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없지만 오늘은 있어요
저에게 우울이가 오면 저는 수압을 온몸으로 이고 살고 있는 심해어들과 같아져요.
우울이와 완벽하게 가라앉아, 최대한 절전모드로 에너지를 최소로 쓰는 방식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조금 힘이 나면 서서히 움직입니다. 바다 밖에서 풍랑이 오든 해일이 오든 간조든 만조든 휩쓸리지 않고 오롯이 우울이만 감당하면 되거든요.
처음에 우울증을 진단받고 치료할 때 복약지도를 받으며 당부받았던 것은 딱 하나였어요.
기본적으로 신경정신과 약제는 자신에게 맞는 약을 찾는 게 중요하니, 처방받는 약에 대한 몸의 반응을 살펴 알아오라고요.
처음엔 버겁기만 했어요. 우울과 불안을 감당하기만도 바빴어요. 버겁기만 했을 때는 짓눌리기만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분 까지는 아니에요.
맞는 약을 찾을 때까지 서서히 증량했다가 부작용과 효과를 저울질해 가며 끊임없이 내 '현재'상태, 몇 시간에 걸친 '오늘'을 살폈습니다.
그렇게 지금 우울이와 함께 있는 여러 방법을 만들어 내었어요. 이제 우울이가 왔을 때의 대처 방법을 가지게 되니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겨서 불안함이 많이 사라졌어요. 여유가 생긴 거죠. 모든 관계를 차단하고 내가 겁먹지 않고 긴장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람들만 만나는 것으로 새로운 자극을 피하고 있으니, 우울이만 감당하면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전에는 모르던 걸 알게 됐습니다.
저는 미래를 보며 사는 사람이었어요.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잘 될 거야 하며 장밋빛 인생을 꿈꾸고, 잠잘 시간도 없이 일을 하면서도 나중에는 '내가 만든 세계'를 꺼내고 누군가가 그 세계를 알게 되는, 서사를 쓰는 '작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꿈꾸면서 살았어요. 견디면 꿈꾸는 미래가 올 거라고, 지금 당장 시궁창인 건 아무렇지 않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위하면서.
불안과 우울이 늪처럼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아서 거기서 허우적대는 동안은 매일 오늘만 살았거든요.
끊임없이 오늘을 살, 이번 주까지 살, 이번 달까지 살 이유를 만들어 내야 했어요. 그나마 책임감으로 수능까지는, 이라고 기한을 정했었지만 그 뒤가 힘들었죠. 수능 끝났으니까 나 아니면 안 되는 애들도 없고. 굳이? 하며 매일매일을 죽고 싶다, 살기 싫다, 왜 살아야 하지, 내가 무슨 가치가 있나, 하는 마음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지나고 보니까 오히려 이 상태여서 저는 처음으로 '현재'를 살고 있어요.
살기 싫다는 그 마음이, 오늘은 살고 내일 죽자, 하는 마음이 온전히 오늘을 살게 하고 있어요. 역설적이게도.
당신께서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우울이는 지금 나의 상황에 대해서, 온전하게 현재만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있어요.
도리나 의무, 세상의 시선, 주변의 영향, 앞으로의 대비..........
이 모든 것들을 벗어나서 오로지 지금 현재의, '나'만 볼 수 있게 하고 있어요.
우울이가 의도한 건지, 그저 다 우연인 건지.
그런 하루하루들을 보내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오늘은,
불안과 초조가 특기인 우울이와 함께 있는 내가
다음 주 수능인 아이들의 안정제 역할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수능 끝날 때까지는 살아있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갑자기 밀려오는 우울을 신경안정제로 꽉꽉 눌러가며
우울이와 같이 가라앉아 있습니다.