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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혼, 사립문을 나서다

원작 조주청 이야기 모티프 / 각색: 챗가이버의 소설

by 따뜻한꼰대 록키박

나루터의 바람은 늘 짭조름했다.
그날도 마을 사람들이 주막 마당에 모여 고된 하루를 탁배기 한 잔으로 달래고 있었다.
그때였다. 회색 장삼을 입은 노승이 허름한 바랑을 메고 사립문을 나서려다, 문득 멈추더니 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저 아가씨는 신랑이 셋이겠구나.”
말 끝이 묘하게 길었다.
“그런데 혼인은 네 번이겠지.”


사람들이 웃었다. 나도 그저 점괘쯤으로 넘겼다.
하지만 어머니는 얼굴이 굳었다.
그분의 눈빛 속에는 두려움이 스쳤다.


노승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팔자는 바꿀 수 없소. 첫 신랑은 농사꾼이 좋겠네.”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배에 올랐다.
강물은 그를 삼키듯 흔들렸다.


그날 밤,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술잔을 비우며 중얼거렸다.
“농사꾼이라니… 그것도 신랑이 셋이라니.”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인생도 늘 예측과 다른 길로 흘러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몇 해가 흘러, 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어머니는 더는 주막을 하지 않았다.
내가 시집갈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승의 말을 잊지 못한 어머니는, 결국 중농 집안의 순한 농사꾼 박서방을 택했다.


그는 말이 적고, 손이 크고, 눈이 따뜻했다.
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마치 사람 이야기를 하듯 했다.
“흙도 사람 같소. 정직하게 대하면 거짓이 없지요.”
그 말이 이상하게 내 마음을 붙들었다.


시집살이는 고됐다.
아침에는 밭으로, 저녁에는 장독대 앞에서 새참을 준비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싫지 않았다.
아이를 품에 안고, 불 피운 연기 사이로 저물녘을 바라보면, 세상에 이보다 평화로운 순간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던 어느 장날, 나는 박서방과 함께 장터에 나갔다.
오랜만에 북소리가 들리고,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그때 방물장수가 다가왔다. 이름은 홍도식이라 했다.
그는 세상 이야기를 꿀처럼 풀어냈다.
“아씨, 이거 보시오. 대궐마님도 쓴다는 향첩이오. 얼굴빛이 꽃처럼 피어납니다.”
그는 말을 예쁘게 했다. 웃을 때마다 엽전이 반짝거렸다.


그날 이후,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눈앞에 자꾸 아른거렸다.
논길을 걸으며도, 새참을 이고 가며도,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잊어버렸던 ‘설렘’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마실을 나가고 남편이 논에 간 사이,
홍도식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오랜만이오. 잊은 줄 알았소.”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가슴을 울렸다.
짧은 웃음, 스치는 손끝, 그리고 문득 찾아온 욕심.
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시어머니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내 심장은 북처럼 쿵쾅거렸다.
그날 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며칠 후, 나는 결국 집을 나섰다.
“세상 구경을 좀 해야겠어.”
그 한마디를 남기고, 사립문을 나섰다.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내 마음은 가볍게 부풀었다.
보따리 하나, 엽전 몇 냥, 그리고 어리석은 확신 하나.


홍도식과의 생활은 처음엔 달콤했다.
그는 세상 이야기를 매일 들려줬고, 웃음으로 날 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의 눈빛은 자주 멀어졌다.
어느 날, 그는 “가게를 차리자”며 내 전대를 풀게 했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세상은 달콤한 말보다, 조용한 밥냄새로 굴러간다는 걸.


엽전은 조금 남았다.
나는 그 돈으로 작은 술집을 열었다.
그 이름이 “별빛 사랑주”였다.
술은 잘 팔렸다.
손님이 많아지자, 어느새 왈패 기둥서방이 들락거렸다.
“아씨, 이 집은 내가 봐드리리다.”
그의 말에 나는 허허 웃으며 찬물 한 그릇을 떠놓았다.
그리고 서로 마주 절을 했다.
그날이 세 번째 혼인이었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기둥서방은 어느새 술상 앞에서 큰소리치고,
장부에는 빨간 줄이 늘어갔다.
그리고 어느 비 내리는 밤, 그는 술잔을 던졌다.
“이 집은 내 거요!”
그 말과 함께 손이 날아왔다.
따귀가 불처럼 아팠다.


비가 마당을 뒤덮었다.
나는 울면서 보따리를 쌌다.
이번엔 가볍지 않았다.
손끝이 떨렸다.
그래도 길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팔자는 굽어도 돌아오는 법이야.”


새벽녘, 사립문 앞에 섰다.
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문을 살짝 밀었다.
덜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박서방이 마당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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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됐나요?”
내 입에서 그런 말이 새어나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었지요. 그래도 먹읍시다.”


그날 저녁,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된장국이 짜지도, 싱겁지도 않았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그릇 사이로 흘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사랑은, 조용히 식탁을 지키는 사랑이라는 걸.


며칠 후, 나는 밭으로 나갔다.
흙을 손으로 만지니 따뜻했다.
모를 심으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내 길이었구나.”


그날 밤, 꿈속에서 노승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내게 미소를 지었다.
“신랑 셋, 혼인 넷이라 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혼인은 누구와 했을까?”
그의 물음에 나는 대답했다.
“저 자신과요.”


노승은 웃으며 강물로 사라졌다.
물결이 잔잔히 일었다.
그 잔물결 위로, 달빛이 은근히 번졌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사립문을 열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쳤다.
아이의 발소리가 들리고,
박서방의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문득, 그 모든 소리가 하나의 멜로디처럼 느껴졌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노승의 말이 틀리진 않았네.
신랑은 셋, 혼인은 넷.
하지만 그 넷째 혼인은,
이제야 진짜 혼인이지.”


그리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문틈으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사립문은 반쯤 열린 채로,
내 인생의 다음 페이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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