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백세희 작가를 애도하며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우울증 치료 초기, 기분부전장애와 불안장애를 앓으며 치료기를 담고 있는 에세이로 나에게 다가와 곁에 있어주던 사람이.
내가 처음 진단받았던 우울의 이름은 '불안성 우울장애'였어요.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매일 술을 마시고 자주 몸에 상처를 내고 어떤 처치도 않은 채 잠을 잤어요.
필사적으로 살아왔으나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보잘것없는 인생.
매일매일 죽고 싶었고 매시간 살기 싫었어요. 애들 중간고사 끝날 때까지는, 지금 맡은 애들 수능 끝날 때까지는 있어줘야지, 시험을 망치면 인생 끝날 줄 아는 새싹 같은 애들에게 폐를 끼칠 순 없잖아. 수능 끝나고 죽자고. 마음은 그렇게 먹었으나 이대로 영원히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하고 눈을 감고 눈을 뜨면 또 눈을 떴구나 하고 절망했습니다.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힘들었어요. 매분 매초를 왜 살아야 하는가의 이유로 시달렸어요.
일하는 시간엔 괜찮았어요.
하지만 그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그저 버티는 시간이었습니다.
일하는 날에는 남은 시간을 그렇게 버티고, 쉬는 날엔 수면제를 먹고 잤어요.
자고, 술을 마시고, 자고, 수면제를 먹고, 자고. 버틸 수가 없으니 빨리 다음 주가 왔으면 하면서.
그녀는,
치료를 시작했던 초기에 그렇게 다가와 나에게 와 몇 시간이라도 버티는 숨을 주었던 사람이었어요.
매일 종현이가 남긴 <하루의 끝>을 듣고, 혹시 힘들면 연락하라며 개인 연락처를 적어준 선생님의 메모를 늘 보이는 곳에 놓고 쳐다봤어요. 그리고 내 마음을 서술해 놓은 것 같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특정 에피소드를 반복해서 읽었어요.
그 에세이를 시작으로 엄청나게 많은 에세이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어요. '우울증'이라는 키워드에 걸리면 보이는 족족 읽었던 것 같아요. 의사가 쓴 사례집이든, 거의 논문에 가까운 교양서적이든 가릴 것 없었다.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나와 같은 이유로 같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찾아다녔죠.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부정당했던 과거들에 짓눌려 매일매일 끝없이 끝없이 가라앉았어요. 그럴수록 간절하게 혼자가 아니고 싶었으나 누가 이런 나를 볼까 무섭고 두려워서 철저하게 혼자이고 싶었죠. 한 번만 더 '너 이상해', '너 좀 질려' '언제까지 그 옛날일 갖고 그럴 거야? '그만 좀 해, 지겨워'라는 말을 들으면 못 견딜 것 같았거든요.
그때 내 곁에 있었던 게 그녀였어요.
내 모습이 너무 못생기고 괴물 같아 보여 죽고 싶었을 때, 그녀는 옆에 같은 자세로 쪼그려 앉아 본인도 스스로가 예뻐 보이지 않아 힘들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어요. 내가 너무 밉고 너무 싫어 몸부림치며 거울을 던져버렸을 때 나도 그놈의 자존감 때문에 절절맸다고 속상한 목소리로 말해왔어요.
그녀의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에는 매 화의 에피소드마다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 내용이 장면으로 삽입되어 있어요. 그런 구성이라 책에 있는 문장 중 절반은 구어체다 보니. 어떻게 말할지, 목소리는 어떨지 그런 것들이 쉽게 상상되어 나는 책을 펼치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요. 어느 순간 책에 있던 문장으로 말하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다른 말도 들리더라고요. 그렇게 몇 개월을 내 손이 닿는 곳에 그 책 두 권을 놓아두고, 어디 나갈 때는 들고 다니고, 잘 때는 머리맡에 두고 잤어요. 그렇게 1년이 조금 못 되게 지냈던 것 같아요.
그 책을 책장에 꽂을 수 있게 됐을 때부터 주기적으로 그녀의 소식을 확인했습니다. 검색 엔진으로 그녀가 어디 어디에서 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인스타그램으로 그녀의 사적인 행보나 메모들, 사진들을 확인했어요. 그녀가 세상을 지내고 있음을 확인하면 그래도 버티고 있구나, 그러다 그녀가 웃고 있는 사진이라도 보게 되면 잘 지내고 있는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바랐죠. 최근에도 신간 <바르셀로나의 유서>를 발간했다는 기사를 보고 안도 했었는데...
그런데
그런 그녀가 떠났어요.
떠나버렸어요.
영원히.
소식을 듣고 주말 내내 울었어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한 마디라도 건네 볼 걸.
귀찮아 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용기를 내볼걸.
당신의 책과 당신의 소식과 당신의 살아있음이
나를 해치려 스스로 손에 쥔 어떤 것들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려놓게 했는데.
같은 아픔을 아는 사람의 공감이나 이해가 얼마나 큰 힘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정작 나는 말 한마디 못 해줬네요.
메일이든 DM이든 어떤 걸로든 고마웠고 또 지금도 이렇게 지내주고 있는 거 보면 고맙다고 말이라도 한번 해볼 걸 그랬어요. 몇 년 동안 몇 번이나 생각했으나 '책도 많이 팔리고 강연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해졌으니 그런 말은 수 없이 들었겠지.', '괜히 바쁜 사람에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순 없어.', '구구절절 쓰면 사연팔이 같아 보일 거야. 그것만으로도 질려 버릴지 몰라.' 같은 생각으로 이내 그만뒀거든요. 원래 ENFP였던 나보다 그녀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보여서 그녀가 매일 쓰고 있을 가면이 더 무게가 나갔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가뜩이나 힘든 사람에게 괜히 폐를 끼치거나 불쾌감이나 불편함을 주게 될까 봐 마음에 담아두고 눈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그쳤는데...
이제는 아무리 바래도
고마웠다는 말을 아무리 하고 싶어도
들을 사람이 없네요.
마음속에 있던 불안과 우울이 병일 수도 있음을 알려주고 내가 병원에 갈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종현이가 세상을 떠난 즈음이 되면 나는 소금에 절여진 배추처럼 우울에 젖어 가라앉아요. 해마다 그즈음이면 당신의 책을 안고 술을 마시며 종현이의 목소리를 찾아들었어요.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그댄 내게 자랑이죠...라고 속삭이는 시 같은 목소리와 옆에서 나도 그래, 하며 종알대는 목소리가 같이 들리는 공상 속에 있으면, 그날을 넘길 수 있었어요. 내가 언제 이곳을 떠날지는 모르지만 오늘만 넘기자, 오늘만 넘기자 하고 몇 년째 버티고 있는데...
슬픔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도,
우울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던 몸부림도 오늘은 아무 소용이 없네요.
미안합니다, 세희 씨.
당신이 세상에 낸 용기로 몇 십번을 버텨놓고 정작 나는 그 신세를 갚지 못했어요.
나는 용기가 없어요. 이제 다 닳아버렸죠.
하지만 원래의 내 모습이 생각이 안나고, 세상에는 꽁꽁 숨기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당신에게 한 마디는 충분히 건넬 수 있었는데.
조금만 더 용기를 내 볼 걸.
저 마음 약한 이가 고맙다는 말을 기껍게 듣거나 하진 않을 텐데.
저의 비약과 지레짐작으로 당신에게 닿을 수도 있는 말 한마디를 전하지 못했어요.
내가 너무 모자라서, 내가 너무 겁쟁이라 편지 한 통도 전하지 못했네요.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그리고... 고마웠어요.
이렇게 말해도 당신에게는 닿지 않을 텐데.
어떡하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