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내가 시니어라구요?
이직한 경력직들이 필수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낮아지는 자존감과의 싸움’.
내가 처음 이직 의사를 밝혔을 때, 주변에서 나에게 가장 많이 해준 가장 해준 조언도 자존감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일은 걱정 안하지만 분명 자존감이 낮아지는 시기가 올거야. 그 고비만 잘 넘기면 돼.'
직장생활은 10년차지만 이직은 처음이었던 나를 걱정하며 선배들이 해주신 말이다. 나 역시 당연히 각오한 부분이었다. 당시 내가 처음 이직을 결심하면서 다짐했던 것이 있다.
딱 1년만 울면서 다니자. 1년 후엔 편해질거야!
그리고 그 시기는 정말로 예외없이 나를 찾아왔다. 출근한지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며 나에게도 하나 둘 새로운 업무가 주여졌다. 낯선 시스템,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8년간 늘 내가 해왔던 일이었음에도 새롭고 낯설었다. 쉬운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의 자존감은 땅바닥을 추락했고 스트레스는 하늘을 치솟았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낮아지는 자존감과의 싸움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특히 업무를 대하는 사고 방식의 차이는 유독 더 적응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많은 고객이 이용할 수 있도록 혜택을 기획하고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는 내가 지난 8년간 해왔던 일과 동일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같은데 달랐다. 업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 동료 A : 오프라인 매장에 방문하는 고객이 쉽게 가져갈 수 있게 지류쿠폰을 제작해보는건 어떨까요?
- 동료 B : 단순한 지류쿠폰으로 제작하면 쉽게 버릴 수밖에 없어요. 버리지 않고 소장하고 싶게끔 만드는 방향으로 고민해야해요.
- 동료 A : 신년에는 운세를 많이 보니까, 부적 컨셉으로 제작해보는건 어떨까요? 부적 그림과 어울리게 모서리 끝에 QR코드를 넣어서 저희 앱으로 방문할 수 있게 유도하구요.
- 동료 B : 그거 좋은 생각 같은데요? 디자인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아요. 이번주에 디자인팀이랑 미팅 잡아볼까요?
매주 회의 시간이 되면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쏟아넘쳤다. 생각의 범위도 제한되지 않았다. 서비스를 알리고 성장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디어를 던졌다. 그리고 아이디어가 괜찮다고 판단이 되면, 그것을 실현시키기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발 벗고 나섰다. 이곳에서 망설이고 주저하는 사람은 단 한명, 나밖에 없었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내 머리 속에는 수많은 의구심으로 둘러 쌓인 질문들이 둥둥 떠다녔다. 이런 질문들은 마케터로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도록 항상 나에게 제약을 걸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8년 간의 시간동안 말이다.
'예전에 다 해본건데 효과 없어.'
'그거 해서 매출 얼마나 나올 것 같은데?'
지난 8년간 마케터로 일하며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였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보다는 다소 뻔할지라도 최소한의 결과값이 보장되는 아이디어가 환영받는 곳에서 일했다. 성공하면 100점이지만 잘 되지 않으면 0점을 받을 수 있는 리스크는 기피 대상이었다. 어쩌다 100점 200점을 받는 사람보다 매일 성실하게 70점 받는 사람을 칭찬했다.
그렇게 나도 항상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었다. 새로 들어온 후배에게 "그거는 우리 회사에서는 하기 어려운 아이디어야"라고 먼저 선을 그어버리는 선배가 되기도 했다. 나는 성실한 마케터였지만 성공할 수 있는 마케터는 아니었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시도와 점차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조직의 업무 방식이 나에겐 너무나 어려웠다. 내가 해왔던 마케팅을 이 곳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었지만 접근 방식이 달랐다. 마케팅도 다 다 같은 마케팅이 아니었다.
"우리는 정답이 없어. 다들 여기서 안주하면 안돼. 마케터는 새로운걸 계속 시도하면서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성과를 만들어야 해."
매주 팀 회의가 끝날 때마다 팀장님이 하는 말씀이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8년간 80점짜리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들고 다니며 안전한 선택만 해온 내가 정답이 없는 회사에서 일 하려니 모든 것이 어려웠다. 초롱 초롱 생기있는 눈빛의 친구들 사이에서, 나 홀로 동공지진이었다. 다들 새로운 시도를 위해 기꺼이 아이디어를 내고 있지만 나만 늘 묵묵부답이었다.
마케터의 기획이 곧 실행이 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해도 상관없으니 결과로 보여주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의 팀 동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업무적 자유를 즐겼다. 그리고 결과에 책임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보다 연차는 낮은 친구들이지만 일에 있어서는 나보다 훨씬 배짱있고 책임감도 큰 어른이었다. 이런 팀 동료들의 모습을 내가 하루 아침에 배우고 잘 흡수할 수 있을까?
지난 30여년간 내 스스로를 지탱해온 믿음이 하나 있다.
- 나는 공부든 일이든 마음 먹고 노력하면 충분히 잘할 수 있다.
그런데 30년 넘게 나를 지탱해주던 이 믿음이 최근에 흔들렸다. 나이, 연차는 먹을만큼 먹었지만 나잇값, 월급값을 제대로 하지 못한단 생각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 연차만큼의 업무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은 애저녁에 포기했고, 남들 하는 것의 반이라도 따라가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낮아지는 자존감과 싸우며 매일을 고군분투했다. 과연 내가 8년짜리 관성을 거스르고 새로운 회사에서 새로운 마케터로 새롭게 일할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진 않았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성실하게 배우고 따라하는 것 뿐이었다. 내가 8년간 일해왔던 방식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