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having 13화

#도시락

12_주말엔 도시락을 쌉니다

by HoA


주말엔 엄마모드가 된다. 요즘 아이들은 무엇을 하건 하지 않건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도 아까워할 이유가 전혀 없던 우리 시절의 학생들과는 달리 꽤나 압축적이고 밀도 있는 삶을 산다. 일에 치인 부모 탓에 권장되는 모든 것을 하지는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6학년, 1학년 우리 아이들도 주말이 분주하다.

대치동 학원가에는 토요일, 일요일이란 단어가 휴식을 의미하지는 않은지 오래된 것 같다. 물론, ‘대치동 시스템’으로 일컬어지는 무리한 사교육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 혹은 의심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근처에 살고 있는 터라 아이들이 원하거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범위에서 학원을 몇 군데 보내고 있다. 두 아이의 나이차가 꽤 크다 보니 학원 오가는 동선과 시간대가 분산되어 때로는 한 나절 동안 집과 학원을 서너 차례 오가는 경우가 많다. 토요일 아침에 첫째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오면 둘째 밥을 먹이고 나서 바로 학원에 데려다준다. 오는 길에 첫째를 데려오고 잠깐 한숨 돌리면 둘째를 다시 데리러 가야 하는데 그 간격이 촘촘하다 보니 가족이 차분히 앉아 점심을 먹기가 쉽지 않다. 점심을 후다닥 먹고 치우고 다시 차리고 치우고 할 시간이 영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준비가 늦어지면 아이들이 영 배고파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어느 날부터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다행히 먹고사는 것에 진심인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덕분에 아이들이 주중에는 집밥을 충실히 먹는 데다 주말엔 늘 남은 식재료가 있는 터라 주말엔 간단한 메뉴를 선택한다. 몇 가지 안 되는 레시피를 돌려 막기 하다 보면 물릴 법도 한데 무엇을 만들어주건 별 타박 없이 두 아이가 잘 먹는다. 아이들 입맛이 까다로우면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 꽤나 스트레스일 테지만 “오늘 김밥 쌀까?” “오늘 샌드위치 괜찮아?” “도시락으로 파스타 싸줘도 돼?”라는 물음에 한결같이 “오, 좋죠!”라고 대답해 주고 맛있다고 칭찬해 주는 아이들 덕분에 요리하는 시간이 꽤 즐겁고 때로는 충만하기까지 하다.

가끔 큰 아이 특강이나 보강이라도 생기는 날이면 하루 이틀 사이에 도시락을 두세 번 싸는 일도 생긴다. 처음에 익숙 하치 않았을 때는 별거 아닌 일에 시간이 꽤 많이 흐르곤 했다. 월요일 출근길에 주말일을 복기하다 보면 하루 종일 밥하다가 세월 보냈구나 할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했던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하루가 길지 않음을 자각했을 뿐, 내 시간이 허투루 지나갔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배달음식 시키지 않고, 인스턴트를 가급적 피했다는 사실에 대한 소소한 뿌듯함과 매일매일을 더 신선한, 더 공들인, 더 새로운 음식을 하려고 수고하시는 친정과 시댁의 두 여성에 대한 감사함이 솟아올랐다.


아들은 평일에 학원 갈 때도 도시락을 싸는 일이 잦다. 외할머니 도시락은 엄마의 것과는 달리 보온 도시락에 따끈한 밥과 고기, 나물 반찬과 국, 곁들인 과일까지 한 짐 가득일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무엇을 먹느냐고 물어보니 자기처럼 집에서 도시락을 싸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김밥이나 햄버거를 사 오거나 엄마들이 시간 맞춰 배달음식을 학원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도시락 들고 가기도 힘들고 할머니 힘드시니 너도 배달시켜 줄까 하고 물으면 아이는 아무려나 괜찮단다. 하지만 친정 엄마는 본인 힘닿는 한 집에서 만들어 먹이는 게 맞는 거라고 그게 본인 소임이라며 먹거리의 중요성에 대한 일장연설을 시작하신다. 그 마음을 아는지 아이는 외할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은 잔반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한 상태의 도시락통만 가져온다.

나는 어렸을 때 멸치 반찬, 땅콩조림 맨날 남겨왔는데 손주는 외할머니의 사랑을 오롯이 받고 또 더 크게 보답하는 모양이다.
도시락을 싸는 마음은 늘 한결같다. 망상은 사라지고 그저 아이들이 맛있게 먹고 잘 자랐으면 하는 마음만 남는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없는 직장 다니는 엄마가 그래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엄마 손길이 닿은 음식을 먹이는 것이라 여기며, 아이들이야 당장은 모를지라도 언젠가는 분명히 엄마의 사랑법을 알아챌 것이기에 이왕이면 고운 마음만 담아 도시락을 싼다. 샌드위치와 김밥, 유부초밥, 오므라이스 등의 한 그릇 메뉴로 버티는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소한 것들 안에 나만의 애정이 농밀하게 담겨있다.


나의 마음은 지금 보내고 있지만 그 마음이 도착하는 것은 아마도 아주 아주 먼 미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얼굴조차 아득히 흐릿한 잔상만 남았을 뿐이지만 막걸리 넣고 발효시켜 쪄주시던 술빵, 손톱밑이 초록이 되도록 껍질을 벗겨내어 살짝 데쳐 무쳐주시던 고구마 순을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그때 그 맛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더욱 할머니가 생각나고 늘 우리 손주가 최고라고 말씀하시며 머리나 등을 쓰다듬던 거친 손이 그리워지곤 한다. 음식은 영양소를 담은 물질 이상의 것이다. 만들어 준 사람, 함께 그 밥상을 공유했던 사람들과 공간, 분위기에 대한 기억이다. 아이들이 언젠가 엄마를 기억할 때, 늘 일하느라 바빴던 그래서 멋있기도 했던 엄마도 좋지만 “엄마가 만들어주던 달걀 샌드위치는 진짜 맛있었어.” “엄마가 만든 바질페스토 파스타는 아무 데도 없는 독특한 것이었어.”라며 두 아이들이 따뜻한 기억을 공유하기를 바라기도 한다. 오늘도 기분 좋게 도시락을 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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