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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영어] 유엔에서 도움이 된 중남미 책 추천 2

중남미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들

주유엔 칠레대표부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후, 중남미와 카리브 지역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 책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의 "Ficciones" (1944/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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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시온스는 보르헤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단편집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이야기보다는 철학적 실험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여기에는 끝없이 반복되는 미로, 모든 책이 모여 있는 도서관, 현실과 뒤섞이는 거울이 등장한다. 보르헤스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라는 형식을 시험하며 언어가 무한을 담을 수 있는지, 아니면 또 다른 미로일 뿐인지를 탐구한다. 각 단편은 인용, 가짜 학술 각주, 허구의 작가를 통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며, 독자에게 눈부심과 혼란을 동시에 안긴다. 시작은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곧 우리가 어떻게 알고, 기억하며, 믿는지에 대한 깊은 사유로 발전한다. 픽시온스는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로, 소설이 철학을 도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El Aleph"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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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알레프는 보르헤스의 형이상학적 상상력을 더욱 깊게 확장한다. 제목이 된 단편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지하실에 숨겨진 신비한 점을 탐구하며, 이 점에서는 우주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다. 강렬한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보르헤스는 이를 평범한 가정 공간에 배치해 무한과 일상의 경계가 흐려지게 한다. 전체 모음집에는 시간이 거울처럼 접히고, 이단자가 정통을 흔들며, 기억이 축복이자 저주로 작용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여기서 보르헤스의 언어는 정밀하며, 복잡한 사상을 맑고 투명한 문체로 전달한다. 동시에 특유의 아이러니도 살아 있으며, 무한이 드러나도 인간은 여전히 하찮고, 질투하며, 자기중심적이다. 엘 알레프는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인식과 지식, 인간의 허영심의 한계를 숙고할 것을 초대하는 작품이다.


로베르토 볼라뇨 (Roberto Bolaño)의 "Los detectives salvaje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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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로드 무비이자 탐정 이야기이며, 라틴아메리카 보헤미안의 일부 회고록이다. 1970년대 멕시코시티에서 시작해, 젊은 시인들이 예술, 사랑, 탈출을 겹쳐 추구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후 이야기는 수십 명의 목소리가 교차하는 다성적 구조로 변화하며, 여러 시대와 대륙에 흩어진 증언들이 중심인물인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와의 만남을 회상한다. 볼라뇨는 문학을 구원과 동시에 자기 파괴의 수단으로 묘사한다. 화자가 바뀌는 동안, 젊음의 신화는 망명, 절망, 타협으로 흩어지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의 순간도 때때로 빛난다. 이 책은 미스터리 해결보다 한 세대의 감정적·문화적 혼란을 지도처럼 그려내고 있다. 유머와 생생한 직설, 쓸쓸함이 가득한 이 작품 속 야생 탐정들은 문학이 여전히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한다.


"2666" (2004, 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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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6은 볼라뇨의 미완성 작품으로, 대륙, 시대, 장르를 넘나 든다. 다섯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은둔한 독일 작가를 찾는 문학 비평가들, 격동의 삶을 산 칠레 교수, 미국 기자의 취재, 멕시코 국경 도시 여성 연쇄살인 기록, 그리고 작가 아르침볼디의 미스터리한 삶을 다룬다. 각각의 이야기는 별도로 보이지만, 폭력, 역사, 예술에 대한 집착이라는 큰 맥락에서 서로 연결된다. 특히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을 냉철하게 묘사하면서, 가상 도시 산타 테레사를 배경으로 실제 후아레스 시를 지우는 듯한 생생한 공간을 그린다. 그럼에도 작품은 공포 속에서도 문학의 힘이 기묘하게 지속됨을 보여준다. 2666은 줄거리의 좁은 길을 따르기보다, 흩어지고 사라지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의미의 세계에 잠기는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알레한드라 피사르닉 (Alejandra Pizarnik)의 "La tierra más ajena"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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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르닉의 첫 시집은 짧지만 그녀의 세계를 지배할 집착들이 이미 분명히 드러나 있다. 시는 친밀하면서도 예리하며, 언어는 섬세하면서도 직설적이다. 고독, 소외, 자아의 균열이 전체를 관통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날것의 감정을 강하게 통제하며 전달한다는 점이다. 목소리는 젊지만 절망의 투명함 속에서 성숙함이 드러난다. 또한 언어 자체를 탐구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피사르닉은 단순히 소외를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기 위해 언어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가장 낯선 땅은 일종의 설계도처럼 느껴지며, 후에 급진적 언어 실험과 침묵 시도가 자리 잡을 토대가 된다. 시작의 불안함과 동시에 이미 강렬한 비전이 형성된 이 책은 그런 두 가지를 모두 느낄 수 있다.


"El infierno musical"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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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말기에 쓴 『음악의 지옥』은 피사르닉의 가장 강렬하고 실험적인 작품이다. 언어는 짧고 예리하게 잘리고, 종종 침묵이나 갑작스러운 단절로 무너진다. 죽음, 어린 시절, 고독, 광기가 반복되지만, 이는 단순한 주제가 아니라 구절마다 스며든 존재들처럼 나타난다. 이 시들을 읽는 것은 어둡게 비친 단어들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과 비슷하다. 이 책은 초현실주의적 실험과 함께 시를 ‘파괴의 행위’로 본다—관습을 깨고 의미 자체를 흔드는 것. 동시에 목소리의 취약함이 모순을 만들어 낸다. 생생한 감정이 섬뜩할 만큼 정밀하게 드러난다. 『음악의 지옥』은 쉽지 않은 책으로, 독자를 불편하게 하고 존재의 연약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바로 그 타협 없는 강렬함 덕분에 피사르닉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인으로 남았다.


비디아다르 수라지프라사드 나이폴 (V. S. Naipaul)의 "A House for Mr Biswas"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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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흔히 나이폴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버지의 삶을 소설화하는 동시에 트리니다드에서의 성장 경험을 반영하는 매우 개인적인 작품이다. 인도계 출신인 모훈 비스와스라는 인물이 평생 동안 자신의 진정한 집을 소유하거나 짓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야기는 그의 반복되는 실패와 굴욕, 작은 성취를 따라가며, 언제나 대가족의 혼란한 역동성과 더 넓은 인도-트리니다드 공동체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단순히 집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 그 이상으로, 이 소설은 식민지 구조와 엄격한 위계사회에서 정체성, 독립, 존엄성을 찾는 과정을 상징한다. 나이폴의 문체는 아이러니와 연민을 균형 있게 담아내며, 비스와스의 야망에 깃든 우스꽝스러움과 비극을 동시에 보여준다. 더불어 이 작품은 집단적 이상에 대한 나이폴의 회의적 시각을 드러내며, 그에게 진보는 대규모 운동이나 사회 혁명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책임, 자기 결정 속에 있다고 본다.


"The Middle Passage"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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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후원을 받아 카리브 지역 여행 후 쓴 미들 패세지는 날카롭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기행문이자 문화 비평서다.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가이아나, 수리남, 마르티니크, 자메이카 등 여러 독립 지역을 방문하고, 문화적 침체, 정치 무능, 식민주의의 지속된 상처를 솔직하게 기록했다. 그의 어조는 종종 신랄하며, 독립 축하보다는 제도와 정체성의 부재로 표류하는 사회를 묘사한다. 그의 보수적 세계관이 반영된 입장으로, 민족주의적 낙관론에 대한 회의, 대중 영웅들에 대한 불신, 규율·질서·문화적 연속성 강조가 드러난다. 동시에 외부인으로서의 가치는, 탈식민 현실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의 엘리트주의와 거리감도 드러내며, 그것이 그를 카리브 지성인들 사이에 존경과 반감을 동시에 갖게 했다.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문학 초보자를 위한 출발점

이 문학 지형에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이해하기 쉽고 명확한 안내가 중요하다. 보르헤스의 작품 중에서는 픽시온스가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로 그의 복잡한 스타일에 자연스럽게 입문할 수 있게 한다. 볼라뇨의 경우, Los detectives salvajes가 2666보다 먼저 시작하기 적합하다. 젊은 에너지와 다양한 목소리가 넘쳐나면서도 읽기에 부담이 적다. 피사르닉은 맥락 없이 접근하면 어려울 수 있어, 그녀의 목소리를 먼저 느낄 수 있는 La tierra más ajena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후 더 어둡고 파편화된 후기 작품으로 넘어가면 된다. 나이폴의 비스와스를 위한 집은 유머, 연민, 사회적 관찰이 어우러진 단일한 내러티브로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반면 미들 패세지는 날카로운 비평과 정치적 성찰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이렇게 살펴보면, 이 작품들은 각각 다른 길을 열어주며 서로 보완하는 지도 같은 역할을 한다. 보르헤스의 지적 퍼즐, 볼라뇨의 불안한 내러티브, 피사르닉의 내면적 강렬함, 나이폴의 탈식민 사회에 대한 회의적 해부가 그 풍경을 채운다.


(사진 출처: 개인소장, 아르헨티나온라인서점)


Disclaimer - This post was prepared by Sang Yeob Kim in his personal capacity. The opinions expressed in this article are the author's own and do not reflect the view of his empl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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