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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Mar 30. 2020

수학 7등급이면 용접 배워서 호주 가라고?

때로는 실패하고 눈물도 흘리며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드라마가 있다

   2008년은 바야흐로 야구의 해였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파죽지세로 모든 경기를 승리한 국가대표팀은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1점 차 리드를 지키며 앞서나갔다. 하지만 심판의 오심과 항의하던 주전 포수의 퇴장, 9회 말 1사 만루라는 위기가 차례로 다가오며 패배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TV 화면을 통해 그 과정을 지켜보던 모두가 기대보다는 체념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구원투수가 던진 공이 병살타로 이어졌을 때, 사람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만화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아니 너무 식상한 전개라고 욕먹을 만큼의 극적인 승리. 야구 국가대표팀의 금메달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 찬 한 편의 드라마였다, 승리의 여운은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에는 축구공 대신 야구 글러브와 방망이를 든 아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많은 유소년 야구팀이 생겨났다.


   나도 그때부터 4년간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오후 수업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점심을 먹으면 곧바로 운동장에 나와 훈련 준비를 해야 했다. 같은 반 친구들을 밥만 먹고 도망간다며 장난을 쳤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매일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는 훈련과 심적인 부담감을 진심으로 부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운동장에 나오는 모두가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만큼 야구부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학교 안팎으로 계속되는 경쟁. 경제적인 부담과 불확실한 미래. 누군가는 네가 좋아서 하는 일 아니냐 묻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버틸 수는 없었다. 한계를 느낀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결국 대회 우승 같은 감격의 순간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중학교 2학년 여름, 나는 다소 허무한 기분으로 야구를 그만두어야 했다.


   *


   이후 진학한 마이스터 고등학교에 운동부는 없었지만, 각자의 전공 기술을 달련해 기능경기대회를 준비하는 기능특활부가 있었다. 실습에 필요한 모든 장비와 공간을 학교에서 제공하기 때문에 한정된 인원만 선별했고, 방학은 물론 명절에도 학교에 남아 실습을 해야 할 정도로 엄격한 생활을 했다. 그래도 대회 성적이 좋으면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매년 많은 친구들이 특활부 지원을 희망했다.


   처음에는 내신 성적이 좋지 않은 친구들의 도피처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매일 이어지는 엄격한 생활을 ‘공부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기말고사 근처가 되니 지원했던 이들 중 절반이 그만두고, 여름방학이 되니 다시 절반이 그만뒀다. 결국 끝까지 남아있는 건 자신의 전공에 흥미와 재능을 가진 친구들뿐이었다.


   특활부로 최종 선발된 인원은 1학년 2학기부터 정규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출석부에는 항상 비어있는 자리가 있었고, 실습실은 언제나 늦은 밤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교실에서 사라지던 야구부만큼이나 그들의 시간은 분명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밀도를 가지고 흘러가지 않았을까.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그만둬야 하는 이유가 떠올랐을까.


   *


   2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학교에서는 지방경기기능대회가 열렸다. 대회 기간 학교는 외부인에게 개방되고, 다양한 부스도 설치되어 일반 학생에게는 축제 같은 느낌을 줬다. 하지만 전공 선생님에게 끌려가 반쯤 억지로 대회 보조위원을 맡은 나는 4일간 실습장 여기저기를 누비며 잡무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덕분에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는 기능경기대회 현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특활부 친구들은 출전 선수가 되어 당당히 대회장에 서 있었다. 한 번에 4시간씩 걸리는 과제를 빠른 속도로 수행해나가는 그들의 얼굴에선 평소 보이던 장난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장비를 다루고, 기계를 조작하고, 프로그램을 입력해 동작을 확인하는 과정 하나하나에 긴장감이 녹아 있었다. 공기의 떨림이 느껴져 나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 해왔을까. 지방대회는 전국으로 가는 초석이자 이제껏 준비했던 것들을 펼쳐내는 첫 번째 무대이기도 했다. 그들은 다음 기회를 위해 매시간 최선을 다했다.


   나흘 동안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던 누군가의 진지함을 멍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대회가 마무리되는 일요일 오후, 창밖에서 흘러온 노을빛 때문에 실습장 전체가 불그스름한 색으로 물들었다. 결과가 발표되자 누군가는 환호를 질렀고, 누군가는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올림픽처럼 세계적인 대회는 아니었지만, 그곳에는 분명 수많은 드라마가 있었다.


   *


   유명 인터넷 강사가 수학 7등급이면 용접 배워서 호주 가야 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 그건 실수였을 것이다. 학창 시절 우등생으로 열심히 공부했다면,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갔다면, 과외나 학원 알바를 하며 높은 시급을 받았다면,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역시 강사 일을 한다면, ‘입시’ 이외의 노력과 성취를 마주한 적 없는 인생이라면 그건 분명 실수였을 것이다.


   처음 저 발언을 들었을 때 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용접을 하거나 기계를 고치고 있을 누군가의 삶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구나. 아직도 그들의 전문성과 진지함이 무시되고 있구나. 누구나 운동선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수학 7등급이면 공놀이나 하러 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지방대회에서 성적을 내고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선수들은, 2년에 한 번 개최되는 국제기능올림픽에 참가할 기회를 얻는다. 우리나라는 매년 우수한 성적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전 국민을 환호하게 만든 야구 국가대표만큼이나 작업복에 태극마크를 새긴 선수들도 한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 긴 시간을 인내와 끈기로 버텨왔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노력이 조금 더 떳떳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성취가 조금 더 자랑스러울 수 있다면 좋겠다. 때로는 실패하고 눈물도 흘리며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을 그들의 이야기가 무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계속 그들의 드라마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루어낸 가치를 비웃고 깎아내린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국가대표는 정말 호주로 가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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