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having 12화

#지하철에서

11_출퇴근 길, 나를 위한 시간

by HoA

나는 지하철을 좋아한다.

대학 입학하면서부터 평일이면 거의 매일 지하철을 한두 시간씩 탔으니 내 인생의 상당한 시간을 움직이는 공간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지하철 타는 것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나는 지하철 1호선 승객이 되었다. 낡고 빽빽하기로 악명 높았던, 콩나물시루 같은 공간에 한 명이라도 더 싣겠다고 푸시맨까지 동원했던 1호선과 그에 못지않은 2호선을 거의 매일 타고 다녔으니 이미 희미해져 버린 기억이긴 해도 아침저녁의 한 시간의 루틴은 대개 피로와 투쟁의 현장 그 자체였지 싶다.

하지만 좋아하던 친구와 지하철 한 칸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함께한 시간, 그것도 모자라 플랫폼 의자에 한참을 앉아 나누던 이야기, 하루하루 미세하게 다른 모습으로 빠르게 스치던 창밖 풍경, 지하철 역사 안에서 종종 사 먹던 달콤한 만쥬는 똑같이 희미해진 것들 중에서도 빛나는 기억이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을 정말로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결혼하고 나서부터다. 신혼집과 회사를 오가기 위해 3호선을 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는 지하철이 사람들을 빼곡히 태우지 않고도 운행할 수 있다는 것, 때로는 앉을자리가 나기도 하는 나를 위해 주어진 공간이 꽤나 넓어 옆사람과 살이 부딪히지 않고도 여백이 충분한 쾌적한 곳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출근과 퇴근을 하는 편도 4-50분의 시간을 꽤나 소중히 여겼고 실제로 알토란처럼 썼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면 나만의 것이 특히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외동딸인 덕에 혼자만의 시간이 익숙했고 또 반드시 필요한 내겐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이 꽤나 괜찮은 대안이 되어 주었다. 심지어 이동을 할 수도 있으니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도 아니어서 일석이조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주어진 나만의 시공간 속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일과를 처리하거나, 재미있는 영상이나 노래를 즐기는 그 시간이 내겐 귀했다.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서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던 뒤죽박죽 한 문제의 실마리가 대부분 지하철에서 멍하니 서있는 동안에, 혹은 출퇴근 길에 걷다가 문득 떠오르는 일이 많았다. 짜증 나는 일, 스트레스받게 하는 사람은 고요한 밤 가만히 누워있을 때 머릿속에 들어와 정신을 헤집는 반면 좋은 기억, 신선한 아이디어, 하고 싶은 일, 문제의 해결책, 감사함이 마음에 일어나는 건 대개 움직이는 공간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휴대폰에 떠오르는 생각을 짧게 요약해두기도 하고, 가끔은 정리해서 SNS나 메모장에 남겨두는 일을 주로 출퇴근 길에 한다.

올해는 회사에서 출퇴근용 차량을 지원해 주어서 직접 운전해서 이동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때로는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한다. 특히 잠깐이라도 무념무상 그리고 무위의 상태로 있고 싶거나 하루 이틀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가 있어 털어 내어버리고 싶은 날엔 특히 그렇다. 그 거대한 움직이는 공간 안에 있다 보면 마치 바다에 파도가 넘실대며 더러움과 깨끗함이 순환하여 자연이 스스로를 자정 하듯 내 마음도 움직이는 지하철 안에서 덜컹이는 몸을 따라 출렁출렁하다가 더러움도 조금씩 흘려버리고 또 재미있는 것을 조금씩 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마흔 앓이로 목적지도 없이 지하철 2호선 안에서 두 번 순환을 하고 아무 역에 내려 커피 한잔 하던 서른아홉의 나, 인생의 행로를 두고 고민이 많아 지하철 1호선 출근길에서 하염없이 울던 스물아홉의 나, 야간 자율학습을 하다 도망 나와 지하철을 타고 한강에 가서 소리 한번 크게 지르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매 맞고 다시 공부한 열아홉의 나, 그런 나에게 지하철은 치유의 장소였지 싶다.

지금은 익숙한 길을 스스로 운전해 가는, 오롯한 내 공간에서 이어폰 없이 음악을 듣는 자동차가 좋다. 하지만 지하철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마음 내킬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서 또 좋다.

어느덧 가을이다. 내일은 지하철에서 다운로드하여 두고 한참을 보지 못했던 전자책을 읽어야겠다. 그리고 회사에 도착하기까지 걷는 몇 분 동안 제이미 칼럼의 노래를 아주 오랜만에 들어야겠다. 그러면 그 순간은 을지로 지하도를 걸을지라도 뉴요커가 부럽지 않다.



지하철 안에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

걸으면서 생각나는 것들

20대 초반, 새벽에 출근하며 느꼈던

왜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들은 늘 이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매일매일 소진한 표정으로 살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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