도 법정은 꽉 찼다. 간첩단 사건으로 엮여 다닥다닥 붙어있는 피고인들은 수갑 위에 포승줄까지 채워 한 두름으로 묶인 굴비 같았다. 변호사의 증인 채택 요구는 거부됐고 반대 신문 절차도 생략됐다. 검찰이 내놓은 증거물은 금서 몇 권, 서리하의 시집, 수사관들이 부르는 대로 받아쓰고 지장을 찍은 피의자 심문 조서가 다였다. 이날 법정에 선 피고인은 모두 27명, 공소장은 500쪽에 달했다.
얼굴이 벌게진 판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구형했다.
“서리하 사형, 김민철 사형...”
7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13명에게 징역 20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판결을 들은 가족들에게서 비명소리가 이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자가 또 거짓말을 했다.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을 깨닫자 긴 세월 쌓이고 쌓인 증오가 폭발하려 했지만 영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참았다. 어려서야 힘없어 당한 일이지만 어른이 돼서도 농락당하고 만 있을 수는 없었다. 최후 진술을 마치고 자신을 바라보는 서리하에게 영미는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고, 꼭 살려내겠다고 눈빛으로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장 교수는 네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다. 빨리 결혼 날짜를 잡고 싶다고 하더라.”
영미는 서리하를 살리기 위해 아버지 오연식이 시키는 대로 장만수를 만났다. 젊은 나이인데도 유명 대학 역사학 교수였다. 서리하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려니 죄스러웠지만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어요?” 영미가 오연식에게 따졌다.
“무슨 약속?”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묻는 말에 화가 났지만 영미는 꾹 눌러 참았다.
“서리하를 살려주시기로 하셨잖아요.”
“결혼하면, 결혼하면 그러기로 했지.”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믿을 수밖에.”
“제가 어렸을 때도 그런 식이었죠. 이번 한 번 만이라고.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지켰다. 지금은 그러지 않으니까.”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지만 영미는 화를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를 내서는 이 동물을 이길 수 없다. 그보다 더 독해져야 한다.
“살아 나오면 결혼 날짜를 잡을게요.”
화가 난 오연식이 앉으라고 소리쳤지만 영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집에 오는 동안 생각을 정리한 영미는 자취방을 옮겼다. 서리하와 추억이 깃든 집이라 마음이 아팠지만 꾹 눌러 참았다. 과거를 추억하기에는 할 일이 많았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영미는 할 일을 계획했다. 가장 먼저 다니던 성당을 통해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를 만났다. 영미는 실시하여서 고문당했으며 변론조차 못 하는 강압적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았음을 알렸다.
“판결을 바꿀 수 없을까요? 최소한 사형이라도 면하게 해야 해요.”
“서 시인을 위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 사건에서 영미 씨는 제삼자입니다.”
사제복을 벗은 신부는 중년의 평범한 아저씨처럼 보였다.
“고문을 당했다는 서 시인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양심 선언서를 작성하게 하십시오. 내오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음 날 영미는 면회를 신청했다. 수척해진 서리하가 웃음 띤 얼굴로 영미를 맞았다.
“정근호 씨는 만났어요?”
얼굴을 보자마자 세오녀 비단에 관해 묻는 서리하를 보며 영미는 어이가 없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래요? 정말 세오녀의 비단이 있었다고 하나요?”
“네. 우리가 스님께 들은 말과 같았어요.”
“발굴 작업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겠네요.”
“맞아요. 여기저기 조사했지만 발굴된 유물 목록은 알 수 없었어요.”
“거기까지 확인한 것만도 큰 수확입니다.”
말하면서 영미는 곁눈질로 간수를 탐색했다. 간수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확인한 영미가 두 손바닥을 유리판에 붙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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