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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인연

by 산호

광복절 연휴 강릉에서 고등학교 절친을 만나기로 한 아이를 강릉터미널에 내려주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다 이왕 강릉까지 왔는데 놀다 가야지 싶어 핸드폰으로 '강릉 가볼 만한 곳'을 검색했다. 근방에 오죽헌이 있었고 선교장도 있었다.


먼저 오죽헌에 들렀다. 얼마 전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본 덕에 오죽헌에서 만나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삶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오랜 세월 버텨온 고택이며 까만 대나무 숲, 600년 된 배롱나무, 정조가 이이 사후에 하사했다는 벼루 뒷면의 글씨 등을 보며 '나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새삼 느꼈다.


오죽헌을 빙 둘러 구경을 하고 나오니 1시가 넘었다. 식사를 하고 선교장에 가보고 싶었다. 연휴라 어디든 사람이 많을 것이니 가까운 곳에서 점심을 먹고 이동해야 했다. 주차장으로 나오니 건너편에 한정식 집이 보였다. 식당에 들어가니 역시 사람이 많아 대기를 해야 했다. 대기명단에 이름을 적기 전 혹시나 해서 1인식사가 되는지 물어보았다.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2인이상이라고 한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먹어야겠거니 생각하고 나오려는데 말을 건네는 이가 있다.


- 같이 드실래요? 저도 혼자 왔어요.

- 네, 좋아요.


그렇게 생애처음 합석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제육볶음 2인상을 주문하고 서로 인사를 나눴다. 서울에서 여행 오신 분이셨다. 나이는 나보다 4-5살 정도 많아 보이는 여자분이시다. 연휴에 차가 많아 막히지 않았냐고 물으니 일부러 차 막히지 않는 늦은 밤에 출발해서 길은 괜찮았고 오늘 아침에는 안목해변에서 일출을 봤다고 한다.


-가끔 혼자 여행 다녀요. 아이가 다 커서 말이죠.

-우와, 혼자 여행하시다니 멋지시네요!


나는 상기된 얼굴로 얘기했다. 거기에 덧붙여,


-제 로망이에요. 혼자 여행 가는 거요. 언젠가 고성에서 부산까지 7번 국도 따라 여행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종업원이 반찬을 가져다주었다. 샐러드에 냉채, 묵무침, 나물반찬들이 연이어 나왔다. 보통 한정식집에서는 젓갈이나 장아찌가 많이 나오는데 내가 좋아하는 야채며 나물반찬들이 나와서 맘에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돌솥밥과 된장국을 가져다주었다. 합석하신 분도 딸이 있다고 하시면서 함께 자녀이야기도 나누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며 식사를 하였다.


돌솥밥에 물을 부어 숭늉까지 맛나게 먹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내가 계산할까, 아니야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실까,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으니 먼저 지갑을 꺼내서 점심값을 주셨다. 이것도 인연인데 즐거운 여행되시라고 커피라도 사드릴까 고민하는 사이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분은 오죽헌으로, 나는 선교장으로 각자 발길을 돌렸다.


선교장에 들어서 활래정 연못을 가득 메운 연꽃을 바라보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왜 그리 정신없이 다녔는지 이제야 뭐든지 여유롭게 바라볼 시각이 생긴 것 같다. 삶을 대하는 태도나 사람을 대하는 생각도 한층 유연해졌다. 무더위를 식힐 겸 한옥카페에 앉아 아이스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다 오늘 만난 짧은 인연이 생각이 났다. 좀 더 마음을 열어도 좋았을 것을. 다음에 속초 오면 연락하라는 말이라도 해볼걸. 빈말은 죽어도 못하는 반백살인 나를 자책했다. 하지만 오늘 짧은 인연으로 인생이 좀 달콤해진 것 같다. 다음엔 용기를 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7번 국도 여행을 하게 된다면.


참, 누가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고 했던가. 뒤늦게 생각난 것이 있다. 우린 제육볶음 정식시켰는데 제육볶음이 안 나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나 사장님이나 정신없는 하루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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