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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6. 들어줄 수 없는 부탁

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by 카시모프

둘은 밥을 다 먹고, 병원 안에 있는 로비 의자에 앉았다. 그 남자의 말을 들어보니 '청록의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영혼’이 시간 여행을 하는 통로처럼 들렸다. 마고가 그것을 ‘의식’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거대한 하나의 우주적 기록이 존재한다는 ‘아카식 레코드’ 등의 유사과학과도 비슷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유안의 말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세계관의 한계로 지식을 이해한다. 이 사람이 2000년 전의 사람이라면, 무엇을 보고 듣든지 2000년 전의 지식과 생각으로 세계를 이해할 것이다. 우주 팽창을 주역과 연결시킨 것도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재호도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이 사람의 말은 성경같이 오래된 책에 나오는 말과 비슷한 이야기다. 과학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사실은 재호에게 이 유안이라는 남자가 실제로 시간 여행을 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유안의 모습은 밥을 먹은 뒤로 한결 편안해 보였다. 유안은 재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재호는 병이 난 뒤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집에서만 지내왔다. 병이 났을 때 보인 모습 때문에 모두 재호를 피했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상대를 20여 년 만에 만난 것이 재호는 너무 즐거웠다. 게다가 그 청록색의 눈으로 짓는 미소가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정말 왕이 아니었을까 싶은 묘한 기품까지. 재호는 유안에게 물었다.


“그럼, 그때부터 시간 여행을 마음대로 하시게 된 건가요?”


유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청록의 시간’에 들어갔지만, 거기서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는지도 몰랐어. 그저 이리저리 튕기며 날려지고 있을 뿐이었네. 거기서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나는 벌거벗은 채로 다시 땅에 떨어졌지. 옷을 훔쳐 입고 마을로 가서 이야기를 해 보니, 그곳은 회남의 근처였고 내가 살았던 시대보다 50년쯤 지나 있었어. 주막에 가서 사람들과 회남의 왕이었던 유안에 대해 물었는데, 회남은 역모로 인해 천자에게 봉지를 몰수당하고 왕은 자살하고 가족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고 하더군. 난 화가 나서, 내가 바로 유안이라고 이야기를 했지. 신선이 되는 약을 먹고, 죽지 않고 신선이 되어 돌아왔다고. 사람들은 놀라서 웅성대는데, 그때 한 늙은 여자가 무릎을 꿇고 나를 보고 주변에 소리쳤어. ‘유안이 맞다! 내가 어릴 때 궁에서 시녀로 일했었으니 잘 알지...! 하나도 늙지 않으셨어...! 대왕께서 신선이 되어 돌아오셨다!’


나는 우쭐해지기도 했지만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어. 그래서 나는 청록의 시간을 통해 가족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외쳤어. ‘과인의 가족들은 닭과 개 한 마리까지 모두 죽지 않았소. 과인이 만든 선단을 개까지 핥아먹고, 천자가 쳐들어오는 날 모두 승천해서 하늘로 올라갔단 말이오! 그 소리를 듣지 못했소? 닭과 개가 하늘로 올라가며 우는 소리를!’”


“어? 그거 사자성어 계견승천鷄犬昇天?”


“그런 말이 있나?”


“친구나 친척이 출세하면 더불어 출세한다는 사자성어인데요. 어디 보자……. 한번 검색해 볼게요. 어라? ‘유안이 하늘로 승천하며 닭과 개도 데리고 갔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쓰여 있네요?”


유안은 피식 웃었다.


“화나서 한 말인데 그런 사자성어가 되었군.”


재호가 듣기에 유안의 이야기는 뭔가 그럴싸했다. 재미로 듣고 있었는데 어느덧 점점 유안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의 말에 허점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과거로 가서 가족을 구했나요?”


“아닐세. 난 주막을 나서서 일단 회남으로 향했네. 그런데 주막에 있던 자들 중 몇이 날 몰래 따라왔었어. 그리고 길에서 날 가로막았지. 자기들에게도 선단을 달라고 했어. 난 그런 건 이제 없다고 했고, 신선이 과연 죽지 않는지 보자며 칼을 들고 나에게 덤볐지.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놈들에게 칼부림을 당해 죽고 말았다네.”


“아…….”


“나는 또다시 고통 속에 눈을 떴고, ‘청록의 시간’으로 되돌아와 있었지.”


“… 그래도 시간을 여행하며 산다는 것은 어쩐지 환상적인 일일 것 같아요.”


유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게 그렇지가 않아. 영원히 산다는 것은 영원히 죽는 것이지. 그 뒤로는 끝나지 않는 고통의 연속이었다네. ‘청록의 시간’이라는 곳은 마치 비 온 뒤의 강물과도 같아서,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나를 어딘가로 휩쓸고 갔지. 내가 떨어진 곳들은 사람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어. 대부분은 바다 한가운데 거나, 사막이거나 숲 속이었다네. 바다에 빠지면 허우적대다가 곧 죽어버렸고, 사막이나 숲 속에서 며칠은 버텼지만 오래가진 못했지. 심지어 아주 높은 밤하늘 위에서 떨어진 적도 있고, 그땐 숨도 못 쉰 채로 얼어서 죽어버렸지.


사람이 있는 곳에 간다 한들, 벌거벗은 낯선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나? 그리고 난 그 뒤로 다시 고향으로 갈 수가 없었네. 가는 곳마다 내가 모르는 말을 쓰는 곳이었지.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방법을 전혀 몰랐어.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다행이었지만 대부분 전쟁 중이라, 낯선 말을 쓰는 이방인이 오면 고발당해 갇혀 있다 죽거나 바로 죽었어.


난 <회남자>를 집필하면서, 나름 내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었네. 그래서 낯선 말을 배워 살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여러 가지 말을 익혀서 할 수 있었지. 하지만 날 친절하게 대해주고 말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어. 그 친절했던 곳 중 하나가 여기 조선이었네. 평양의 친절한 선비의 집에서 살게 되어 3년 정도 조선말을 배울 수 있었어. 아마 내 말투가 이상하다면 그래서일 것이네. 하지만 곧 청일전쟁이 터졌고, 그 집에 살던 가족들은 나와 함께 모두 죽었지….


청록의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세상에 떨어지면 고통스럽게 지내다 죽게 되고, 다시 태어나 또 고통을 받다가 죽게 되는 거야. 그야말로 무간지옥이지. 나는 계속해서 죽을 때마다 생각했네. 마고가 나에게 저주를 내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린 것인지.”


재호는 유안의 이야기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슬퍼, 뭐라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시간을 여행한다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이라니.


“… 몇 번이나 죽고 다시 살아나신 거예요?”


“음……. 셀 수는 없지만 아마 다 합하면 벌써 몇백 번은 되어가는 것 같군.”


“네? 그렇게나 많이? 그럼 그 뒤로 전혀 나이를 먹지 않으신 건가요?”


유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내 몸에 일어난 변화를 깨달았네. 마고가 말했던, ‘언젠가 사슬이 끊어지고 모래로 지은 집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 말일세. 내 몸은 청록색의 눈을 가지게 된 그 나이 그대로로 보이겠지만, 몸속 안은 늙어가고 있네. 예전 같지가 않아. 아마도 이제 곧 나는 몸의 사슬이 끊어져 바스러지고 사라져 버리겠지. 아마 마고도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싶어.”


재호는 그 이야기에 너무 슬퍼졌다.


“저와 이렇게 즐겁게 이야기를 나눠 주셨는데, 어쩐지 저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네요…….”


재호와 유안은 잠시 침묵했다. 병원 안의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사람들 틈 사이에서 둘만이 고독하게 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유안은 창 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여기 오기 전, 마지막으로 갔던 ‘청록의 시간’에서 무언가 알 것 같았어. 하도 현생에서 고통스럽게 죽고 죽어서, 청록의 시간에 들어가자마자 ‘제발 평화로운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간절하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 이곳 한국에 몇달 전에 도착한 거야. 여기에선 말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고, 전쟁도 없고 정치도 안정적이었네. 내가 그동안 오가며 봐 온 나라와 역사 중에 이렇게 태평성대한 시절은 별로 없었다네. 거렁뱅이처럼 다녀도 공짜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었고, 나를 해하거나 죽이려는 사람들도 없고.


그래서 알았지. 청록의 시간에서 가고 싶은 곳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집중해서 생각하면,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마고가 말한 대로 그곳이 의식의 본질이 존재하는 세계라면, 내가 의식하는 방향대로 영향을 줄지도 모르지. 그게 어떤 방식인지 나는 모르지만. 그곳은 너무나 세찬 강물 속과 같아서 그렇게 집중하기는 쉽지 않네. 하지만 몇백 번쯤 겪어보니, 이젠 할 수 있을 것도 같아.”


“그럼 이제부터 원하는 데로 가실 수 있는 건가요?”


“아직은 확실하지 않네. 그리고 중요한 것이, 내 몸은 이제 시간이 다해가고 있어. 만약 죽는다면 이번이 마지막 여행이 되겠지. 마지막으로 갈 수만 있다면…. 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정확히 그 시절 회남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잡혀 죽을 테니 안 되겠지만, 적어도 옛 중국으로 가서 생을 마치고 싶네.”


“그럼, 자살을 하…….”


재호는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친구가 생겼다 싶었는데, 그 친구는 자살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재호가 망설이고 있자, 유안은 꿰뚫어 볼 것 같은 눈빛으로 재호를 쳐다보았다.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자살이 쉬운가? 혹은 살인하기가 쉬운가? 무언가를 죽이는 일이 얼마나 큰 악의와 고통이 뒤따르는지 알지 않은가? 우리 같은 평범한 겁쟁이들은 생명을 죽이는 일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야. 내가 죽으면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청록의 시간을 통해서 다시 살 수 있다는 걸 아는데도. 죽고 청록의 시간에 가는 동안, 또 청록의 시간에서 길을 찾는 동안에도 엄청난 고통은 내 몸을 파고들지. 또 그걸 이겨내기도 쉽지 않고, 난 다시 그걸 겪고 싶지 않아서도 매번 죽는 게 두려웠어. 예를 들어, 죽으면 끝이라는 거라고 생각하면 죽음은 오히려 두렵지 않지. 하지만 고문처럼 끝없는 고통이 계속되는 것은 두려워지는 법이야. 겁쟁이인 나는 자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네. 항상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죽었지.”


“그럼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가시려고…….”


유안의 눈은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살며, 익혀온 기술로 자네의 병을 한번 치료해 보겠네. 만약 치료가 잘 된다면….”


그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이런 부탁은 쉽지 않네만, 그때 자네가 나를 죽여주게.”








유안은 재호에게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둘은 병원을 나서서 탄천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갔다.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탄천으로 내려가기 직전 강둑은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았다. 둘은 둑의 나무들 사이에 있는 조용한 벤치에 앉았다. 재호는 겁이 났다.


“뭐 이상한 걸 하려는 건 아니죠? …낫게 해 준다면서 절 때린다거나? 악마야 물러나라! 하면서요.”


유안은 심각한 얼굴로 있다가, 재호의 말에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그런 육체적인 치료는 아닐세. 말로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지. 나는 자네에게 말을 걸 것이고, 자네는 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따라와 주기만 하면 되네. 도가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광인들을 다스리고 치료하곤 했었는데, 그렇게 신통치는 않았지. 그래서 난 거기에 마고가 가르쳐 준 선법을 조금 섞어서 해볼 거야. 난 이게 자네에게 조금 도움이 될 것이라 믿네.”


“전 아직 죽여드린다고 하지 않았는데요.”


“괜찮네. 마지막으로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있으니 그걸로 족해. 아무도 이런 삶에 대해 알아주지 않고 죽는다면, 그게 더 큰 슬픔 아니겠나. 나야말로 내 이야기를 들어준 자네에게 도움을 주고 싶네. 음… 그렇지, 내가 만약 ‘청록의 시간’을 다시 거쳐 원하던 곳에 도착한다면 자네가 알 수 있도록 글을 남기겠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만은 알 수 있도록. 내가 청록의 시간으로 가는 게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중국 고전들을 한번 뒤져보도록 하게. 먼 후대까지 남겨질 위대한 책 중 하나에 편지를 남길 테니.”


“시간여행 패러독스에서는 과거를 바꾼다고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는 설도 있던데…. 알겠어요. 저 역시 장담은 할 수 없어요. 저도 겁쟁이라서요.”


“지금은 일단 내 생각은 말고, 자네의 일에만 집중하게.”


심리 상담 치료, 최면 치료 등 사실 재호도 그쪽으로 안 해본 게 없었다. 희영은 재호를 치료하려고 무당을 불러 굿까지 했었으니까. 그전까지는 이 남자에게 호감이 갔지만, 자신을 죽여 달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 무언가 찜찜했다. 더군다나 이 병원엔 치료받으러 왔다더니, 몇달 전에 한국에 도착했다고? 그럴 수가 있나? 앞뒤가 안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안이 나쁜사람 같지는 않았다. 재호는 일단 유안이 말하는 심리치료를 받아본 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역시 안 되겠다며 발을 빼려고 했다. 장난 삼아 시작한 대화가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대화는 재미있었지만, 더 깊이 들어갔다간 자신도 현실로 오지 못할 것 같았다.


유안은 재호를 벤치에 눕힌 뒤, 스스로의 상태를 인지하도록 발끝부터 머리까지 옮겨가며 천천히 질문을 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점점 질문이 들어가더니, 그 질문은 재호의 의식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곳에서 유안은 32가지의 도가사상의 핵심을 읊어주었다. 그런 식으로 유안은 재호의 마음속에 들어가 불편한 그늘을 하나씩 옆으로 치워 두고 있었다. 재호의 마음은 어느새 편안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재호는 붕 뜬 기분이었고 유안의 말은 점점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한국어가 아니었다. 뭐라고 중국어로 주문을 외우듯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물어보고 싶어 입을 열려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최면에 걸렸다는 생각이 재호의 뇌리를 스쳤다. 그때 재호의 콧속에 어떤 가루가 날아 들어왔다. 머리가 핑 돌았다. 그때 유안은 재호의 바지 주머니에도 무언가를 넣었다. 그리고 유안은 재호의 이마를 짚으며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 미안하네."


재호가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려 애썼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유안은 중국어로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자 재호는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지고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의식 저편, 멀리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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