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책자금 승인의 열쇠, 기업 적합성 진단
서울 구로공단에서 인쇄업을 하는 김 대표는 올해만 세 번째 정부 정책자금을 신청했다. 서류를 꼼꼼히 준비했고, 컨설턴트의 도움까지 받았다. 그런데 결과는 또 '부적합'. 은행 대출도 어려운데, 이제는 정부 지원마저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담보가 없으면 은행은 안 되고, 기준이 안 맞으면 정부도 안 된다는데… 그럼 중소기업은 어디서 자금을 구한다는 말입니까?"
김 대표의 하소연은 수많은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공감하는 현실이다. 정책자금의 문턱은 생각보다 높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책자금은 '돈이 급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회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열린다고.
기업 진단, 자금 신청 전 필수 과정
정책자금 심사는 단순히 매출액이나 담보 유무만 보지 않는다. 심사기관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이 기업이 자금을 받아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가’다.
이를 판단하는 과정이 바로 '기업 적합성 진단'이다. 쉽게 말하면 회사의 건강검진표다. 기업의 재무상태, 기술력, 시장성, 경영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정책자금 지원 대상으로 적합한지 판단한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중진공),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등 정책자금 기관들은 각각 고유한 심사기준을 갖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보는 핵심 요소는 비슷하다.
무엇을 어떻게 평가하나?
정책자금 기관들이 기업을 평가하는 기준은 크게 네 가지다. 기관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재무건전성 35점, 사업성 30점, 기술성 20점, 경영역량 15점 배점으로 총 100점 만점으로 평가한다.
재무건전성은 회사의 돈 관리 능력을 본다. 부채비율이 200%를 넘지 않는지, 최근 3년간 영업이익이 흑자인지, 현금흐름이 안정적인지 등을 재무제표로 확인한다. 특히 운영자금을 신청할 경우 현금흐름표를 꼼꼼히 본다.
사업성은 회사가 파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경쟁력이다. 주요 거래처가 3곳 이상인지, 특정 거래처에 매출이 70% 이상 몰려 있지 않은 지, 시장에서 수요가 계속될 것인지를 평가한다. 매출처가 다양할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다.
기술성은 기술보증기금이나 중진공 기술개발자금을 신청할 때 중요하다. 특허권, 신기술 인증서(NET, NEP), 벤처기업 인증 등이 있으면 가점을 받는다. 기술이 없어도 신청은 가능하지만, 승인 가능성은 낮아진다.
경영역량은 대표의 능력을 본다. 동종 업계 경력 5년 이상, 관련 자격증 보유, 사업계획서의 논리성과 실현가능성 등을 평가한다. 사업계획서에 구체적인 숫자와 근거가 있는가가 핵심이다.
실패 원인의 70%는 '논리 불일치'
컨설팅 현장에서 보면, 정책자금 신청에 실패하는 기업의 70% 이상은 서류 미비가 아니라 내용의 논리적 불일치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업계획서에는 매출이 성장한다고 썼는데, 재무제표를 보면 매출이 감소하는 경우가 있다. 또는 운영자금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재무제표상 현금이 충분한 경우도 있다. 이런 불일치는 심사자의 신뢰를 잃게 한다.
또한 많은 경영자들이 자금 용도를 막연하게 기재한다. ‘운영자금 2억 원’이라고만 쓸 게 아니라, ‘원재료 구매 1억 원(월 2천만 원씩 5개월), 인건비 7천만 원(직원 5명, 3개월), 임차료 3천만 원(월 1천만 원씩 3개월)’처럼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진단서 하나로 승인받은 금형업체
충북의 한 금형업체 B사는 3년간 정책자금 신청에서 계속 탈락했다. 매출은 있었지만 재무제표상 적자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 컨설팅을 받으면서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 적자의 이유는 외상매출금 회수 지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수익성 있는 거래였지만, 회계상 손실로 보였던 것이다.
B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 가지 서류를 준비했다. 첫째, 주요 거래처 3곳의 납품계약서와 대금 지급 이력을 3년 치 정리했다. 둘째, 외상매출금이 실제로 입금된 통장 내역을 월별로 정리해 '회수 가능한 채권'임을 증명했다. 셋째, 보유한 금형 제작 기술 인증서(산업통상자원부 신기술 인증)와 특허 2건을 첨부했다.
여기에 사업계획서에는 "향후 6개월간 외상매출금 8천만 원 회수 예정, 신규 거래처 2곳 확보로 매출 30% 증가 목표"라고 구체적인 숫자를 명시했다.
그 결과 중진공으로부터 경영안정자금 2억 원을 승인받았다. B 대표는 "우리가 몰랐던 건 자금 조건이 아니라 우리 회사의 실제 상태를 정확히 설명하는 방법이었다"라고 말했다.
열쇠는 대표의 시각
정책자금은 서류 경쟁이 아니다. '왜 우리 회사에 이 자금이 필요한가'를 숫자와 논리로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기업이 받는다.
재무제표의 숫자가 회사의 현재를 보여주고, 사업계획서의 스토리가 미래를 설득한다. 이 둘이 일치할 때 비로소 심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정책자금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다만 그 문을 여는 열쇠는 서류가 아니라 내 회사를 정확히 이해하는 대표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