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장판이 후끈하게 등을 덥힌다. 이불 아래로 손을 뻗으니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란히 잠든 엄마의 따뜻한 손등이 만져진다. 그 손을 꼭 쥐어보려는 찰나, 우리 집 거실의 촌스러운 나무 천장이 아닌 새벽 기운에 푸르스름하게 물든 생-쟈크 호텔 (Hôtel Saint-Jacques) 3층 객실의 천장이 보였다. 등허리를 데우던 온도도, 엄마의 마른 손등도 깨어버린 꿈과 함께 빠르게 무의식 너머로 사라졌다.
여전히 꿈과 생시의 경계가 흐릿한 몸을 일으켜 방을 둘러보았다. 꿈자리가 포근했던 더블 침대, 기다란 여닫이창과 그 곁의 싱글 침대, 어제 쓰던 일기장이 그대로 펼쳐져 있는 작은 책상, 등받이에 수건을 걸어놓은 일인용 소파, 켜놓은 채 잠이 든 벽걸이 텔레비전이 가깝게 모여있는 아담한 방.
'참, 나 어제 르퓌에 왔지.'
이불 위를 더듬어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전을 껐다. 프랑스 음악 프로그램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아직도 8위를 유지하고 있는 걸 보고 '세상에.......'라고 중얼거리던 장면까지가 어제의 기억. 호스텔 다인실에서 묵어 오다가 오랜만에 혼자서 아늑한 방에서 잠들어서인지 떠나온 지 20여 일 만에 처음으로 집 꿈을 꿨다. 혼자 눈 뜨고 보고 먹고 걷다가 잠드는 이 하루하루가 새롭게 자유로워 행복하다가도 문득 한 번씩 그리웠던 두 가지가 편안한 잠자리를 틈타 꿈속을 찾아왔나 보다.
등이 데일 듯한 전기장판과 내 삶에 은은한 온도로 영영 식지 않을 한 사람.
커튼을 젖혔다. 어젯밤에도 홀로 빛을 밝히고 있던 레스토랑 차양에 걸린 전구들이 여전히 새벽 푸르름 속에 반짝이고 있었다. 몇 시간 전 고군분투했던 자리를 바라보니 차라리 조금 전 꿈이 생시 같고 어둠 속을 헤매던 지난밤이 꿈만 같았다.
지난밤 기차역을 빠져나와 길을 따라 걷던 나는 호텔 창밖에 보이는 광장 앞에 걸음을 멈췄었다. 어둠에 익숙해지려면 잠시 눈을 감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불 켜진 가게 하나 보이지 않는 낯선 저녁 7시에 담담해질 시간을 벌기라도 하듯이, 낮고 오랜 지붕들이 이고 있는 널따란 밤하늘을 마주 보았다.
산간 마을의 찬 공기가 이제 그만 가자고 재촉하며 소매 속을 파고들기에 캐리어 앞 지퍼를 열고 유스호스텔로 가는 약도를 꺼냈다. 숙소 홈페이지 화면을 캡처해서 인쇄한 약도에는 저녁 8시에 문을 닫는다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데다가 저렴한 가격에 예약도 받지 않고 공평하게 순서대로 자리를 내어주는 곳. 빠듯한 여행 예산에 이보다 좋은 잠자리가 또 있을까. 열차가 11분 늦지 않았으면 한낮에 도착해서 별 어려움 없이 이 숙소에 짐을 풀었겠지만, 저녁을 통과하는 완행열차에서의 시간이 너무나 귀해서 기차에서 흘려보낸 하루가 그다지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시간 안에 이 약도에 친 동그라미에 꼭 다다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솟아올랐다. 한 손에는 약도를, 다른 손에는 캐리어 손잡이를 꼭 쥐고 히말라야 꼭대기에 깃발을 꽂으러 가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비장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거침없는 걸음은 오십 보도 못 가서 기개를 잃고 말았다. 약도에는 없는 거미줄 같은 좁은 골목들은 어디서 나타나서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가늠도 할 수 없었고, 어두워서 길 이름과 번지수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망망대해에서 캐리어를 타고 노를 젓는 기분이 이럴까. 게다가 저만치 앞서가던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가 뒤를 돌아볼 땐 간담이 서늘해지다 못해 고드름이 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자꾸 깊어가는 망망대해에서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는 사람뿐이라 고드름을 주렁주렁 달고서 그들에게 다가가 약도를 내밀고 길을 물었다. 혹시라도 돌변하면 캐리어를 집어던지고 뒤돌아 달려가며 비명을 지를 준비를 단단히 하고서.
잠시 후, 두 사람은 내가 무기로 쓰려고 했던 캐리어를 대신 끌어주며 숙소로 가는 큰길 앞에 데려다주었다.
" 이 길로 쭉 가면 된답니다. 걱정 마세요, 곧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숙소까지 짐을 옮겨줄까요?"
잔뜩 경계했던 게 미안할 지경으로 정답게 대하는 두 사람에게 더 폐를 끼칠 수 없어 한사코 사양하고, 어설픈 발음으로 " Merci." 감사 인사를 했다. 봄날 미풍 같은 친절에 가시처럼 돋쳐있던 고드름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녹아버렸다. 한껏 따뜻해진 시선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을 올려다봤다.
거기엔 실로 자비 없는 각도의 경사로가 태산처럼 버티고 있었고, 미소가 달아난 내 입은 그 밤 어둠을 다 삼켜버릴 듯 점점 크게 벌어졌다. 아, 그들이 친절을 베푼다 했을 때 한사코 사양하지 말았어야 했다.
유스호스텔 정문에 다다른 건 50분이 흐른 뒤였다. 40분은 오르막길을 기어오르는 데 쓰고, 10분은 오르막길 끝에서 헤매는 데 흘려보냈다. 누가 봐도 길 잃은 나를 지나치지 않고 여기까지 데려다준 어느 부인이 아니었으면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테지. 숨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여기 오르는 동안 쏟아낸 진땀과 가쁜 숨과 몸의 마디마디가 구시렁거리던 불만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무사히 안식처에 도착하니 그 우여곡절이 오늘 밤 포근한 휴식을 더 달게 만들어 줄 몇 알의 소금처럼 여겨졌다. 짭짤한 시련의 여운을 느끼며 호스텔 리셉션에 밝은 인사와 이틀간 묵어갈 자리를 요청했다.
그러나 방으로 안내하며 나의 우여곡절에 화답할 줄 알았던 숙소 봉사자의 당혹스러운 표정은 내게 자고로 시련은 짠맛이 아니라 쓰디쓴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향하는 벽시계의 바늘은 8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40분을 끙끙대며 올라간 길을 내려가는 데는 겨우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깊어가는 저녁을 통과할 수 있게 이끈 고마운 '11분 연착 덕분에'가 '이런 11분 연착만 아니었어도!'로 내동댕이쳐지는 시간도 고작 5분이면 충분했다. 유스호스텔 봉사자가 지도에 표시해준 별 한 개짜리 호텔은 체크인 시간이 지나 펍만 운영 중이었고, 펍 직원이 길목까지 데려다준 별 두 개짜리 호텔 역시 불빛 하나 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불 켜진 호텔도, 도와줄 사람도 더는 보이지 않는 나의 고대하던 르퓌. 문득 서글펐다. 마음에 고이고이 머무를 줄 알았던 르퓌행 완행열차에서의 시간이 불과 한 시간 만에 저만치 구석으로 밀려나 버리다니. 공들여 쌓은 평안을 흔드는 건 미로 같은 르퓌의 밤거리가 아니라 내 얕은 인내심이었다.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수많은 골목을 매듭처럼 엮고 있는 그 광장으로 향했다. 마음에서 떠나가는 르퓌행 완행열차의 꼬리 칸을 바라보니 초조했던 머릿속이 오히려 차분해졌다. 증기가 가라앉는 머릿속에 아까 르퓌역에서 나오자마자 스쳐 지났던 IBIS 호텔이 떠올랐다. 가난한 여행자가 묵어가기엔 하루치 예산을 훌쩍 넘는 체인 호텔이지만 적어도 길에서 밤을 지새울 일은 없을 터였다.
까맣게 텅 빈 광장 한쪽엔 문 닫은 레스토랑 차양에 매달린 꼬마전구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 전경을 거울처럼 바라보니 움츠린 채 어두운 골목으로 접어들던 나와 유스호스텔에서 얻은 르퓌 지도를 꼭 쥐고 씩씩거리며 내려와 호텔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내가 보였다. 왜 저렇게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종종거렸을까. 멀리서 보니 피식 웃음이 나는 희극과 다름없었다.
한 시간 전보다 더 차가워진 공기가 비싸고 낭만 없는 비즈니스호텔이라도 괜찮으니 어서 가자고 다시 소매 속을 파고들었다. 희극의 막을 덮고 발을 돌리려던 그때, 광장 건너 희미한 불빛을 밝힌 작은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았을 땐 보이지 않던 빛이었다.
목을 쭉 빼고 자세히 바라보니 같은 자세로 나를 보는 아저씨 한 분이 유리문 안에서 OPEN 팻말을 반대로 뒤집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저만치 멀어졌던 평안이 다시 칙칙폭폭 내게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지 않고 광장을 가로질러 그 평안함 속으로 뛰어갔다.
작고 아담한 평안을 누리고 깨어난 아침. 빨랫감을 한가득 모아 짊어지고 일 층 로비로 내려갔다. 어제 문 닫힌 천국의 문을 열어 쉴 곳을 내어주는 천사로 보였던 호텔 주인아저씨가 신문을 보다가 안경을 벗고 인사를 해왔다.
"Bonjour!"
"봉주르!"
소담하게 꽃이 꽂혀있는 탁자에 나의 고대하던 르퓌 지도를 펼치고 주인아저씨에게 처음 짚어달라고 한 곳은 대성당도, 붉은 성모자상도, 나를 이곳에 오게 한 화산 바위의 작은 성당도 아닌 빨래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