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식당>과 야키소바, 그리고 닭강정
그런 날이 있다. 무턱대고 쓸쓸해지는 날. 식사를 준비하는 것조차 에너지의 사치가 되는 날. 그저 나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최대한 힘을 비축해 두고 싶은 날. 따뜻한 무언가가 필요한 날.
그런 날에는 메뉴 선택도 쉽지 않다. 흔치 않게 입맛이 떨어진다.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은 마음과 아주 맛있는 음식으로 가라앉은 기분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일상 스트레스 처방약인 피자, 치킨, 햄버거 같이 무거운 음식은 이상하게도 전혀 먹고 싶지 않다.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자주 먹지 않지만 아주 맛있게 먹은 적 있는, 그런 음식이 필요하다.
왠지 마음이 쓸쓸한 그날,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을 보고 있었다. 괜한 위로가 필요할 때 한편씩 보곤 하던 드라마. 마스터 역할의 코바야시 카오루를 비롯해 같은 배우들이 연기한 영화는 모두 극장에서 보았고, 넷플릭스에 있는 <심야식당 : 도쿄 스토리>도 봤는데 이상하게 드라마로 방영된 시즌 1,2,3은 본 적이 없었다. 동명의 만화가 원작이고, 드라마도 큰 인기를 얻은 유명한 작품이라 영화를 보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한참 일본 드라마에 빠져 있던 2006년 ~ 2008년 즈음에 이미 방영을 시작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일본 TBS에서 방영된 기간은 2009년, 2011년, 2014년, 각각 입시 준비, 대학 입학, 연애 시작 기간이었다. 회차 별 방송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파일노리' 등의 사이트에 올라 온 고화질 동영상을 다운받고, 일본어 능력자가 선의로 만들어주는 자막 파일을 목 빠져라 기다리던 중고등학생 시절의 시간과 열정이 그때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관련 법도 강화되던 시기였고. 시간이 흘러 동영상을 검색하고 구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가격의 OTT 서비스의 등장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 <심야식당 : 도쿄 스토리>(실질적인 시즌 4)를 보게 되었는데 옴니버스로 구성된 드라마의 특성 상 이전 이야기를 몰라도 큰 문제가 없었다.
얼마 전 <심야식당 : 도쿄 스토리>의 시즌 2(실질적인 시즌 5)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몇 편 보던 중, 갑자기 이전 시즌이 보고 싶어졌다. 극 중 심야식당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는 단골 손님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앞 시즌에 분명 그들이 주인공인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았다. 극에 대한 궁금증 외에도 오랜 스트레스로 지친 마음을 오래오래 달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가만히 앉아 스크린에 집중하며 <심야식당>이 불러일으키는 멜랑콜리한 감정을 길게 느끼면, 마음이 조금 달래질 것 같은 그런 느낌. 다행히 왓챠에서 시즌 1,2,3을 모두 서비스하고 있었고, 며칠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한 편씩 아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심야식당>은 매 에피소드마다 메인이 되는 요리와 그 요리에 얽힌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밤 12시에 문을 열어 아침 7시 즈음 문을 닫는 이 식당에는 '마스터'라고 불리는 무뚝뚝하면서 따뜻한 주인장과 각각의 특색이 있는 손님들이 가득하다. 메뉴는 돈지루(돼지고기 된장국) 정식과 맥주 정도가 전부지만, 가능한 원하는 메뉴는 무엇이든 만들어 준다. 영업 시간의 특성 상 야쿠자, 스트리퍼, 게이 바 사장 등 '밤일'을 하는 인물이 꽤 등장하고, 그 외에도 트랜스젠더, 엔카 가수, AV 배우,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시나리오 작가, 지방에서 올라온 영업 사원, 만화가 지망생,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사에서 숙식하며 생활하는 학생 등 우리 주변에 분명 존재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예전 작품이기도 하고, 최근작까지도 여성 인권 감수성이 낮은 일본의 분위기 탓에 불편한 대사나 장면을 종종 마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돋보이는 요소가 있다. 소수자의 일상을 비추는 이야기들과 그 중심에 있는 마스터라는 존재, 그리고 음식. 마스터는 모든 손님을 일관적인 태도로 대한다. 그들이 힘든 삶을 토로할 때,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널리 알려진 행동을 할 때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묵묵히 들어줄 뿐이다. 그저 그들이 주문한 음식을 내어 놓는다. 이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위로라는 듯이. 마스터의 음식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사람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라고 대신 말해주는 것 같다.
시즌 1의 8화에서는 아이돌 출신의 배우 '카자미 린코'가 주인공이다. 바람이 부는 날에 종종 심야식당을 방문하는 그는 언제나 달걀 프라이를 올린 '소스 야키소바'를 주문한다. 심야식당의 또다른 손님이자, 달걀 프라이를 올린 소스 야키소바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정도로 오랜 팬인 두 영업 사원의 입을 통해 카자미 린코가 빚을 남기고 실종되어 버린 아버지로 인해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얼마 후, 그는 한 영화에서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난 아버지를 용서하는 역할을 연기하게 된다. 린코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이래서 아이돌 출신은 쓰지 않으려고 했다'며 노골적이고 무례한 발언을 서슴치 않고, 린코는 점점 작아진다.
어느 날 아침, 추레한 행색의 한 남자가 마스터의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 들고 심야식당을 방문한다. 보답으로 마스터는 아침밥을 대접하는데, 허겁지겁 먹던 그는 TV에 카자미 린코의 신작 영화 제작 발표회 현장이 나오자 밥그릇을 내려놓고 TV 앞으로 이동해 눈을 떼지 못한다. 마스터는 카자미 린코가 식당에서 종종 소스 야키소바를 먹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남자는 마스터에게 소스 야키소바에 '시만토 강의 파래'를 올리면 풍미가 훨씬 좋아진다는 말을 전하며, 다음에 린코가 오면 그걸 뿌려 주라고 무심히 말한다.
차가운 바람이 스산히 불던 어느 밤, 카자미 린코는 다시 심야식당을 방문한다. 여느 때처럼 달걀 프라이를 올린 소스 야키소바를 주문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마스터에게 그는 사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가 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원망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아주 천천히 마음을 털어놓는다. 마스터는 소스 야키소바를 내어 준다. 시만토 강의 파래가 뿌려진 야키소바를 보고 놀라는 린코에게 마스터는 어떤 사람이 알려줬다고, 그 사람도 린코의 굉장한 팬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야키소바를 먹어야 했다. 달걀 프라이를 얹은 야끼소바. 오늘은 그 음식이 나를 지탱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떠오른 식당이 있었고, 마침 배달 서비스도 하고 있었다. 친구의 추천으로 한번 방문했던 곳이었다. 분위기와 음식이 모두 훌륭했다. 다만 웨이팅이 길다는 부담감과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다시 가지 못했다. 그래서 배달 서비스가 더욱 반가웠다. 기나긴 대기도, 비말에의 걱정도 없이 집에서 편안하게 맛있는 야키소바를 먹을 수 있다니.
평소 같았으면 다회용기를 가지고 직접 가게로 가서 포장해왔겠지만, 그럴 에너지가 없었다. 아침부터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어 암막 커튼을 치고 밤의 이야기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배달앱에서 2만원 이상 4번 결제 시마다 1만원을 돌려주는 '정부외식지원쿠폰'이 다음 날 종료될 예정이었다. 쓰레기가 나오겠지만, 나는 지금 몸도 마음도 쓰레기같고, 쓰레기를 생성하는 인간 쓰레기라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며 죄책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경쾌한 현관 벨소리와 함께 도착한 야키소바가 내 앞에 놓였다. 내 몫의 '돼지고기 클래식 야키소바'와 산이 먹을 '닭고기 시오 야키소바'.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두 음식을 산과 함께 나눠먹을 생각이었겠지만 그날만큼은 기본 야키소바의 소스의 클래식 야키소바 한 그릇을 온전히 다 먹고 싶었다. 카자미 린코가 심야식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 몫의 한 그릇을 온전히 다 먹어야 내가 살아날 것 같았다.
포장을 뜯고 먹을 준비를 하던 그 때, 방에서 나온 산이 '나의 클래식 야키소바'를 자기 앞으로 가져가더니 "내가 이거 먹을래."라며 젓가락으로 면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기 시작했다. 내 소중한 야키소바가, 사라지고 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야키소바가 주는 위로를 받아낼 생각이었는데, 웬 짐승이 나타나서 내 경건한 시간을 헤집고 있었다. 충격적인 광경 앞에서 딸깍, 하고 이성의 퓨즈가 끊겼다.
내가 먹을 거야!!!!!!!! 내 거야!!!!!!
엄청난 짜증과 함께 소리치는 나를 어이없게 바라보던 산은 기분이 상했는지 먹던 야키소바를 내려놨다. 그럴 만도 하지. 먹을 걸로 치사하게 구는 나한테 정이 떨어졌을 거다. 미운 일곱 살도 나눠 먹을 줄 알 텐데. 그렇지만 그 야키소바는 내가 날 치유하기 위해 주문한 약이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진통제가 드디어 눈 앞에 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눈 앞에 보여주기만 하고 훽 가져가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포효하지 않으리……. 그리고 시오 야키소바 먹는다며… 네가 먹을 거였으면 클래식 두 개 시켰을 거야…
그렇게 사수한 클래식 야키소바에 시만토강의 파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함께 온 파래 가루와 추가 소스를 듬뿍 뿌렸다. 짭짤하고 시큼하고 달짝지근한 야키소바 소스의 맛이 온 입에 퍼졌다. 적당히 꼬들꼬들한 면과 반숙 노른자의 고소함, 달걀 프라이의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원하던 맛이었다.
기분이 상한 채로 시오 야키소바를 먹던 산은 입에 맞지 않는다며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덩달아 조금 시무룩해진 나는 미안한 마음에 나의 클래식 야키소바를 건넸다. 이미 온전한 한 그릇은 물 건너 간 마당에, 친구들과의 여행을 앞둔 그를 상한 기분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마늘과 소금으로 간을 해 알리오 올리오의 맛이 나는 시오 야키소바도 난 꽤 마음에 들었다. 산은 내가 뺏어 갔던, 소스와 파래를 왕창 추가한 클래식 야키소바도 너무 짜다며 잘 먹지 않았다. 결국 두 그릇의 야키소바가 내게 왔다. 불편한 마음으로 잘도 먹었다. 내가 괜한 욕심을 부려서 산을 잘 못 먹게 했다는 죄책감과, 온전하진 않지만 한 그릇보다는 넉넉한 두 종류의 야키소바가 내 것이라는 풍족함이 뒤섞인 마음으로.
산이 떠나자 마음은 더 헛헛해졌다. 두 그릇의 야키소바로 배는 채웠지만 마음엔 오히려 더 큰 구멍이 난 것 같았다. 사실 이 마음의 가장 큰 원인은 오늘 밤 산이 집을 떠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나인데. 왜 간만에 주어진 소중한 시간에 이리도 쓸쓸했을까.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노랫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내가 집을 비울 때 산이 왠지 모르게 무기력 해졌는데, 같은 증상이었겠다고 생각했다. 온기를 가진 한 사람이 곁에 있다 떠날 때, 남은 사람은 차가운 공기를 마주해야 한다.
영영 이별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1박 2일에 유난이라니, 쿨하지 못한 내가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자주 집을 비우는 건 난데 말이다. 생각이 많아지고 감정이 침잠할 때는 '나는 왜 이러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이럴 땐 억지로라도 생각을 차단하고 무의식의 상태로 빠져 머리를 쉬게 해야 한다.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잠으로 도망쳤다.
일어났을 때 밖은 벌써 어두웠고 기분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점심 때 반도 채우지 못한 헛헛한 마음을 달랠 또 하나의 음식이 필요했다. 홀로 남겨진 집에서, 동그란 공기로 감싸줄 만한 든든한 음식. 눈 앞에 놓여 있는 것만으로 기분 좋은 음식. 소울 푸드 중 하나인 BBQ 황금올리브 치킨을 잠시 떠올렸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입맛이 당기지 않았다. 아래로 푹 가라앉아 있는 에너지를 북돋울 음식이 또 없을까? 자주 먹지 않았지만 알고 있는 맛. 좋아하는 맛. (몇 시간 전에 분명 같은 고민을 했던 것 같은데…) 배달 어플을 휙휙, 지루한 얼굴로 한참을 넘겼다. 그러다 갑자기 발견한 반짝이는 이름. 가마로강정. 가마로강정이다.
가마로강정을 처음 만난 날은 졸업 영화 편집 시즌이었다. 영화학과 생활의 피날레라고 할 수 있는 졸업영화제를 일주일도 남겨 두지 않은 때였다. 처음으로 학교가 아닌 곳에서 상영하고, 외부인에게도 공개되는, 각자 연출한 졸업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4학년들은 주말에도 썩은 동태 눈으로 학교 편집실에 모여 되돌릴 수 없는 촬영 결과물을 어떻게 오리고 붙이고 소리를 다듬어 더 그럴싸하게 만들지 밤새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건물 지하에서 아무도 제정신이 아니던 그날은 산과 티티의 생일이었다. 같은 날인 남자친구와 친구의 생일을 챙겨주기 위해 그 와중에 케이크를 사 왔고 12시가 되자마자 편집실 밖에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누군가 야식 겸 파티 메뉴로 주문해준 가마로강정을 먹었는데 차갑게 식은 그 닭강정이 너무 맛있었다. 매콤한 양념과 달콤한 양념에 묻은 닭강정을 번갈아 입에 쏙쏙 넣어 오물거리다가 하나 둘 커다란 맥 앞으로 돌아가던 그 얼굴들. 퀭하고 시꺼먼 얼굴 사이에 동시에 번졌던 그 미소 띤 시간이 떠올랐다.
저마다의 사연과 그 앞에 놓인 음식. 가마로강정은 나를 위한 심야식당 메뉴였다. 당장 쓸쓸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는 음식. 추억을 잠시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음식.
벨이 울리고 고소한 냄새와 함께 도착한 닭강정을 테이블에 펼쳤다. 심야식당의 오프닝곡이 울려 퍼졌고, 난 잠시 어디론가 빨려들어갔다.
*야키소바
- 돼지고기 클래식 야키소바 : 12,500원
- 닭고기 시오 야키소바 : 13,500원
*닭강정
- 매콤/달콤 강정 반반 : 18,000원(배달)
- 핫도그 : 1,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